인류는 20만년 전 등장했다. 인류가 나타나기 전 지구는 5번의 대멸종이 있었다. 가장 최근이 공룡이 멸종했던 백악기다. 그리고 6번째 ‘대멸종 시대’가 오고 있다. 원인은, 인간이 유력하다. 우리는 ‘한 생물 종이 모든 생물 종을 멸종시키는 전대미문의 사건’ 앞에 놓여있다. “인구가 줄지 않는 한, 인류는 멸망할 것 같다.” 카이스트 인류세 연구센터 연구원이자, 6월16일부터 19일까지 방송된 다큐멘터리 ‘인류세’ 3부작을 연출한 최평순 EBS PD의 결론이다. 

“인류는 역사상 존재했던 종들 가운데 가장 강력하다.” ‘총, 균, 쇠’를 쓴 인류학자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말이다. 인류는 자연을 정복하며 번성했다. 이제 그 존재가 지구를 위협한다. 화산폭발이나 소행성 충돌이 아니다. 인간이다. 인간이 ‘바이러스’가 돼 지구의 통제를 벗어났다. 이 끔찍한 상황을 설명하고자 노벨상을 받은 대기화학자 파울 크뤼천이 2000년 처음 사용한 용어가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다. 

▲ EBS 환경다큐멘터리 '인류세'의 한 장면.
▲ EBS 환경다큐멘터리 '인류세'의 한 장면.

‘인류세’는 인류가 지구의 지층에 직접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는 뜻으로, 46억년이라는 지구 역사를 알게 해주는 지질학적 단어다. 최PD는 “인류세는 기후변화보다 큰 개념으로 지구와 인간이 맺었던 관계를 뒤집는 혁명적 개념이다. 인간은 지구를 멸망시킬 강력한 행위자가 됐다. 지금까지는 지구의 외부적 요인으로만 멸종을 생각했는데 지금은 인간에 의해 멸종이 이뤄지고 있다는 게 인류세의 핵심”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5월 인류세 워킹그룹은 원자폭탄 투하에서 대기 핵실험 중단까지 기간인 1950년 무렵을 인류세 시작으로 보자는 안을 통과시켰다. 신생대 제4기 홀로세를 살아왔던 인류는 이제 인류세를 살고 있다. “우리는 46억년을 살아온 지구의 한 찰나를 사는 작은 종인데, 인류의 이름, 한 종에 불과한 인류의 이름을 한 세대에 붙였다.” 그만큼 인류의 ‘위협’은 심각하다. 

▲ EBS 환경다큐멘터리 '인류세'의 한 장면.
▲ EBS 환경다큐멘터리 '인류세'의 한 장면.

인류세의 대표적 증거는 2부에 등장하는 플라스틱이다. 20세기 미디어는 광고를 통해 ‘플라스틱=일회용’ 개념을 주입해 더 많은 소비를 유도했다. 플라스틱을 씻어서 다시 쓰던 사람들이 쓰고 바로 버리기 시작했고, 문명은 플라스틱에 중독됐다. 바다로 버려진 플라스틱을 생태계 바닥 생물이 분해하고, 그걸 먹은 물고기를 다시 인간이 먹고 있다. 

“바다에는 이미 미세플라스틱이 퍼져있다. 인류는 미세플라스틱의 인체 영향을 제대로 연구한 적도 없다. 이미 게임은 끝났다.” 150년 전 인류가 만든 플라스틱은 암석으로 발견되고 있다. “플라스틱이 용암의 열기로 돌에 엉겨 붙어 생긴 플라스틱 암석이 있다. 네덜란드 헤이그 박물관에 플라스틱 암석이 전시돼 있다. 그런데 하와이 해변을 가니까 플라스틱 암석이 너무 쉽게 발견됐다. 충격이었다.” 

▲ EBS 환경다큐멘터리 '인류세'의 한 장면.
▲ EBS 환경다큐멘터리 '인류세'의 한 장면.

인류세의 징후는 또 다른 곳에서 등장한다. ‘쓰레기 전쟁’이다. “2018년 1월 중국이 플라스틱 쓰레기 수입을 금지하면서 세계적인 쓰레기 대란이 시작됐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쓰레기업자를 만났는데 단가가 과거의 4분의 1로 떨어졌다고 했다. 개발도상국에서 쓰레기를 안 받기 시작하자 보낼 데는 없고 쓰레기는 늘고 있다. 인도네시아도 최근 미국에 쓰레기를 돌려보냈다. 단편적으로 볼 수 없는 문제다.” 최PD의 지적이다. 

처리비용이 값싼 개발도상국으로 가던 폐플라스틱 등 쓰레기는 이제는 갈 곳이 없다. 지난해 한국은 쓰레기 5천 톤을 필리핀에 ‘위장수출’했다 적발됐고, 쓰레기를 다시 한국으로 가져가라는 시위가 필리핀에서 벌어졌다. 한국 언론에선 쓰레기 대란이 벌어진 지난해 3월 관련 기사들이 한차례 쏟아졌다 금세 사라졌다. 이번 다큐멘터리 연출을 위해 최PD는 10개국을 취재했는데, 가장 자주 찾은 곳도 쓰레기장이었다. “쓰레기장 규모가 너무 커서 드론이 아니면 찍을 수 없었다. 미국 하와이섬에는 20년이 지난 한국 쓰레기가 있었다”고 했다. 

▲ EBS 환경다큐멘터리 '인류세'의 한 장면.
▲ EBS 환경다큐멘터리 '인류세'의 한 장면. 쓰레기 산이다. 

또 다른 멸망의 징후는 종의 다양성이 궤멸 된 현실에서 드러난다. 1부에 등장하는 닭 뼈는 인류세 칸에 들어갈 대표 화석이다. 한해 도살되는 닭은 약 650억 마리. 닭은 전 세계 쓰레기장에서 화석이 되고 있다. 닭의 대량생산은 인간의 식욕이 만들어냈다. 인간과 인간이 키우는 가축은 무려 육상생물의 97%를 차지하고 있다. 닭은 97%를 상징한다. 영국에서 ‘방주 프로젝트’가 시작되고 노르웨이에선 ‘씨앗저장소’가 등장했지만 ‘멸종’ 이후를 대비한 것에 불과하다. 

인구과잉도 돌이키기 어려운 문제다. 3부에 등장하는 인도네시아 붕인섬 바자우족 사람들의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인구가 불어나며 물고기 어획량은 줄어들고, 섬은 비좁아진다. 동네에 쓰레기통은 없다. 동네 한 쪽 쓰레기가 쌓이고, 바다로 떠내려간다. 다시 플라스틱이다. 소년은 바닷속에서 물고기 대신 플라스틱 쓰레기를 마주한다. 그리고 섬에선 또다시 아이가 태어난다. 

▲ EBS 환경다큐멘터리 '인류세'의 한 장면.
▲ EBS 환경다큐멘터리 '인류세'의 한 장면. 인도네시아 붕인섬. 

최PD에 따르면 해외에선 자발적 인류 절멸 운동과 같은 극단적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영화 ‘어벤저스’의 최종 빌런, 타노스의 이론이 현실로 등장하고 있는 셈. 플라스틱 쓰레기·방사능·인구폭발…인류세 연구자들의 관심사는 모두 일상에서의 심각한 문제들이다. 이 때문에 우리 사회에게 필요한 키워드는 ‘4차산업혁명’보다 ‘인류세’일 수 있다.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키워드이지만 유독 한국에선 생소하다. 

그러나 ‘인류세’는 암울하고 비관적이다. 최평순PD는 “취재할수록 우울해졌다. 핵심은 많은 인구와 자본주의다. 지금 구조는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걸 많은 학자가 오래전부터 경고해왔다. 재러드 다이아몬드 역시 우리가 50년 안에 경제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큰일 난다고 했다. 답을 줄 수 있다면 좋지만, 답을 줄 수 없는 문제”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그는 “보기 싫어하는 걸 보여줘야 하는 게 다큐멘터리 제작자의 숙명”이라고 했다.  

▲ EBS 환경다큐멘터리 '인류세' 촬영 도중 플라스틱 화석 앞에서 전문가와 인터뷰하는 최평순 EBS PD.
▲ EBS 환경다큐멘터리 '인류세' 촬영 도중 플라스틱 암석 앞에서 전문가와 인터뷰하는 최평순 EBS PD.

“예전부터 환경프로그램 만든다고 할 때 만나는 사람들이 말했다. ‘만들어봐야 안 바뀐다.’ 그래도 환경프로그램 하는 이유는, 모든 게 다 그렇지만, 환경이야말로 나와 세상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는 장르다. 우리가 쓰는 의식주와 전 세계적 문제가 다 연결되어 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일상에서 뭘 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만드는 게 환경프로그램의 힘이다.”

최PD는 EBS에서 ‘플라스틱 인류’ 2부작을 통해 2013년 8월부터 메인 연출을 시작했다. 지금은 ‘여섯 번째 대 멸종’이란 주제로 새로운 기획을 준비 중이다. 일종의 ‘인류세’ 시리즈 시즌2다. 최PD는 “인간의 힘은 상상했던 것보다 크고, 이제는 그 힘을 어떻게 쓸지 결정할 시기가 왔다”고 강조했다. 환경다큐멘터리 PD는 계속해서 ‘불편한 진실’을 드러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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