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과 가족들이 옥상에 오른 다음날, 또 다른 시각장애인과 가족은 삭발을 했다. 정부가 7월부터 장애인 현실을 반영 못하는 장애등급제를 폐지하고 맞춤형 지원을 강화하겠다고 밝혔지만, 시각장애인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조사항목을 만들어 또 하나의 차별을 낳고 있다는 주장이 이어지고 있다. 28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인근에서 열린 집회에는 200명 넘는 시각장애인들이 참석했다.

시각장애인들의 요구는 △시각장애인 목소리 외면하는 대통령의 응답 △시각장애인 장애특성·필요를 반영한 장애인서비스지원종합조사 문항 도입 △시각장애인 특성 반영을 위한 전문위원회 설치 △시각장애 관련 문항 도입 이전 발생할 수 있는 피해에 대한 피해방지책 마련 등이다.

시각장애인권리보장연대는 “‘혼자 먹을 수 있나요? 혼자 옷을 갈아입을 수 있나요?’ 시각장애인들이 활동지원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받는 질문들이다. 우리는 이런 문항을 접할 때마다 우리 상황과 다른 대답과 활동지원서비스를 받아야 하는 현실 사이에서 고민한다. 이 일들을 할 수는 있지만 반찬 위치를 확인하거나 옷 색상을 구별하는 일은 어렵기 때문”이라며 “더 이상 이러한 획일화된 문항에 대해 거짓말로 답하고 싶지 않다”며 호소했다. 

▲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와대 인근에서 시각장애인권리보장연대 주최로 열린 집회에 시각장애인 200여명이 참여했다. 사진=노지민 기자
▲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와대 인근에서 시각장애인권리보장연대 주최로 열린 집회에 시각장애인 200여명이 참여했다. 사진=노지민 기자

이들은 “그동안 정부와 여당은 서비스지원종합조사 문항을 시각장애인 요구와 특성을 고려해 검토할 거라고 수차례 밝히면서 연대에 기다려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해 왔다. 그러나 7월 시행되는 장애등급제 폐지를 앞두고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규탄 대회를 갖게 됐다”며 “시각장애인들은 단지 가고 싶은 곳에 가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일상의 권리가 보장되기를 바라고 시각장애인에게 굴욕감을 주는 서비스지원종합조사 문항에 대해 강력 반대한다”고 했다.

집회에 참석한 남정한 실로암장애인자립생활센터장은 “최근 보건복지부를 통해 나오는 이야기들은 장밋빛과 같다. 모든 게 다 좋아진다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서비스 준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장미에서 나오는 가시를 먼저 접하게 되지 않을까 너무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보좌관’이라는 드라마에 배우 이정재씨가 나온다. 국회의사당에 앉아서 ‘저 밖에 시위하고 있는 사람들이 언제부터 시위를 했는지 아냐. 그들은 한 번도 이겨본 경험이 없다. 이렇게 싸워선 답이 없다. 그들은 힘이 없기 때문에 남아있는 거다’라고 하더라. 맞다. 우리는 힘이 없다. 하지만 소수의견을 계속 주장해야 한다. 침묵해선 안 된다”며 대통령을 향해 “저희에게 발언할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다.

▲ 28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인근에서 시각장애인 200여명이 집회를 가진 가운데, 강윤택 시각장애인권리보장연대 대표와 시각장애인 자녀를 둔 김경숙씨가 삭발식을 갖고 있다. 사진=노지민 기자
▲ 28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인근에서 시각장애인 200여명이 집회를 가진 가운데, 강윤택 시각장애인권리보장연대 대표와 시각장애인 자녀를 둔 김경숙씨가 삭발식을 갖고 있다. 사진=노지민 기자
▲ 28일 시각장애인들이 청와대 앞으로 향하던 중 집회금지구역에 도달했다며 가로막는 경찰과 대치가 벌어졌다. 사진=노지민 기자
▲ 28일 시각장애인들이 청와대 앞으로 향하던 중 집회금지구역에 도달했다며 가로막는 경찰과 대치가 벌어졌다. 사진=노지민 기자

강윤택 시각장애인권리보장연대 대표와 시각장애인 자녀를 둔 김경숙씨는 삭발식을 가졌다. 강윤택 대표는 “오늘의 삭발은 목숨을 걸고 시각장애인 당사자들이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약속이고, 함께 해주시는 부모님들에 대한 약속이다. 거짓을 강요하고 장애를 과장하도록 만드는 정부에게 끝까지 투쟁해서 동정 아닌 권리를 보장받는 세상을 만들어가겠다는 결의의 삭발”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경숙씨는 “부모로서 잘못된 일을 보고 주저하고 양보하지 않겠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우리 아이들이 마음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렇게라도 해서 우리 아이들이 시각장애를 갖고 더 이상 비굴하게 살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만들어진다면 열 번이라도 머리를 깎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역시 시각장애인 자녀를 둔 엄마들은 직접 이들의 머리카락을 잘랐다. 머리카락이 잘려나가는 동안 시각장애인 당사자가 엄마를 향한 편지를 낭독했고, 머리카락을 자르던 엄마들은 끝내 울음을 참지 못해 오열하기도 했다. 잘라낸 머리카락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시각장애인들 뜻이 전달되기 바라는 마음과 함께 흰 상자에 담겨 청와대로 전달됐다. 시각장애인들이 청와대로 가는 길목에서 경찰과 한동안 대치가 벌어졌고 물리적 충돌도 있었으나 “여기(경찰)도 우리 아이들이다. 반말하지 말고 욕도 하지 말자. 우리 요구만 말씀드리자”고 자제를 권하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 시각장애인 15명과 시각장애인 부모 10명이 27일부터 청와대 인근 건물 옥상에서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고공농성 참여자들이 28일 집회 현장을 바라보며 손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다. 사진=노지민 기자
▲ 시각장애인 15명과 시각장애인 부모 10명이 27일부터 청와대 인근 건물 옥상에서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고공농성 참여자들이 28일 집회 현장을 바라보며 손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다. 사진=노지민 기자

앞서 15명의 시각장애인과 10명의 부모들은 27일 오후 7시부터 청와대 인근 종로장애인복지관 옥상에 올라 무기한 농성을 시작했다. 시각장애인권리보장연대는 “‘사람이 먼저다’라고 강조하는 정부가 시각장애인들을 투쟁으로 모는 작금의 현실에 대해 강력하게 규탄한다”며 “한 번도 시각장애인들 목소리를 제대로 들은 적 없는 정부의 각성을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복지부는 지난 25일 31년 만의 장애등급제 폐지 소식을 전하며 “제도시행 이후에도 장애인단체 의견, 제도운영 점검(모니터링) 결과 등을 고려하여 제도개선을 검토하기 위한 ‘종합조사 고시 개정위원회’를 시행 3개월 이내에 구성하고 1년 이내에 종합조사표를 개선하고자 하며, 이러한 절차를 매 3년마다 정례화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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