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무용 역사상 최초의 ‘반(反)성폭력 연대’가 형성됐다. 지난 6월14일 무용인 단체 ‘무용인희망연대 오롯’을 중심으로 시작된 서명운동이다. 오는 7월 유명 안무가 류아무개씨(49)의 제자 성추행 사건 재판을 앞두고 “무책임했던 무용계를 반성하고 피해자를 지지”하려고 지금까지 무용인 등 문화예술인 700여명이 서명했다. 무용인들이 성폭력 사건에 실명 걸고 함께 목소리 낸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 관련기사 : 유명 무용수, 26살 어린 제자 성추행해 재판 ]

“50년 넘게 정화된 적 없이 물이 고였고 그래서 썩었다.” 청년 안무가 A씨는 연대가 형성된 이유를 무용계 내 부조리가 폭발 직전에 다다랐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표적 문제가 성폭력이다. 스승을 고발한 대가는 무용계 퇴출이기에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도 말하지 않는 주제였다. 그러다 2016년부터 ‘#예술계 성폭력’ 고발운동, 미투운동을 경험하며 무용계 내 고발자가 하나둘씩 생겼다.

▲자료사진. 사진=pixabay
▲자료사진. 사진=pixabay

예고도 성폭력 쉬쉬… 은폐된 사건, 수십 년 쌓여

A씨가 그동안 듣거나 확인한 사건은 적어도 10여건이다. 그는 2011년경 서울 사립대 무용과 교수로부터 강간 수준의 피해를 당한 학생을 알고 있다. 동성 간 성폭력이었고 피해 사실을 직접 들었다. 한 여성 무용수는 8년 전 유명 안무가에게 강제 키스를 당했고 또 다른 무용수도 무용과 교수로부터 차 안에서 추행을 당했다. 모 무용단에선 대표의 성추행 피해자가 4명이나 있었고 모두 무용단을 나갔다.

미성년 피해자도 적지 않다. 예고 출신 무용과 대학생 B씨는 “2016년께 지역 예술고에서 한 현대무용 강사가 자신이 가르치던 레슨팀과 엠티를 가서 학생 한 명에게 위력으로 성관계를 시도한 사건이 있었다”며 “피해자는 자퇴했고 가해자는 그 학교만 나간 뒤 잘 활동하고 있다. 경찰·교육청에 신고가 안돼 파악이 안 될 뿐 사건은 정말 많을 것”이라 말했다.

서울예대 박아무개(64) 무용과 교수는 지난해 6월 학교에서 해임됐다. 박 교수는 전 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를 역임한 권위자다. 서울예대는 문학계 미투운동으로 오태석·하용부 교수의 비위행위가 폭로되며 논란이 된 곳이다. 수습책으로 꾸려진 학교 성폭력대책위원회에 박 교수의 가해 사건이 접수됐고 해임 징계가 떨어졌다.

2018년 3월엔 한양대 현대무용 강사 천아무개씨(43)가 성폭력 혐의로 고소됐다. 줄곧 한양대에서 교편을 잡아 온 그는 피소 직후 출강하지 않고 대학 산하 무용단에서도 모습을 감췄다. 그는 그해 초 20대 초반 무용과 학생을 추행한 혐의를 사 현재 서울동부지검 수사를 받고 있다.

유명 안무가 류씨는 이보다 3개월 후 피소됐다. 서울중앙지검은 지난 5월 그를 ‘위력에 의한 추행’으로 기소했다. 피해자가 그의 제자인 사실을 감안해, 류씨가 무용계 권위자이자 선생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피해자를 성추행했다는 요지다. 3년 간 사건을 숨겨 온 피해자는 무용을 포기하고 고소에 나섰다.

▲6월17일 KBS 9뉴스 “선생님 말대로 해야 상 받는거야” 제자 성추행 ‘무용계 큰손’  갈무리.
▲6월17일 KBS 9뉴스 “선생님 말대로 해야 상 받는거야” 제자 성추행 ‘무용계 큰손’ 갈무리.

학계 중심 권력 사슬 ‘1세대 원로→2세대 교수→강사·무용단→예대→예고’

무용계에서 고발이 드문 이유는 스승과 제자 간 위계질서가 다른 분야보다 훨씬 강력해서다. 위력은 교수에게 독점으로 쏠린 권력에서 나온다. 무용계는 학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교수가 전공자 진로에 행사하는 영향력이 막강하다. A씨는 “가장 큰 부분이 교수가 무용인의 밥벌이, 수입 활동을 좌지우지하는 건데 밉보이면 국물도 없다”고 했다.

무용단 입단부터 교수 입김에 휘둘린다. 한국 공공 무용단 25개 중 발레·현대무용 관련 무용단은 4개 밖에 없다. 대부분 사립 무용단에 소속될 수밖에 없는데 대학 산하 무용단이 주류다. 경력을 쌓는 각종 콩쿨 심사에도 교수가 영향력을 행사한단 입말이 무성하다. 참가자들부터 어느 대학의 교수가 심사위원인지에 따라 수상자를 미리 점칠 정도로 불신이 뿌리 깊다. 불과 5년 전까지 정부 지원사업 심사위원도 대부분 교수진이었다.

공연시장이 크지 않은 무용인들 주 수입원은 강의와 입시레슨이다. 중견 무용인 C씨는 “선생님에게 잘 보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시간강사 자리를 받겠느냐”며 “심지어 대학원생 조교까지 교수가 선호하는 인물이다. 지배력이 최하단까지 내려온다”고 말했다. 무용과가 있는 21개 예고 강사조차 교수 추천을 받지 않으면 될 수 없다.

입시는 교수와 권력의 강력한 연결고리다. 어느 예고에서 한양대에 학생을 보내고 싶으면 한양대 유명 교수의 제자를 강사로 부르는 식이다. 즉 교수와 우호적 관계를 맺어야 입시 레슨 기회를 많이 얻는다. 예고 출신 무용인 D씨는 “입시 때 강사들은 우리(학생) 증명사진을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으로 걸어서 교수에게 ‘얘가 내 제자’란 사실을 주지시킨다”며 “유명 무용대회를 가면 전국 예고 학생들이 다 와있다. 공연 후 교수들이 나오면 강사들이 제자들을 데리고 가 ‘저희 학교에서 왔어요’ 소개한다”고 말했다.

무용계 내 군기잡기 문화도 뿌리 깊다. 2017년 12월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과 폭행 사건이 단적인 예다. 4학년생 8명이 1~3학년 후배 15명을 집합시켜 가혹행위를 해 검찰에 기소의견으로 송치됐다. 폭력은 예고에서도 흔하다. 4년 전 예고를 졸업한 B씨는 “한 남학생은 한 강사가 오는 날마다 손을 덜덜 떨었다. 남학생들을 정말 많이 때린 강사였다”며 “여자애들만 창고에 몰아넣은 날이 있었는데, 교실에서 퍽퍽 소리가 들리길래 끝나고 봤더니 그 남학생 허벅지에 피멍이 들어있었다”고 말했다.

선생을 비판할 수 없는 존재로 떠받는 문화도 남아 있다. C씨는 “무용은 선생의 움직임을 몸에서 몸으로 배우는 도제식 교육인데다 예중·예고에서 특히 학생들을 순종적으로 기른다”며 “가장 강력한 곳이 전통무용으로 인간문화재부터 전수자들까지가 기록된 ‘족보’가 있다”고 말했다.

A씨는 “레슨에 목매지 않고 공연으로 돈을 벌 수 있다면, 시장이 넓어진다면 무용계 숨통이 트이지만 50년 간 학계 중심으로 고립돼 더 대중의 외면을 받았다”며 “이 구조를 깨지 않는 한 성폭력 고발도, 개혁도 힘들다. 카르텔을 깨야 한다”고 말했다.

수사기관과 법원이 무용계 특수성을 이해하고 사건을 처리해야 한단 지적도 나온다. 윤단우 무용 칼럼니스트는 “무용계는 특히 제자가 스승에 심리적으로 완전히 복속 당하는 사제 관계가 형성되고 이를 전제로 성폭력이 발생한다”며 “‘너 합의했지?’라 묻고 스승이 폭력을 행사했다면 본인 책임을 덜기 위한 확인에 가깝지 정상적으로 합의를 얻어낸 게 아니”라고 밝혔다.

윤 칼럼니스트는 “동의에 이르도록 길들여지는 과정에서 가스라이팅이 행해지며 피해자가 수용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 이는 ‘성적 자기결정권’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라며 “‘합의관계’란 가해자 논리를 그대로 수용해선 안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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