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강릉국에서는 지금 이런 일이...
KBS 강릉국에서는 지금 이런 일이...
[기고]

계몽시대의 철학자 장 쟈끄 루소는 “최소한의 것을 얻기 위해 애쓰는 사람을 세상은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최소한의 것을 얻기 위해 애쓰는 사람’은 생계, 당장의 생존이 가장 시급한 사람, 오늘날의 하층 비정규직 노동자를 의미할 겁니다. 맞습니다. 200년 훨씬 이전 루소가 살던 시대나 지금이나 세상은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 애쓰는 그런 사람을 알려고 하지 않는 건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게 이 글을 쓰는 이유입니다. 세상이 알려고 하지 않으니 스스로 적극적으로 알릴 수밖에는 없잖습니까?

직장에서 10년 남짓 일 했는데, 평소 무능하다거나 품행이 나쁘다거나 하는 소리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비정규직이 갑자기 당신의 급여를 28%나 삭감하겠다는 통고를 받는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나가라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 당연합니다. 부당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KBS 강릉방송국에서 최근 일어난 일입니다.

지난 6월17일입니다. KBS강릉방송국(이하 강릉국)은 편성부에서 일하는 프리랜서 비정규직 9명에게 원고 출연료 삭감 내용을 일방적으로 통고합니다. 9명 중 2명은 28%를 나머지 7명은 10~12%를 삭감한다는 내용입니다. 시행일은 7월 1일부터입니다. 삭감 이유는 강릉국의 제작비 사정이 안 좋다는 겁니다.

▲ KBS 강릉. 사진=KBS 홈페이지
▲ KBS 강릉. 사진=KBS 홈페이지

 

28% 삭감 통고를 받은 2명 중 1명은 여성 작가인데 현재 월 300만원에 좀 못 미치는 금액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28% 삭감이라니, 가히 살인적이지요. 이런 공포에 겁을 먹었는지 10~12% 삭감을 통고 받은 7명은 찍 소리 없이 수용했습니다. 28% 삭감을 통고 받은 여성 작가도 “회사가 어렵다고 하니,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12%로 공평하게 해달라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강릉국은 이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사실 급여의 12% 삭감을 받아들이는 것도 개인적으로는 쉽지 않은 일인데 말입니다.

궁금하실 겁니다. 왜 두 사람에게만 턱 없이 높은 삭감률을 적용하는지. 마치 타겟인 것처럼 말입니다. 두 사람이 왜 자신이 타겟이라고 느끼는 지에 대한 정황 증거는 차고 넘칩니다. 하지만 글이 너무 길어지기 때문에 그것까지 지금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두 사람을 타겟으로 삼았다는 의혹 말고도, 강릉국의 출연료 삭감 결정에는 중대한 잘못이 있습니다. 바로 표준계약서를 깡그리 무시했다는 사실입니다.

강릉국 편성부의 프리랜서 9명 각각은 지난 2019년 1월30일자로 KBS와 표준계약서를 체결했습니다. KBS에서는 ‘사장 양승동의 권한을 위임받은 위청준 당시 강릉국장’, 그리고 한쪽 당사자는 프리랜서 각 개인입니다.

KBS의 방송작가 집필 표준 계약서는 양승동 사장 취임 이후인 2018년 후반기부터 도입, 시행됐습니다. 취지는 을인 방송작가의 권리를 문서로 보장한다는 게 핵심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방송국에서는 작가를 을로 취급하는 관행이 여전합니다. 하지만 계약 체결을 통해서 두 당사자는 갑도 을도 아닌 민법상 각자 권리를 가진 동등한 주체가 되는 것이죠. 갑을이 동등한 권리의 주체가 되는 것. 이것이 표준계약서를 작성하는 근본 이유가 아닌가요? 

강릉국의 방송작가 표준계약서는 본사를 비롯한 전국 어느 지역국과 서식이 같습니다. 계약서에는 제1조(목적)에 “방송사와 작가 간 합리적 권리관계를 정하기 위한”, 제2조(기본원칙)에는 “방송사와 작가는 신의, 성실의 원칙에 따라”, 그리고 제5조(계약의 변경)에는 “계약의 변경이 필요한 경우에는 상호 합의하여 (중략) 서면에 의해서만 변경할 수 있다”고 돼 있습니다.

강릉국의 출연료 삭감은 제4조(계약의 변경)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강릉국은 합의는커녕 최소한의 협의 절차도 없이 국장이 일방적으로 삭감액을 정해서 통고했습니다. “합리적 권리관계”의 존중이나 “신의, 성실의 원칙” 따위는 그냥 뭉갠 겁니다. 

‘회사 사정이 어려우니까’, ‘상생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는 변명. 물론 지금 KBS가 어려운 건 사실입니다. 많이 어렵습니다. 공감합니다. 하지만 어렵다는 것이 계약의 내용을 깡그리 무시해도 좋은 이유는 아니지요. 그것도 누구는 28% 삭감이고 누구는 10~12% 삭감이라는 혹독한 차별까지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아닙니다.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28% 삭감이라니? 차라리 그냥 ‘나가라’고 말하는 게 솔직할 텐데 말입니다. 강릉국은 왜 두 사람에게 28%를 적용했는지에 대한 납득할 만한 답을 아직까지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열흘이 지났습니다. 강릉국에서는 아주 익숙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른바 조직논리. 정규직 간에 끈끈한 유대가 형성되고 반발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는 유무언의 압박이 가해지고 있습니다. 더 큰 불이익을 암시하면서 말입니다. 타성에 젖은, 몸에 밴 집단 갑질인 거죠. 

지난 24일, KBS 내 진실과 미래위원회가 활동을 종료하고 KBS 직원 19명의 징계를 권고했더군요. 진미위는 양승동 사장 이전 시절에 생긴 적폐를 청산하기 위해 만든 한시적 조직입니다. 적폐청산은 촛불 이후의 시대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강릉국에서 벌어진 표준계약서 무시 행위는 당장의 적폐 쌓기가 아닌가요? 표준계약서가 도입된 지 얼마나 됐다고. 제도는 만드는 취지보다는 지키려는 구성원들의 인식이 더 중요한 거 아닙니까? 

본사에서는 적폐를 청산하려고 노력하면서, 지역에서는 적폐 쌓는 걸 용납한다면 미래로 나가려는 건지 과거로 돌아가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본사와 지역 간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그런가요? 힘 있다고 정당한 계약까지 무시하는 건 전형적인 갑질입니다. 양승동 사장의 KBS와 갑질은 참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건 직장 내 괴롭힘이기도 합니다. 멈추십시오.

이 글을 쓴 본인은 28% 삭감을 통보받은 두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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