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공거사의 자뻑전’이란 도발적인 부제가 붙은 이 책은 퇴직한 60대 언론인이 일상의 단상을 기록한 ‘노인 동화’다. 강기석 뉴스통신진흥회 이사장이 42년 언론생활을 돌아보며 ‘악마들과 행복 만들기’라는 책을 냈다.

그는 1977년 경향신문에 입사해 1995년 뉴욕특파원과 2002년 편집국장을 지냈다. 2005~2008년 신문유통원장을 끝으로 이명박근혜 정부 내내 손자를 돌보며 야인으로 살았다. 해고와 복직을 반복했던 파란만장한 참언론 외길 인생은 먼 과거처럼 느껴진다.

책 곳곳에 둘째 딸의 아이를 돌보는 외할아버지의 가사노동이 켜켜이 묻어 있다. 그는 이명박근혜 정부 대부분을 백수로 지내면서 마눌님에게 구박받고, 대신 손자들을 돌보고, 선후배들과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고, 세상을 논하고, 세월호 광장을 맴돌았다.

지하철 공짜로 타는 ‘지공거사’의 자뻑전

김장 하는 날 무모하게도 여의도 집회에 나가려다가도 “무부터 채 치고 나가라”는 아내의 엄명을 받고선 군말 없이 무채를 만들고 인증샷까지 날린다. 큰딸 집에 가서 밥 먹고 습관처럼 설거지 하려고 나섰다가 싱크대에 놓은 식기세척기를 보고 부러워한다. 28년 된 금성 골드스타 전자렌지를 버리면서도 유씨 부인의 ‘조침문’을 생각할 만큼 사고가 확장된다.

▲ 강기석 뉴스통신진흥회 이사장. 사진=김도연 기자
▲ 강기석 뉴스통신진흥회 이사장. 사진=김도연 기자

큰딸이 넷째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내 딸이 자신의 성취보다는 아이들 키우는데 전념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실망 때문에 화가 났다”고 했다. 그런데 문득 자기들 인생관이 있는데 괜한 참견이라며 뒤로 물러섰다. 꼰대들의 자화상처럼 위태로운 일상인데도 그는 ‘입 다물고, 귀 열고, 목욕 자주 하고, 젊은이들에게 양보하고, 돈 내야 할 때 뒤로 빼지 않는’ 미덕을 배운 기특한 노인의 문턱에 섰다. 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만 65세를 일컫는 ‘지공거사’는 진짜 노인이 된 그의 또 다른 이름이다.

흘리기 쉬운 일상의 단편 속에서도 한국 사회를 읽어내는 힘은 여전하다. 아내의 명령으로 딸네 집에 가서 빨래 널고 오다가 아파트 계단에서 본 ‘청소하는 엄마에게’라는 낙서를 보고서 대학생 때 어머니가 건물 청소를 한 걸 기억해낸다. 금호동 금남시장에서 채소 노점상을 하면서도 늘 당당했던 어머니와 최순실이 향해 “염병하네” 멘트를 날린 청소노동자가 겹친다.

그는 ‘인자한 국모, 육영수’의 허상을 깨버린 김종필 전 총재의 발언을 듣고선 “박정희 신화의 마지막 터부를 발가벗겼다”고 했다. 김종필은 한 인터뷰에서 ‘인자한 국모, 육영수’는 “고집 세고, 인색하고, 남 배려 않는 사람이었다”고 폭로했다.

육영수의 아버지 육종관은 일제 초기 충북 옥천군 제1부자였다. 육종관은 1910년대 충북 옥천군에서 처음 승용차와 화물차를 가진 사람이었다. 당시엔 차 2대로 운수회사를 운영하는 이도 있었다. 육종관은 전기회사가 집에 전기를 넣어주지 않자 일본인 토목기술자를 불러 집에서 6km 떨어진 금강 상류에 수력발전소를 지으려 했다. 1932년 육영수가 옥천보통학교에 들어가 봄소풍 갔을 땐 하인 2명을 시켜 음식을 지게에 지고 가서 전교생을 먹였다. 물론 축첩은 기본이었다. 육영수가 어떤 집안에서 자랐는지만 알면 금세 짐작이 가는데도 우린 늘 ‘인자한 국모’로만 인식했다. 이런 이미지 정치는 누가 만들고 덧씌웠을까.

2번의 해고, 1번의 구속, 경향신문 30년

그는 1988년 경향신문 노조에 참가해 2번 해고되고 1번 구속됐다. 그는 1989년 초부터 언론노조(당시 언론노련) 초대 선전홍보실장으로 ‘언론노보’ 편집을 책임졌다. 언론노조 1년 파견을 마치고 회사로 복귀하자마자 1989년 12월25일 해고됐다. 초대 경향신문 노조간부 해고 5인방이 됐다. 당시 한화그룹이 경향신문을 인수하면서 강성 초대 노조가 걸림돌이었다. 해고무효 소송은 김선수 변호사가 맡아 승소했고 2년만에 복직했다. 늘 변치 않던 김변은 이제 대법관이 됐다.

▲ 강기석 이사장의 ‘악마들과 행복 만들기’.
▲ 강기석 이사장의 ‘악마들과 행복 만들기’.

그는 박근혜 정부 시작과 함께 외교부 장관이 돼 문재인 정부 초기까지 만 4년 넘게 재임한 윤병세를 두고는 “중학교 동창인 동시에 1976년 10회 외무고시 동기”라고 회고했다. 윤병세는 공부 잘해 경기고 나와 서울대 다닐 때 외시에 합격했다. 하지만 그는 간신히 건국대에 입학해 뒤늦게 공부해 윤병세와 같이 대학 3학년 때 외무고시에 합격했다. 그러나 그는 외교관이 되진 못했다. 1974년 유신반대 시위를 주동해 20일 구류를 산 전과 때문이었다. 운동권도 아닌 그는 당시 웬만한 대학에서 유신반대 시위를 벌이는데 너무도 조용한 건국대가 ‘쪽 팔려’ 구호를 외쳤다고 했다. 덕분에 그는 외시 2차 합격자 30명 중 유일한 3차 면접 탈락자가 됐다. 중앙정보부 직원이 낙담한 그의 집까지 찾아와 위로했단다. 그는 외교관 안 되고 기자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세월호 현장에서 느낀 미안함과 무력감

책 마지막 5장의 주제는 ‘세월호’다. 그는 “(안산 단원고 2학년 김동협) 학생이 하고 싶었던 많은 일을 생각하니, 오래 살아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노년을 잘 지낼 생각이나 하고 있었던 나 자신이 추악하게 느껴졌다”는 선배 언론인 김선주의 한겨레 칼럼을 읽으며 나이 팔십 가까운 늙은이들이 주일대사 준다고 넙죽넙죽 받아먹는 탐욕에 절망한다. 그는 일본 여성작가 소노 아야코가 ‘나는 이렇게 나이들고 싶다’는 책에서 “평균수명에 오르면 공직에 오르지 않고, 50이 넘으면 항상 젊은이들에게 양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쓴 문장을 떠올린다.

그는 세월호 참사에서 ‘참척(慘慽)’을 소환한다. 자식이 부모 먼저 죽는 걸 뜻한다. 누님과 매형의 결혼 60주년 회혼식에서 세 살에 죽은 딸 얘기가 나왔다. 무려 50년 전 일인데도 두 분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그만큼 참척의 고통은 평생을 간다. 그는 “군인 출신으로 극우에 가까운 성향을 가진 매형이지만 세월호 유가족에게 좋지 않은 말씀을 한 적이 없다. 자식 읽은 슬픔엔 진보와 보수가 따로 없다. 인간과 비인간이 있을 뿐”이라고 일갈했다.

마지막 페이지(434쪽)에 ‘탈상’이란 소제목으로 적힌 2017년 4월16일 ‘세월호 3주기’ 때 그는 3년상 탈상처럼 “몸에 지녔던 뱃지, 리본, 팔찌를 떼어놓으려고 했는데 새누리당 어떤 작자가 ‘3년 우려먹었으면 이젠 그만하라’고 막말하는 바람에 시기를 놓쳤다”고 했다. 종종 시비에 시달리면서도 뱃지를 몸에 지녔던 건 “이거라도 지니고 다니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미안함과 무력감 때문”이었고 고백한다. 그런 뜻에서 그의 책은 우화 속에서도 교훈을 주는 ‘노인 동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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