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계 국가 출신 이주노동자 A씨. 30대 초반인 A씨는 지난 2015년 고용주의 계약에 어긋난 요구로 무리하게 일하다 무릎 관절에 문제가 생겼다. 증상이 심해 입원까지 하게 된 A씨는 이후 강제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사업주는 신고했고 A씨는 그렇게 ‘불법체류자’, 즉 미등록이 됐다.

다른 곳에서 일하게 된 A씨는 이주인권단체의 소개로 한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왜 병원에 진작 가지 않았느냐”며 놀랐다. 무릎 인대가 파열된 건 둘째 치고, 빈혈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 의사는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목숨이 위험했을 것”이라고 했다. 해당 병원은 복지부 ‘의료지원사업’을 시행하는데, A씨는 그런 제도가 있는 줄 몰랐다. 현재 A씨는 사업주 잘못이 밝혀져 미등록에서 벗어났다.

최근 항문 통증이 극심해진 B씨도 얼마 전 동료 A씨 얘기를 듣고 같은 병원을 찾았다. B씨도 한 달에 70만원 주는 사업주로부터 벗어난 뒤 신고로 미등록이 됐다. 새 직장에서 육체노동하다 치질을 얻었고, 병원 가기가 겁나 심해졌다. 고민하다 병원을 찾았지만, 아무 지원도 못 받고 돌아서야 했다. 입원이나 수술을 할 정도로 질환이 심하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결국 그는 보험적용이 안 된 비용을 전액 치르고 진료를 받았다.

각종 의료보장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인 미등록 이주노동자 환자들을 지원하는 ‘의료서비스 지원사업’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지원제도를 알고 이용하기 어려운 것은 물론, 갖추기 어려운 자격 증명을 요구하는 탓이다. 실제 지원을 받는 이들은 극히 일부이다 보니 예산까지 줄고 있다.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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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복지부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대상으로 ‘의료서비스 지원사업’을 시행한다. 의료서비스 지원사업은 미등록 이주노동자나 한국 국적 노숙인 등, 각종 의료보장제도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진료비를 일부 지원하는 제도다. 입원비나 수술비에 대해 90%를, 1회에 최고 500만원까지 지원한다. 이주노동자가 지원을 못 받는 경우 전액을 낼뿐더러 진료비 자체도 2배로 뛴다. 외국인수가가 적용되는 탓이다. 전국 공공병원이나 사업을 신청한 민간병원 총 111곳에서 이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이 지원을 받기까지 과정은 보통 까다롭지 않다. 우선 입원이나 수술 진료를 받지 않는 이들은 지원을 받지 못한다. 국내에 체류한 지 90일이 지나야 하고, 한국에서 다쳤다는 의료 소견을 받아야 한다. 신원을 여권이나 외국인등록증, 여행자증으로 증명해야 한다. 사업장에서 근로하는지 여부도 확인받아야 한다.

가장 큰 난관은 사업주에게 ‘근로확인’을 받아내는 일이다. 대다수 사업주는 ‘불법체류자’ 고용 사실이 정부에 알려질까 두려워 근로 확인증을 발급하지 않는다. 한상훈 화성이주노동자쉼터 활동가는 “설득하면 마지못해 내주는 곳이 10곳 가운데 1~2곳”이라며 “현실적으로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고 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 상당수는 신원을 확인할 여권도 없다. 사업주가 이들이 ‘도망’하지 못하도록 빼앗거나 숨기는 경우가 많다. 정부는 여권 대신 외국인등록증과 여행자증을 제시할 것을 명시하지만, 비자가 없으면 외국인등록증도 가질 수 없다. 여행자증을 발급받으려면 대사관을 찾아야 하는데, 미등록 이주민은 강제송환을 우려해 그러기도 어렵다.

사업을 시행하는 병원이 자의로 문턱을 더 높이기도 한다. 한 병원은 ‘소득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지원을 거부했다. 베트남 국적인 C씨는 임신한 뒤 사업 지정병원을 찾아 전전하다 I병원을 찾았다. 그러나 I병원은 그의 베트남인 남편이 건설현장에서 일을 한다는 이유로 지원하지 않기로 했다. D씨는 결국 친구에게 돈을 빌려 병원비를 전액 지불했다.

복지부는 환자 본인진술서로 근로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고 사업안내에 명시했지만, 상당수 병원이 이근로확인증을 필수로 요구한다. S의료원은 재직 증명서 없이는 지원하지 않는다. 사업장 위치와 번호, 이름 등 정보가 들어있는 명판(도장)을 찍어야만 인정하는 곳도 있다. 어떤 병원은 당초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노동 비자로 입국했어야만 지원하겠다고 한다.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지원을 실시하는 병원을 알아내는 일도 관문이다. 보건복지부는 “현재 사업에 등록된 병원은 인근 주민센터나 시군구청에서 확인해주고 있다”고 밝혔다. 문제는 미등록 이주민이 주민센터나 시군구청을 찾기 두려워한다는 점이다. 김인성 사회복지사는 “안 그래도 강제송환이 될까 조심하는 미등록 이주민이 주민센터를 찾을 일이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지난해 10월14일 오후 서울 파이낸스센터 앞에서 열린 전국이주노동자대회에 이주노동자들이 참가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지난해 10월14일 오후 서울 파이낸스센터 앞에서 열린 전국이주노동자대회에 이주노동자들이 참가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그러다 보니 실제 지원 규모는 턱없이 작다. 정부는 2017년 현재 국내 미등록 이주민 현황을 25만 1041명으로 추산하는데, 같은해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의료지원사업으로 의료지원을 받은 건수는 4944건(1.9%)에 그쳤다.

지원이 필요한 곳에 쓰이지 않아, 안 그래도 부족한 예산이 덩달아 줄었다. 김인성 복지사는 “수요가 늘어야 예산도 느는데, 이 제도를 알고 또 지원받는 이들이 적다보니 예산도 점점 줄어든다”고 했다. 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 5년 간 지원사업 책정 예산은 점점 감소했다. 2014년 33억 2400만원, 2015년 31억 5800만원을 거쳐 2016년 이후 줄곧 30억원에 그친다. 반면 진료 건수는 지속적 증가세다. 이에 따라 미지급액은 2014년 4300만원에서 지난해 16억3900만원으로 불었다.

자격조건이 되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여전히 예산 부족으로 사각지대에 놓인다. 캄보디아 출신 D씨는 올해 임신 9개월차에 지원사업을 하지 않는 근처 병원에 응급 이송됐다. 제왕절개 뒤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혼수상태가 됐고, 지금까지 중환자실에 있다. 이주인권단체가 지원사업을 하는 Y병원을 겨우 찾아 전원을 의뢰했다. Y병원은 경남도청이 지난 16일부터 예산초과분은 병원이 직접 부담해야 한다고 밝혔다며 환자를 받을 수 없다고 밝혀왔다. 지금까지 D씨가 지불해야 한 병원비는 7000까지 불어났다.

복지부 관계자는 미등록 이주노동자 의료지원사업 예산 부족과 관련해 “홍보가 안돼 지속적으로 줄더니 이젠 오히려 부족하다. 이미 줄어든 예산 규모를 늘리긴 어렵더라”며 “이번에도 기획재정부에 더 많은 예산을 책정해 제출했지만 승인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 당사자들이 지원 사실을 알기 어렵다는 지적엔 “이주인권단체 홍보를 통해 현재는 많이 알려졌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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