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동안 에너지드링크 8캔’

하루 담배 3갑, 커피 3잔. 에너지드링크 4캔. 드라마 색보정(DI·Digital Intermediate) 기사 A씨가 편집기사를 그만둘 때 먹었던 각성제 양이다. 지상파 드라마를 맡고 3일 밤을 꼬박 새 몽롱한 기운에 취했던 A씨는 에너지드링크 8캔이 책상에 놓인 것을 봤다. 사람 할 일이 아니라며 업계를 떴고 몇 년 후 DI로 돌아온 그는 좌절했다. 그는 최근 4일 넘게 또 밤샜다. DI가 속한 ‘드라마 후반작업’은 전쟁터 중의 전쟁터였다.

DI는 ‘촬영-편집-CG(컴퓨터그래픽)-DI’로 이어지는 순서 중 마지막이다. CG와 DI를 후반작업이라 한다. 전쟁터란 말은 그만큼 극도의 긴장상태에 놓인단 뜻이다. 가장 큰 이유가 ‘부족한 시간’이다. 방송사가 1~2주일 전 편집본을 넘겨주면 서로 작업이 편하지만 보통 3~4일 전에 넘기며 1~2일 전 주는 경우도 잦다. 방송사는 시간을 제대로 주지 않으면서 결과물은 보챈다. A씨는 최근 드라마 방영 15분 전 10여컷이 더 있었다며 ‘당장 해내라’ 지시한 후 ‘일 못한다’며 질책한 한 지상파 내부 조연출을 봤다.

▲DI 작업자 A씨 책상 위 커피, 에너지드링크 등 각성음료가 놓여 있다.
▲DI 작업자 A씨 책상 위 커피, 에너지드링크 등 각성음료가 놓여 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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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방송사고가 난 SBS 수목드라마 ‘빅이슈’는 업계에서도 화제였다. CG업계는 “분명히 대형사고 터진다”며 주시했다. 웬만한 영화 한 편 CG 분량이 들어간 빅이슈 1부 CG 작업은 방영 10일 전쯤 시작됐다. 보통 1~3개월 작업하는 CG 분량을 10일 내 끝낸 셈이다. CG팀, DI팀 모두 일주일 가량 밤샘 작업했고 1·2부 각각 당일 밤 10시 직전 완성됐다.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빅이슈 6부 방송사고는 예정된 사고였다. 6부 CG컷은 방송 당일 새벽 3시부터 올라왔고 처리해야 할 컷은 500여개로 알려졌다, CG팀이 하루 내 처리하기 거의 불가능했다. 데이터매니저, 편집팀, CG팀, DI팀 등 모든 팀이 종일 정신없이 작업했다. 방영 2시간 전, 모두가 작업 중인 영상이 완성 파일로 잘못 출력된 걸 파악했지만 제대로 조율하는 책임자도 없었다.

정도 차이만 있을 뿐 대부분 드라마 후반작업이 이와 같다. CG업계 관계자 B씨는 5년 전 한 SBS 드라마 CG 작업 땐 방송 1분 앞둔 밤 9시59분에 납품한 적이 있다. B씨는 “거의 매회 방영일 새벽에 편집권을 받아 작업했다”고 말했다. 다른 드라마에선 방송사가 방영 2시간 전 20컷을 던져 준 적도 있는데, 방영 직전 광고를 보면서 방송사 CG 감독과 스피커폰으로 통화하며 작업했다.

▲3월21일 SBS 수목드라마 '빅이슈' 방송사고 화면 갈무리.
▲3월21일 SBS 수목드라마 '빅이슈' 방송사고 화면 갈무리.

현장 감독이 “쟤 걷어내”, 하대받는 CG팀

CG는 크게 2D 작업과 3D 작업으로 나뉜다. 3D는 영상에 삽입될 3차원 디지털 시각물을 만들고 2D는 이런 시각물을 영상에 합성하거나 간판·상호명 등을 삭제하고 배경 실사를 그려 넣는 일 등으로 이뤄진다. 2017년 12월 tvN 드라마 ‘화유기’ 방송사고는 배우들 몸에 달린 와이어를 삭제하지 못한 2D 쪽 사고다.

삭제 작업만 한 컷당 평균 30분은 걸린다. 비유하면 ‘영상 포토샵’으로 영상 프레임마다 삭제 부분을 찾아 지우는 식이다. 몇 백 프레임에 달하는 난이도 높은 컷 경우 시간은 더 걸리고 숙련도에 따라 작업시간은 천차만별이다.

업무가 한 번에 몰리는 드라마 작업 땐 하루에 20~30컷을 받기도 한다. 5년차 CG작업자 C씨는 “우리 때문에 드라마 방영 못 할까봐 밥도 못 먹고 새벽 2~3시까지 정신없이 달리는데 새벽에도 자리를 뜨지 못하는 이유는 잦은 수정 요청 때문”이라 말했다. “퇴근을 해도 수정요청이 들어오면 어차피 바로 출근해야 하므로 일단 대기한 후 회사 근처에서 2~3시간 자고 출근”한다. 2박 3일 집에 가지 못 하는 경우는 한 달에 한 번 이상씩 있다.

작업의 질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 C씨는 “양이 어마어마하니 퀄리티 최대한 적게 해서 빨리 한 바퀴 돌리는 게 급선무”라 했다. 그러나 방송사·제작사 질책은 자주 되돌아온다. CG 작업자들이 가슴앓이하는 부분이다. B씨는 “평가는 당연히 이뤄져야 하지만 외국 업체는 아티스트 1인당 한 달 할 수 있는 컷을 3~4컷으로 본다. 한국은 하루 1컷으로 보는데 열 배 차이”라 말했다.

소외감도 자주 느낀다. B씨는 “CG·DI 작업은 필수업무인데도 현장에서 존중받는 경우는 거의 본 적 없다”고 말했다. 단적으로 촬영 현장에 ‘CG 수퍼바이저’가 나와있는지도 모르는 스태프들이 많다. B씨는 “CG 수퍼바이저가 CG팀 업무 효율성을 위해 촬영 방식, 구도 등을 제안하면 ‘당신이 뭘 아느냐’는 소리를 듣는다”고 말했다. 최근 한 수퍼바이저는 한 감독에게 “쟤 걷어내”라는 모욕적인 말도 들었다.

DI 작업자 A씨도 “제작진이 후반작업 편의를 신경쓰지 않는 게 업무강도에 영향을 준다”고 했다. “어차피 촉박하게 편집권을 넘길 거면 조금 더 신경쓰거나 욕심을 버려서 간단한 CG 작업은 줄여줄 수 있는데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A씨는 “휴대전화나 카페 상호명을 최대한 덜 찍는 촬영이 그리 어렵냐”며 “‘이렇게 작업하는 게 저에게 편하다’고 내부 조연출에게 아무리 말해도 ‘시키는 대로 하세요’라는 말을 듣는다”고 말했다.

A씨는 업무가 몰릴 때 지금도 에너지드링크를 사 마신다. 그래도 쏟아지는 잠을 피할 수 없어 아예 의자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일한다.

CG작업자 B·C씨는 “후반작업자는 편집권을 주면 지정된 작업만 한다. 결정권이 없다”며 “사고 위험을 유발하는 진짜 책임자는 누구인가?”라 물었다. B씨는 “드라마 촬영 시스템, 더 나아가 산업구조가 변하지 않는다면 사고는 되풀이 될 것”이라며 “후반작업을 평가절하하는 방송계 시선도 나아져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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