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와 ‘위안부’ 사안이 계속 문제입니다. 전문성이 없으니 원칙 없이 정부 발표만 듣고 씁니다. 이런 깊고 정치적인 이슈야말로 전문성 갖춘 취재와 보도가 필요합니다.”

1991년 8월 고 김학순 일본군 ‘위안부’ 증언자 기사를 처음 보도한 우에무라 다카시 전 아사히신문 기자의 공개강연이 18일 저녁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열렸다. 그는 이날 ‘위안부’ 증언 첫 보도에 이르기까지, 또 보도 뒤 일본 언론을 비롯한 우익 공격에 맞서 걸어온 길을 소개했다. 이날 강연은 자유언론실천재단과 새언론포럼 주최로 열렸다.

우에무라 전 기자(61)는 28년 전 아사히신문 오사카 사회부에서 고 김학순 할머니의 일본군 ‘위안부’ 증언을 처음 보도했다. 사흘 뒤 서울에서 김학순 할머니의 기자회견이 열렸고, 한국 언론의 대대적 보도가 시작됐다. 이후 그는 일본 우익의 표적이 됐고, 지금까지 법정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우에무라 전 기자는 현재 서울 가톨릭대학교 명예교수이고 일본의 대표 진보잡지 ‘주간금요일(슈칸긴요비)’ 발행인이다.

▲우에무라 다카시 전 아사히신문 기자(61)가 지난 18일 저녁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공개 강연하고 있다. 우에무라 기자는 1991년 8월11일 아사히신문 오사카 사회부에서 김학순 일본군 ‘위안부’ 증언자 기사를 처음으로 보도했다. 사흘 뒤 서울에서 김학순 할머니의 기자회견이 열렸고, 한국 언론의 대대적 보도가 이어졌다. 사진=김예리 기자
▲우에무라 다카시 전 아사히신문 기자(61)가 지난 18일 저녁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공개 강연하고 있다. 우에무라 기자는 1991년 8월11일 아사히신문 오사카 사회부에서 김학순 일본군 ‘위안부’ 증언자 기사를 처음으로 보도했다. 사흘 뒤 서울에서 김학순 할머니의 기자회견이 열렸고, 한국 언론의 대대적 보도가 이어졌다. 사진=김예리 기자

그는 어느날 갑자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취재한 건 아니라고 했다. 학생 때부터 한국의 정치와 재일 한국인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1981년 대학생이던 우에무라 기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형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시점, ‘김대중씨는 무죄다’란 글을 아사히신문에 기고했다. 김대중 석방 요구 시위에도 참가했다.

한국과 인연은 아사히신문에서도 이어졌다. 우에무라 기자는 1987년 한국 유학한 뒤 중동특파원을 거쳐 서울 특파원을 했다. 1997년엔 1면에 실릴 김대중 대통령 당선 소식을 쓰며 눈물을 흘렸다. 오사카 사회부에선 재일 한국인을 주제로 ‘이웃사람’이란 지면 연재를 기획했다. “오사카엔 재일 한국일이 많습니다. 함께 살며 세금도 내는데 투표권이 없고, 출입 차별을 당했습니다. 한국인이란 이유로 아파트 입주도 거부당했습니다. 이들을 존중하고 교류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일본 신문으론 처음으로 한글제목을 달았습니다.”

1990년은 한일 간 갈등이 깊어진 시기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는 군 아닌 민간이 벌였다’고 주장해서다. 우에무라 기자는 “그해 여름 나도 일본군 ‘위안부’ 증언자를 취재하러 한국에 왔지만 찾지 못하고 돌아섰다”고 했다. 1년 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증언자를 조사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윤정옥 당시 정대협 대표가 “현재 조사 중이고, 본인과 만날 순 없지만 증언한 녹음테이프가 있다”고 알려왔다. 서울로 간 그는 ‘정대협이 여자 정신대 피해 증언자를 조사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썼다. 고 김학순 할머니 증언 사실을 보도한 첫 기사다.

우에무라 전 기자는 “피해 할머니가 이렇게 고생한 사실을 말하고, 여자 정신대의 이름으로 끌려갔다고 썼다. 1보 정도로, 지금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당시 취재할 때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만나면 모두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할머니들이 말할 수 없었던 걸 이해한다”며 “피해 41년 만에 용기있게 조사에 나선 것이 대단했다”고 했다. 이후 중동특파원이 되면서 장기 심층 취재에 나서지는 못했지만, ‘위안부’ 사안 공부를 계속하며 보도도 냈다.

▲1991년 8월11일자 아사히신문에 실린 우에무라 다카시 당시 기자의 기사 갈무리
▲1991년 8월11일자 아사히신문에 실린 우에무라 다카시 당시 기자의 기사 갈무리

일본 우익의 ‘우에무라 때리기’는 그가 아사히신문을 나온 뒤 본격 시작됐다. 2014년 1월 말, 일본에서 가장 많이 나가는 보수 잡지 ‘주간문춘’에서 ‘위안부 날조 아사히신문 기자가 여대 교수 된다’고 보도했다. 우에무라 기자가 기사에 ‘위안부’를 ‘정신대’라고 표현했다는 것이다. 당시 모든 언론이 표현을 섞어 썼는데, 그에게만 공격이 집중됐다. 결국 그는 교수직 임용이 취소됐다.

우에무라 기자가 기사에 ‘강제연행이 있었다’고 지어냈다는 주장도 나왔다. 실제 우에무라는 ‘속아서 따라나섰다’고 보도했다. 니시오카 도교기독대 교수와 우익 저널리스트 사쿠라이 요시코가 우에무라 때리기를 주도했다. 우익의 공격은 테러 수준이 됐다. 2015년 2월엔 딸을 죽이겠다는 협박장이 왔다. 댓글 테러도 심각했다. 결국 트위터로 우에무라 기자 딸을 모욕하는 글을 쓴 네티즌 가운데 1명의 신원을 확인해 재판을 진행했고, 승소했다.

우에무라 기자도 직접 조사에 나서 ‘날조 주장’의 모순점을 지적하고 고발했다. 현재 그가 발행하는 일본의 대표 진보잡지 ‘주간금요일(슈칸긴요비)’도 당시 우익 세력의 주장을 파헤쳤다. 사쿠라이의 기사, 산케이신문 칼럼 등 ‘우에무라’ 공격 보도가 줄줄이 정정됐다. 니시오카 교수, 사쿠라이 요시코와 명예훼손 소송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우에무라 기자는 “이 싸움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거대한 적과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행위 자체에 대한 공격”이라고 했다.

▲1991년 8월 고 김학순 일본군 ‘위안부’ 증언자 기사를 처음으로 보도한 우에무라 다카시 전 아사히신문 기자의 공개강연이 18일 저녁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자유언론실천재단과 새언론포럼 주최로 열렸다. 사진=김예리 기자
▲1991년 8월 고 김학순 일본군 ‘위안부’ 증언자 기사를 처음으로 보도한 우에무라 다카시 전 아사히신문 기자의 공개강연이 18일 저녁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자유언론실천재단과 새언론포럼 주최로 열렸다. 사진=김예리 기자

우에무라 전 기자는 이날 후배 기자들에게 하고픈 말을 청하자 ‘‘‘위안부’ 전문 기자가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깜짝 놀란 일이 있습니다. 한국에 ‘‘위안부’ 전문 기자가 있겠죠’ 하고 물으니 사쓰마와리(출입처 돌기) 기자가 정대협을 담당한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담당이 끝나면 떠나고, 다른 이가 오는 일이 반복된다는 거죠. 다른 매체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일본도 ‘위안부’ 보도가 줄었는데, 한국에선 한국인이 피해자인 사안인데도 전문 기자가 없습니다. 이렇게 깊고 정치적인 이슈에 전문성을 갖추지 못한 보도가 나오는 점이 아쉽습니다. ‘위안부 전문 기자’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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