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가 기사의 절반에 가까운 분량을 SBS 보도에서 표절한 후 항의받고 기사를 삭제했다. 

세계일보 측은 해당 기사가 표절임을 인정하고 삭제 후 원 기사를 쓴 SBS 기자에게 개인적으로 사과했다고 해명했지만, SBS 측은 이런 표절 행위 자체가 실정법 위반이자 언론계의 그릇된 관행으로 보고 공식 사과문을 게재해 줄 것을 세계일보에 요청했다.

세계일보는 지난해 11월5일 오후 8시21분 “‘라돈 생리대’ ‘라돈 온수매트’…라돈 얼마나 위험하길래? [이슈탐색]” 기사를 인터넷판 기사로 내보냈다. 당시 생리대에 이어 온수매트에서도 ‘라돈(Rn)’ 검출 의혹이 불거졌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생리대의 경우 호흡기와 거리가 있어 폐암이나 여성질환 등을 유발할 가능성이 적다는 내용이었다.

세계일보 기사에서 라돈과 폐암 발생률 등과 관련한 내용이 이날 오전 10시16분 보도된 SBS “[취재파일] ‘라돈 생리대’는 위험할까?” 기사에 나온 사례와 표현, 내용 전개 순서까지도 거의 일치했다.

▲ 지난해 11월5일 SBS가 보도한 “[취재파일] ‘라돈 생리대'는 위험할까?” 기사 중 일부.
▲ 지난해 11월5일 SBS가 보도한 “[취재파일] ‘라돈 생리대'는 위험할까?” 기사 중 일부.

“최근 라돈 이슈가 불거지면서 마치 닿거나 마시기만 해도 큰일 나는 독극물처럼 알려진 측면이 있지만, 사실 라돈 자체는 암석이나 토양에서 발생하는 자연 상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물질이다.”(SBS)

“최근 라돈과 관련한 다양한 이슈가 불거지면서 마치 닿거나 마시기만 해도 큰 해(害)를 입는 독극물인 것처럼 알려졌지만, 라돈 자체는 암석이나 토양에서 발생하는 자연 상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물질이다.”(세계일보)

“물론 라돈 자체가 아닌, 모나자이트와 같은 방사능 원인물질에 의한 피폭 영향도 고려할 필요는 있다. 기준치를 넘든 넘지 않든, 불필요한 피폭은 가능한 한 피하는 게 좋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확인된 해당 생리대의 방사선 방출량과 사용시간을 고려하면 부인과 질환은 물론 피부암 등과 연결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게 여러 환경의학 전문의들의 의견이다.”(SBS)

“물론 라돈 자체가 아닌 모나자이트와 같은 방사능 원인물질에 의한 피폭 영향도 고려할 필요는 있다. 기준치를 넘든 넘지 않든, 불필요한 피폭은 가능한 한 피하는 게 좋기 때문이다. 이번에 확인된 해당 생리대의 방사선 방출량과 사용시간을 고려하면, 여성질환은 물론 피부암 등과 연결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세계일보)

이밖에도 세계일보 기사의 상당 부분이 SBS ‘취재파일’을 그대로 베껴 썼다고 볼만한 내용이었다. 기사를 쓴 세계일보 기자는 지난달 17일 SBS 기자로부터 항의 받은 뒤 기사 표절에 사과하고 바로 기사를 삭제했다. 

다만 SBS 기자는 ‘취재파일’ 역시 SBS의 공식 기사로서 저작물에 대한 권한이 회사에 있는 만큼 회사 방침상 세계일보가 공식 사과문을 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세계일보 측은 SBS 측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사를 쓴 김아무개 세계일보 기자는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라돈 기사는 사례를 들다 보니 인용표기를 안 한 건 내 잘못이다. 거기에 대해선 SBS 기자에게도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여러 번 문자와 전화로 사과했다”며 “회사에 보고 후 내부적으로 경고를 받았다”고 말했다. 

김 기자는 SBS의 공식적인 사과문 요청과 관련해선 “내부적으로 논의한 결과 기사 경중을 따졌을 때 사과문을 낼 정도는 아니라는 게 회사의 판단”이라며 “명예훼손 등 심각한 상황이면 당연히 정정보도 등을 하기도 하지만 라돈 기사는 그런 의도는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이에 SBS 측은 “사전에 아무런 고지 없이 기사를 표절한 것에 대해 유감스럽다”며 “이런 표절 행위는 SBS및 SBS 기자 뿐 아니라 세계일보 구독자와 시청자까지 기만하는 행위인 만큼 책임 있는 사과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신문윤리실천요강 갈무리.
▲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신문윤리실천요강 갈무리.

기사 표절은 한국신문윤리위원회의 심의·제재 사항이긴 하지만 사실상 자율규제 성격이어서 언론사 자체적으로 심각성을 인지해 징계하지 않으면 기자들도 크게 문제 삼지 않는 경향이 있다. 

신문윤리위 신문윤리실천요강에는 ‘출판물의 전재와 인용’과 관련해 “언론사와 언론인은 신문, 통신, 잡지 등 기타 정기간행물, 저작권 있는 출판물, 사진, 그림, 음악, 기타 시청각물의 내용을 표절해서는 안 되며 내용을 전재 또는 인용할 때에는 그 출처를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실천요강은 가장 많은 기사 표절이 이뤄지는 통신사 기사의 출처 명시에 “언론사와 언론인은 통신 기사를 자사 기사와 구별해 출처를 밝혀 사용해야 하며, 사소한 내용을 변경해 자사 기사로 바꿔서는 안 된다”고 명시했다.

언론사 자체로 표절을 금지하는 윤리강령이나 취재·보도준칙을 만든 곳도 있다. 한겨레는 취재보도준칙에서 “기사는 물론 취재와 관련된 기록·보고 등에 거짓 인용, 날조, 표절한 내용을 절대 쓰지 않는다”고 못박고 있다. 조선일보도 윤리규범 가이드라인으로 “다른 매체에 보도된 내용을 표절하지 않고, 다른 매체의 보도 아이디어를 도용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중앙일보 기자윤리강령도 “다른 신문이나 매체·자료를 인용할 때는 출처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돼 있다. 앞서 중앙일보는 지난 4월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 사설을 상당 부분 인용하고도 출처를 밝히지 않아 표절 논란을 빚은 중앙일보 뉴욕 특파원을 직무정지 처분하고 소환을 명령했다. 

중앙일보는 4월12일 표절 사실을 인정해 디지털에서 칼럼을 삭제한 후 올린 사과문에서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외신 상당 부분을 인용한 사실이 확인돼 해당 기사를 삭제했다. 독자 여러분께 깊이 사과드린다.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내부 검증을 더욱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국민일보도 지난달 자사 기자의 칼럼이 전문가 글을 무단 도용해 논란이 일자 온라인 기사를 삭제하고 16일자 지면에 “칼럼 주요 내용은 기자 질의 답변서와 제공 자료에서 인용했음에도 출처가 누락됐다”며 원저작자와 독자들에게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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