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구 현대차 회장 패밀리’라는 말을 믿었다. 그 ‘패밀리’가 자기 재력으로 과시한 시가 100억원 상당의 주식 증여 증서가 진짜인 줄 알았다. 20년간 현대차그룹에 다수 업체를 협력업체로 등록해주고 대가로 받은 차량만 100여대라는 말. 그것도 바보 같이 믿었다. 지난달 31일 울산에서 만난 자동차 관련업체 대표 3명의 사연이다. 

이들은 현대차 1차 협력업체 또는 현대차 지정 차량 정비서비스 센터(블루핸즈)로 등록해주겠다는 자·타칭 ‘브로커’ K씨의 호언장담에 사기를 당했다고 주장한다. 이로 인해 각종 접대비를 지불하거나 무리하게 법인을 인수하며 사업체를 늘리는 등 총 8억여원의 피해를 봤다고 했다. K씨와 그의 지인들 무상 차량수리비 등 일부 편의 제공까지 포함한 금액이다. 

반면 K씨는 업체 대표 3명이 도리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 5일 K씨는 기자와 만나 “업체 대표들에게 협력업체 등록을 약속한 적 없다. 피해액이라고 주장하는 금액 가운데 실제 내가 가져가거나 이득을 본 게 얼마인가. 난 그들에게 받은 것이 없다”고 해명했다. 

허망한 공수표에 업체 대표들은 K씨를 지난 5월 사기혐의로 울산지검에 고소했다. 이보다 앞서 현대차그룹 감사실에도 자신들 피해를 호소하는 진정서를 접수했다. 현대차 감사실 회신은 아직 없다. 다만 현대차 내부는 이 사안을 둘러싼 개인 간 고소·고발이 진행 중이고 현대차가 직접 당사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명쾌한 답변을 전달하기 어려운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먼저 현대차그룹 인맥이었다. 현대건설 부사장 출신 인사, 정몽구 회장 최측근이었던 인사, 전직 현대글로비스 임원 등 유력인사들이 현대차 협력업체 등록에 도움을 주고 매출 물량을 확보해주겠다고 약속했다는 말도 K씨가 전했다고 한다. 이에 반해 K씨는 “업체 대표들이 먼저 도움을 요청했다”고 맞서고 있다.

K씨는 전·현직 현대차그룹 고위 임원들 연락처를 꿰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찍은 사진도 K씨 말이 ‘허언’이 아님을 뒷받침했다. K씨는 업체 대표들에게 전·현직 현대차그룹 유력 인사들을 소개시켰다. K씨가 업체 대표들에게 소개한 전직 현대글로비스 임원은 기자와 통화에서 “도와달라고 해서 (한 피해 업체에) 임원등록은 해줬다. 그러나 내가 거기서 취한 금전 이득은 없다”며 “나는 이미 (은퇴해서) 시골에 내려와 있다. 현대차 협력업체 등록을 해줄 수 있는 여건이나 능력, 힘이 안 된다”고 말했다.  

현 시가 100억원 상당의 주식 증여 증서(150만주)도 그럴 듯했다. 한 부품가공 회사가 2012년 초 K씨에게 증여했다는 증서는 업체 대표들에게 ‘패밀리의 재력’으로 받아들여졌다. K씨가 약속한 협력업체 등록이 불발돼도 피해를 보전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는 것. 

주식 증여 증서는 진짜일까. 이 부품가공 회사 임원은 지난 11일 미디어오늘에 “회사 주식 파트는 내가 담당한다. 우리는 주식 증여 증서를 준 사실이 없다. 그건 가짜다. 대표이사에게도 물었지만 증서를 써준 사실이 없다고 했다”고 전했다. 

▲ 자료 사진. 사진=gettyimagesbank
▲ 자료 사진. 사진=gettyimagesbank

 

증서가 여전히 ‘진짜’라는 K씨는 기자에게 이 부품가공 회사 부사장도 지냈고 자신이 회사의 어려움을 해결해줘 그 대가로 주식 증여 증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임원은 “2012년 비상근 감사로 K씨를 등기에 올린 적 있다. 본인이 현대가 친척이라고 이야기하더라. 우리 사업 일부 영업을 도와준 적은 있다. 내부 직원으로 근무한 건 아니었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K씨는 “주식을 증여하기로 해놓고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며 이 회사를 상대로 법적 대응을 시사했다. 

K씨 인맥 바탕에 ‘패밀리’의 흔적이 있다. ‘패밀리’는 업체 대표뿐 아니라 취재 과정에서 접촉해본 인사들의 공통 증언이다. K씨도 기자에게 자신이 ‘고 정주영 명예회장 아내의 친언니의 손녀딸’과 이혼했다고 말했다. 그와 현대가 관계는 명쾌하게 확인되지 않지만 K씨가 주변에 ‘현대아산 재단 손녀 사위’, ‘정몽구 회장의 전 사위’ 등으로 자신을 소개했다는 증언만은 공통적이었다. 하지만 현대차 관계자는 “현대차 패밀리를 사칭하는 K씨는 현대차와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K씨는 어떤 일을 하는 인물일까. K씨는 자기 직업을 “나는 남의 업체를 도와주고 보수를 받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현대차그룹과 관련해 여러 지인이 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도와달라고 나를 찾는다. 편한 이들에게는 ‘브로커’라고도 소개한다”고 밝혔다. “지금도 몇 만 명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할 것”이라고 농을 던지기도 했다.  

K씨 변호사는 다음과 같이 업체 대표들 주장을 반박했다. “사람들이 지인에게 자기 과거사를 이야기할 때가 있지 않나? 업체 대표들에게 개인 과거사를 이야기했던 것에 불과하다. K씨의 재력, 인맥과 업체 대표들의 투자 상관성을 찾을 수 없다. 본인들이 스스로 설립한 회사의 운영비가 어떻게 피해액이 될 수 있나. K씨가 상대를 기망했다면 얻게 된 이익은 무엇인가? 상대를 속이고자 했다면 금전 이득을 취했을 텐데 K씨는 그들로부터 얻은 게 없지 않느냐.”

업체 대표들은 여전히 “기가 차고 말문이 막힌다. 협력업체로 등록해줄 테니 법인 조건을 맞추라고 해서 그가 지정한 지역에 사무실도 얻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뒤통수를 칠 수 있느냐”, “협력업체 등록이 되면 지분 일부를 달라는 조건은 무엇이었나. 등록이 되면 운 좋게 돈 버는 거고 안 되면 배 째라는 건가”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K씨는 “협력업체 등록을 약속한 적 없다”고 업체 대표들의 ‘순수성’을 의심했다. 

또 다른 피해를 호소하는 이도 있다. ㄱ씨 이야기다. 그는 현대차 용역을 받게 해주겠다는 K씨 약속을 믿고 ‘정몽구 회장 최측근 인사의 동생’이 입원한 울산 소재 병원을 오갔다. 회장 최측근 인사의 동생 병 수발을 들었다는 것이다. 

ㄱ씨는 스스로를 ‘K씨의 머슴’이라고 말했다. 농사일 같은 잡다한 일까지 맡으며 K씨의 머슴 노릇까지 했다는 말이다. 이를 테면 K씨 요구에 따라 지난해 여름까지 해마다 청도 복숭아를 ‘현대차그룹 어르신’들에게 갖다 바치는 등 K씨의 용역 수주 약속을 곧이곧대로 신뢰했다.

ㄱ씨는 “딸이 2014년 1월 초 급성림프성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현대차에서 용역이 나올 것’이라는 K씨 말을 믿었다”며 “그러나 약속한 용역 일은 시간이 지나면서 흐지부지됐다”고 말했다. 

K씨는 이 역시 부인한다. K씨는 “현대차 용역은 내가 받아 (ㄱ씨를) 도와주려 했다”이라며 “ㄱ씨 인척을 대표로 세워 용역을 받으려 했다. 이를 위해 과거 현대차그룹 관련 최고위 인사들을 만났던 것뿐이다. 이게 어떻게 사기가 될 수 있느냐”고 말했다. 이어 “내가 서울에 있고 바쁘다보니 (ㄱ씨에게) ‘네가 (병원 관련) 서류를 갖다줄래’라고 했을 뿐”이라며 “자기가 알아서 자발적으로 (병 수발을) 하는 건데 내가 지시하거나 할 게 있느냐”고도 말했다. 결국 ㄱ씨가 용역 욕심에 자발적으로 한 일이라는 취지다. 

이에 ㄱ씨는 “내가 간병을 자발적으로 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K씨가 병 수발하면 나중에 정몽구 회장 최측근 인사가 용역할 수 있게 도와준다고 했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ㄱ씨도 K씨를 사기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현대차에서 과장으로 근무하다 K씨와 연루된 후 회사를 떠난 ㄴ씨. 그는 현대차 협력업체 등록을 내부에서 도와주면 업체 수익을 분배·보장해주겠다는 K씨 제안을 믿었다고 주장했다. ‘현대가 패밀리’, ‘주식 증여 증서’도 그에게 믿음을 제공했다. 그러나 2013년경 수천만원의 로비 자금을 마련해 제공했으나 협력업체 등록 약속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 

이후 ㄴ씨가 비위 등으로 사내 감사를 받으며 해고 위기에 몰리자 K씨는 ‘감사 무마 로비용’으로 5000만원을 요구했고 ㄴ씨는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이 자금을 K씨에게 건넸다는 게 ㄴ씨 주장이다. ㄴ씨는 또 K씨가 주도해 자신에 대한 진정을 현대차 감사실에 넣었다고 주장했다. 자신에 대한 감사와 이어진 퇴사는 결국 K씨의 ‘플랜’이었다는 취지다.

ㄴ씨는 17일 오전 통화에서 “퇴직하기 전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에게 내가 겪은 일과 브로커들의 사기 행각을 담은 장문의 이메일 편지를 썼다”며 “울산 현대차 공장 인사 책임자에게도 또 다른 직원이나 업체들이 브로커로부터 피해를 입어선 안 된다고 당부했다. 이후 브로커들이 공장 출입 금지를 당했다고 들었다”고 했다. 

K씨는 “사실과 다르다”며 ㄴ씨 주장을 전면 반박했다. K씨는 통화에서 “ㄴ씨가 반대로 이야기하고 있다. 현직에 있으면서 용역을 받게 해달라고 부탁했다”며 ㄴ씨가 협력업체 등록을 먼저 요청했다고 말했다. 

다만 로비 자금은 부인하지 않았다. K씨는 ㄴ씨가 감사 무마용으로 제공했다는 5000만원에 대해선 “(돈을) 받아서 (ㄴ씨의 파면을 막아주는 등)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에게 전달했다”고 했다. 로비를 통해 ㄴ씨의 파면만은 막았다는 취지의 해명이었다.   

ㄴ씨는 “K씨 요구에 따라 (현대차 협력업체 등록을 바라는) 몇 개 업체를 그에게 소개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K씨는 부사장 명함 등으로 월급과 차, 법인카드, 로비 자금 등을 제공받으며 업체들에 피해를 주고 있었다”며 “보통 사람들은 고위층 명함이나 연락처를 알 수가 없다. 또 현대가 인맥을 꿰고 있으니 나는 그를 신뢰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ㄴ씨는 “다시는 이런 브로커들이 현대차에 발을 못 붙이게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1억여원의 피해를 봤다고 주장하는 ㄴ씨는 2016년 K씨 등을 사기 혐의로 고소했다. 지난 14일 서울남부지법에서 열린 공판기일에는 K씨가 변호사와 함께 출석했다. K씨는 17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ㄴ씨 도덕성을 문제 삼으며 “현대차에는 (ㄴ씨 같은) 직원들이 많다. 임원들이 돈 받은 건도 많다. 더 큰 기사를 쓰려면 나와 거래하는 게 나을 것”이라고 당부했다.

[기사 수정 : 18일 오전 11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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