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남성 안무가의 성추행 사건이 알려지면서 무용인들이 무용계 위계 문화를 반성하고 피해자를 지지하는 공개 선언에 나서고 있다. 

무용계 내 개혁을 바라는 모임 '무용인희망연대 오롯'은 지난 14일 페이스북 페이지에 "침묵하지 않고 후배들에게 말을 걸 곳과 사람이 있다는 희망을 주겠다"며 무용인 12명의 실명 서명이 첨부된 성명을 냈다. 지난 달 ㄷ무용단의 안무가 류아무개(49) 대표가 위력에 의한 추행 혐의로 기소된 건을 두고 침묵하지 않겠단 집단적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류 대표는 2015년 4~5월께 자신의 지도학생 A씨(23)를 네 차례 성추행한 혐의로 지난 5월14일 재판에 넘겨졌다. 강제로 A씨 옷을 벗기거나 성관계를 시도한 혐의도 있다. 류 대표는 다수 대학 무용과에 출강하고 국내 굵직한 무용상도 해마다 받았던 국내 대표 중견 현대무용가다. 

지금까지 무용인 80여명, 연극인 등 문화에술인 50여명, 10여개 예술단체가 연대서명으로 선언에 참여했다. 성명서는 무용인들을 중심으로 현재 95회 가량 공유됐다. 

▲자료사진 ⓒpixabay.
▲자료사진 ⓒpixabay.
▲6월14일 '무용인희망연대 오롯'이 올린 성명서 중 일부
▲6월14일 '무용인희망연대 오롯'이 올린 성명서 중 일부

 

연대서명 참여는 그동안 침묵을 지킨 무용계에서 이례적이란 평이 나온다. 지난해 1월 서지현 검사가 성추행 피해 사실을 고발하며 미투운동이 사회 각계로 확산됐지만 무용계 반응은 소극적이었다. 미디어오늘과 만난 한 무용수는 "대학에 진학하고 교수에 잘 보여야 꿈과 밥벌이를 보장받을 수 있어 스승에 절대 복종하는 문화가 뿌리깊다"며 "무용인들은 페이스북에 무용계 비판 기사가 올라와도 '좋아요' 버튼 하나 쉽게 누를 수 없다"고 말했다.

오롯은 "피해자, 가해자 모두 우리 동료였다는 사실 때문에 충격을 받아 혼란스럽고 참담한 심정이었지만 우리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고 중지를 모았다"며 "미투 이후 언론에 보도된 무용계 성폭력에는 인간문화재, 대학 무용학과 지도자 등 명망 있는 인사들의 위계에 의한 그루밍 사건 뿐 아니라 동료 간에 발생한 사건도 포함돼 있다"고 밝혔다. 

오롯은 또 "본 사건의 진위가 제대로 밝혀지길 바랄 뿐 아니라, 진위를 밝히는 과정 속에서 반복돼 온 성폭력에 대한 미성숙하고 무책임한 문화에 저항하고자 한다"며 "본 사건 피해 호소자를 비롯해 자신을 도와 줄 사람이 없다고 느끼는 알려지지 않은 피해자에게 우리는 말한다. '여기, 당신을 지지하는 사람이 있다'"고 적었다. 

이들은 A씨가 다녔던 ㄱ대학에도 철저한 진상 조사와 엄중 처벌을 요구했다. 이들은 "피해 호소자를 고립시키기 위해 피해 호소자와 그를 도우려는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하거나, 증언자가 돼 줄 수 있는 소속 구성원의 입단속을 하는 등 진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하려는 행위를 통한 2차 가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엄격한 대처를 해야 할 것"이고 "장기적으로 성폭력 사건의 범죄성을 인지하고 향후 재발방지가 가능한 현실적 대책을 세우기를 촉구한다"고 주장했다. 

무용인들에겐 2차 가해 자제를 당부했다. 오롯은 "사건을 지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메시지가 아닌 메신저를 공격하기 마련"이라며 "철저한 진상 규명을 위해서라도 피해 호소자 신원은 보호돼야 한다"고 밝혔다. 

오롯은 이어 "피해 호소자에 대한 소문을 만들어 내거나, 출처와 진위가 불분명한 소문을 함부로 유포하지 마시라"며 "가능하면 피해 호소자에 대한 혐오 발언에 적극 대처해 달라"고도 요구했다. 
 
오롯은 류 대표 사건 재판 집단 방청 및 과거 무용계 성폭력 사건 사후 경과 조사 등을 계획 중이다. 향후 실천을 약속한 오롯은 "사건 당사자와 그들 주변에서 성폭력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돼 트라우마를 안게 된 사람들에 대해서도 고민하겠다"며 "성폭력 관련 교육과 매뉴얼 마련에 대한 관심을 갖고 지속적으로 발언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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