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드라마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NHK의 아침 드라마 ‘연속TV소설’(連続テレビ小説) 시리즈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폐지된 KBS의 아침 드라마 ‘TV소설’ 시리즈에도 영향을 준 NHK의 연속TV소설은 1961년부터 방송을 시작해 2019년까지 약 60년간, 총 100편의 드라마를 방송하며 일본 가정의 아침을 매년마다 장식했다. 특히 NHK의 연속TV소설은 일본에서 최초로 방송을 시작한 아침 드라마라는 상징성이 강한 덕분에, 일본어로 ‘아침 TV 드라마’를 의미하는 ‘朝テレビドラマ’를 줄인 ‘아사도라’(朝ドラ)라는 애칭이 있을 정도다.

그런 역사와 전통을 지닌 NHK 연속TV소설이 2019년 5월 중대한 변화를 선언했다. 본래 연속TV소설 시리즈는 방송을 처음 시작했던 1961-1962년을 제외하고, 1962년부터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주 6일 방송을 꾸준히 유지해왔다. 하지만 2020년 방송 예정인 신작 ‘옐’(エール)부터는 토요일 방송을 중단하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 5일 방송으로 전환하겠다는 소식을 NHK가 정례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한 것이다.

NHK가 공식적으로 밝힌 아침 드라마 축소 사유는 ‘노동시간 단축’ 문제였다. ‘옐’은 연속TV소설 최초로 4K UHD 해상도로 촬영할 예정이고, 그로 인해 제작시간이 필연적으로 늘어날 수 밖에 없다고 NHK는 강조했다. 동시에 2019년부터는 ‘일하는 방식 개혁법’(働き方改革法律)이 시행되는 것을 언급하며, 드라마 제작 현장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주간 방송 시간을 줄일 수 밖에 없음을 설명했다.

대체 ‘일하는 방식 개혁법’이란 무엇일까? 한국이 지난 몇 년간 노동시간 단축 문제로 시끄러웠던 것처럼, 일본 역시 노동시간 문제가 현안이 되었다. 일본어로 ‘과로사’를 의미하는 ‘Karoshi’가 국제적으로 과로사를 칭하는 용어로 사용될 정도로, 일본의 과로사 문제는 오래 전부터 국제적으로 악명이 높았다. 결국 2018년 일본 정부와 국회는 ‘일하는 방식 개혁법’이라는 이름으로 1947년 노동기준법 제정 이후 약 70년 만에 노동에 관계된 8개 법안을 대대적으로 손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개혁의 핵심은 ‘노동시간 규제’이다. 이전까지는 법에는 주 40시간 노동을 규정하고 있어도, 노사협약을 통해 초과근무를 무제한적으로 허용하면 막을 길이 없었다. ‘일하는 방식 개혁법’은 기존 법의 맹점에 제동을 걸었다. 아무리 노사 합의로 초과근무를 허용해도 1인당 노동시간은 총 720시간을 넘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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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노동 개혁에 대해 일본의 많은 노동 운동가들은 여전히 법에 맹점이 많음을 지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하는 방식 개혁법’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1일 8시간 노동’을 논하는 책들이 늘어나고, 최근 TV 드라마로도 제작된 소설 ‘저, 정시에 퇴근합니다’ 같은 창작물이 나올 정도로 많은 일본인들은 노동시간 규제 시행에 큰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에 NHK의 연속TV소설도 반응을 보인 셈이 되었다.

여기에 일본의 메이저 언론인 ‘아사히신문’은 NHK 관계자와 취재를 통해 몇 가지 사실을 더 밝혀냈다. ‘일하는 방식 개혁법’ 시행도 중요한 이유지만, 아침 드라마 촬영을 기피하는 방송 스태프들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 취재 결과 드러난 것이다. 동시에 취재에 응한 NHK 관계자는 “아무리 아침 드라마 촬영 시간을 제한해도, 제작 현장에서는 여전히 비명이 높아지고 있다”며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필요함을 지적했다.

그리고 NHK의 이러한 소식은 한국과도 결코 무관치 않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과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가 지속적으로 지적했던 것처럼, 한국 드라마 제작 환경의 혹사 문제는 일본 이상으로 심각하다. 오히려 NHK 연속TV소설을 비롯한 일부 작품을 제외하면 주 1회, 회당 60분 이내 방송이 보편화된 일본과 달리 한국은 여전히 주 2회, 회당 60분 이상이 기본이다. 2010년대 후반에 접어들며 SBS를 제외하면 모든 방송사가 아침 드라마를 폐지하는 등 서서히 지상파 방송국들이 드라마 방송편수를 줄이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시청률 감소’와 ‘제작비 절감’ 문제로 한정되어 있다. 어떤 방송사도 드라마 방송편수 축소에 방송 노동 환경과 연관된 이유를 공개적으로 제시하지 않았다.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한국 역시 곧 방송 제작업의 노동 시간이 축소된다. 2018년 근로기준법 시행령이 개정되며 오랜 시간 동안 ‘노동시간 특례업종’으로 지정되며 무제한 연장근로가 가능했던 방송 노동은 특례업종에서 제외되었다. 그리고 2019년 7월 1일부터는 단계적으로 주 52시간제가 시행되어, 2021년 7월 1일부터는 5인 이상을 고용한 모든 방송 사업장이 주 52시간제를 준수해야 한다. 그러나 노동시간 축소가 바로 코앞에 닥친 마당에서도 방송국들은 이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을 뿐이다.

물론 점차 TV를 보는 사람이 줄어들고, 광고 시장의 중심은 TV에서 인터넷과 모바일로 이동하는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제작비가 증가할 수밖에 없는 노동시간 규제 적용에 방송국들이 반가워하지 않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그러나 이미 오랜 시간 방송국들은 방송 노동자들에 마땅히 보장받아야 할 권리를 보장하는 대신, 철저히 방송국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며 열악한 방송 제작 환경을 계속 이어나갔다. 심지어는 KBS나 MBC, EBS 같은 공영 방송사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어떤 의미로는 계속 체불하던 미납금을 이제야 내게 된 셈이다. NHK의 아침 드라마 축소 선언은 단순한 방송 시간 단축이 아니라, 한국 방송과 방송 노동이 나아가야 할 길을 보이는 하나의 이정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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