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 4주차 금요일 퇴근을 앞둔 오후, 상사는 ‘위에서 계약 안하겠다고 하니 다음주 월요일부터 출근하지 말라’는 말로 관계를 정리했다. 100대1, 많게는 수백대1을 뚫어야 하는 지상파 기상캐스터 자리였고, MBC 사장과 보도국장이 모두 부당해고에 굴복하지 않은 ‘정의로운’ 언론인이었기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었지만 끝은 허무했다.

MBC는 지난해 7월 기상캐스터 모집공고를 냈다. 당시 한 지역 케이블방송에서 아나운서로 일하던 정아무개씨는 이력서·자기소개서·자기소개동영상을 준비해 지원했다. 1차 서류전형, 2차 카메라테스트·면접, 3차 최종면접을 거쳐 8월10일 합격통보를 받았다. 정 전 캐스터는 지역생활을 정리하고 경력증명서 등 서류를 챙겨 8월20일 서울 상암동으로 출근했다. 교육시간을 오전 9시~오후 6시로 안내받았지만 7시경 출근해 선배들 날씨뉴스를 보며 방송을 준비했다.  

▲ 정아무개 전 기상캐스터가 MBC에서 기상캐스터 교육받는 모습
▲ 정아무개 전 기상캐스터가 MBC에서 기상캐스터 교육받는 모습
▲ 지난해 8월 합격한 MBC 신입 기상캐스터 4명의 출입증.
▲ 지난해 8월 합격한 MBC 신입 기상캐스터 4명의 출입증.

MBC는 정 전 캐스터를 포함해 기상캐스터 총 4명을 선발했다. 정 전 캐스터는 미디어오늘에 “4주 교육을 받는 동안 팀장을 포함해 교육담당자 누구에게도 교육 중 합격이 취소될 수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며 “팀장이 ‘너는 나랑 오래가자’라고 격려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아나운서·교수·기상청 예보관 등에게 화술, 날씨현상, 일기도 분석 등 강의를 들었고 때마다 이들은 ‘MBC 신입 기상캐스터’로 소개됐다. 

정 전 캐스터에 따르면 지난해 9월14일 PD 두 명이 그에게 “자리 잡는 게 어색하지만 방송하며 나아지는 부분이야. 목소리가 또랑또랑해 잘 들린다. 이 정도면 다음주 방송 투입하는데 큰 문제 없을거야”라며 격려했다. 정 전 캐스터는 이날 한 PD와 카카오톡으로 대화를 나눴는데 해당 PD는 “다음주에 봬요”라고 인사했다. 그 무렵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국장이 ‘언제 방송에 투입되는지’를 물으며 “거는 기대가 크다. 열심히 해달라”고 말했다고 그는 전했다. 

▲ MBC 보도국의 한 PD가 정아무개 전 기상캐스터에게 지난해 9월14일 보낸 카톡. 정 전 캐스터는 이날 '출근하지 말라'는 통보를 받았다. 정 전 캐스터는 본인을 포함해 주변 사람들도 모두 갑작스럽게 자신이 합격취소 통보를 받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 MBC 보도국의 한 PD가 정아무개 전 기상캐스터에게 지난해 9월14일 보낸 카톡. 정 전 캐스터는 이날 '출근하지 말라'는 통보를 받았다. 정 전 캐스터는 본인을 포함해 주변 사람들도 모두 갑작스럽게 자신이 합격취소 통보를 받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날 오후 5시 경 팀장은 정 전 캐스터에게 “위에서 너랑 계약 안 하겠대”라며 다음주 월요일부터 출근하지 말라고 통보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조(방송용 어투)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나중에 상처받느니 지금 나가는 게 덜 상처받고 낫다’는 답이 돌아왔다. 당시 신입 기상캐스터들은 방재기상정보시스템에 등록하기 위해 보도국장 직인이 있는 ‘프리랜서 용역 제공 확인서’만 받았을 뿐 정식 계약서를 쓰지 않았다. 다수 방송사에서 출근 첫날 계약서를 쓴다. 

며칠 뒤 정 전 캐스터 측은 MBC에 매일 똑같은 시간에 출퇴근해 실질적인 노동자라고 볼 수 있으며 평가한 기준이나 자료를 받은 적 없는데 귀책사유 없이 구두로 당일 합격 취소를 통보한 것은 문제라고 주장했다. 기상캐스터 모집공고에도 ‘교육 중 채용취소가 가능하다’는 언급은 없었다. 정 전 캐스터 측은 MBC와 정 전 캐스터가 사실상 계약이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를 이행해달라(출근)을 요구했지만 MBC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음달인 지난해 10월 정 전 캐스터는 최승호 사장과 박성제 보도국장에게 메일을 보냈다. 그는 “비디오 평가에서 부족하다는 평이 있지만 애초 비디오 평가가 부족했다면 전형에서 최종합격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요즘 시대에는 아르바이트 노동자에게도 ‘내일부터 나오지마’라고 일방 해고하진 않는다”고 했다. “정규직이 아니란 이유만으로 오래 일한 직장이 아니기에 해직기자·PD들이 겪은 고통과 비교할 수 없어 내 고통은 외면 받을 수밖에 없는지 묻고 싶다”고도 했다. 그는 답을 받지 못했다.  

정씨는 미디어오늘에 “다른 지상파나 보도채널에 있는 현직 캐스터, 전현직 PD들에게 내 날씨 진행 비디오를 보여줬는데 다들 신입으로서 자질이 부족하지 않다고 했다”며 “MBC를 공격할 목적이었다면 처음부터 소송·인터뷰를 했겠지만 애정을 지키고 싶어서 참았는데 이젠 부당한 일을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 지난해 MBC 신입 기상캐스터 교육 중 한장면. 사진=정 전 캐스터 제공
▲ 지난해 MBC 신입 기상캐스터 교육 중 한장면. 사진=정 전 캐스터 제공

 

MBC 측은 ‘평가 결과 함께 일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는 입장이다. 

박성제 보도국장은 12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근로계약을 맺은 게 아닌데 프리랜서들 뽑을 때 테스트를 거치지만 교육을 거쳐서 방송에 투입하는 게 힘들겠다 싶으면 안 쓸 수도 있다”며 “‘방송을 할 수 없겠다’고 보고받았다”고 말했다. 

보도국 기상팀 관계자는 이날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계약이 체결되지 않은 시점’이라는 걸 언급하며 “부국장급 이상 5명이 매주 평가했는데 최종적으로 방송 투입이 어렵겠다고 의사결정을 했다”며 “투입 하지 않는 게 서로에게 좋겠다고 판단해 나름대로 배려한 것”이라고 말했다. 구체적인 평가기준을 다 말할 수 없다며 “비디오 평가 뿐 아니라 일을 대하는 태도, 신뢰 등의 부분도 있다”고 덧붙였다.   

MBC 측은 인사부에서 고용관계를 맺는 ‘채용’이 아니라 보도국 등 실무기관에서 프리랜서로 ‘모집’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MBC 관계자는 13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기상캐스터를 모집할 때 1,2,3차를 거치니 거창해 보이지만 정규직을 뽑을 때는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니 여러 역량을 검증하지만 기상캐스터는 하나의 일을 전문적으로 해 그 분야를 주로 검증한다”고 말했다.

‘기상캐스터를 교육 중에 합격 취소한 사례가 빈번했느냐’는 질문에 해당 관계자는 “AD, FD 등 스태프처럼 기상캐스터도 (MBC 인사부가 아닌) 보도국이 프로그램 제작예산으로 모집해 (취소가) 빈번했는지 여부는 파악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전국언론노조 MBC본부가 지난 2017년 11월 설치한 ‘사장 후보자에게, 질문 있습니다!’라는 제목의 게시판에는 방송사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요구하는 방송인들의 호소가 적지 않게 담겨 있었다. 사진=김도연 기자
▲전국언론노조 MBC본부가 지난 2017년 11월 설치한 ‘사장 후보자에게, 질문 있습니다!’라는 제목의 게시판에는 방송사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요구하는 방송인들의 호소가 적지 않게 담겨 있었다. 사진=김도연 기자

 

기상캐스터, 불안정노동 문제제기 첫 사례

방송계 비정규직 문제가 불거진 지 꽤 됐지만 기상캐스터 직군에서 열악한 노동환경을 문제제기한 기사를 찾아보기 어렵다. 미디어오늘 확인결과 방송계 비정규직 문제를 다루는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와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등에도 기상캐스터 직군이 찾아온 사례는 없었다. 프리랜서로 일하다 직군을 바꿔 정규직이 된 사례가 없진 않지만 극히 예외사례다. MBC 뿐 아니라 모든 방송사는 기상캐스터를 프리랜서로 모집한다. 

아나운서와 기상캐스터를 함께 준비하는 이들이 많고 지역방송이나 케이블·보도채널에서 일하다 KBS·MBC·SBS에서 사람을 뽑으면 전·현직이 모두 경쟁에 뛰어든다. 자신이 합격한 시험이 아나운서면 아나운서가 되고 기상캐스터면 기상캐스터가 된다. 프리랜서를 뽑는 자리였으면 프리랜서가 되고 계약직을 뽑는 자리였으면 계약직이 된다. 방송을 간절히 원하는 지원자들은 ‘방송사가 어딘지’에 집중하지만 문제가 생겼을 때 방송사들은 그들의 ‘신분’을 고려한다.

한 방송계 관계자는 미디어오늘에 “전반적으로 프리랜서 성격이 강해지는 추세지만 두 직군을 비교하면 아나운서보다 기상캐스터가 더 프리랜서 성격이 강하다”며 “광고를 찍거나 다른 행사를 뛰는 것도 기상캐스터가 더 많은 편”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나운서에 비하면 소속감이 덜하고, 다른 방송사를 합격해 이직하면 되니 혹 부당한 처우가 있더라도 일단 참게 된다”고 말했다. 기상캐스터는 방송 직군 중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논리가 가장 강한 직군이다.  

또 다른 방송 관계자는 “얼굴 내놓고 하는 직업인데 이 바닥에서 구설에 오르는 걸 다들 싫어하고 경영진은 그걸 다 알고 있다”며 “분명 그걸 악용하는 경우가 있어 부당한 걸 해소할 수 없는 슬픈 현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MBC는 정규직·비정규직 사규 적용이 거의 비슷하다는 등의 사례를 들며 ‘사정이 좋은 사업장’이라고 평가했다. 이는 상당부분 MBC 노조의 투쟁 결과라는 평이다. 반대로 노조가 없거나 약한 방송사의 비정규 노동환경은 더 열악하다고 전했다. 

방송사 입장에서 볼 때 프리랜서는 방송사 타이틀을 이용해 몸값을 띄워 언제든 회사를 떠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다. 하지만 이는 유명 아나운서나 기상캐스터 사례일 뿐 다른 한쪽에선 “언제 잘릴지 모르고 내가 왜 나가야 하는지도 모른 채 2만원이 안 되는 뉴스를 하며 만원 넘는 주차비를 내더라도 너무 간절하니까 감내하는 친구들이 있다”고 해당 관계자는 말했다. 

[관련기사 : 전임 MBC경영진이 뽑은 프리랜서 최근 계약만료]

※ 기사 수정 : 2019년 06월17일 오후 16시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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