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호 여사는 고 김대중 대통령이 목숨을 잃을 위기에서부터 대통령이 되기까지 극단의 순간을 함께 경험했다. 향년 97세. 김 대통령이 서거하기 한 해 전 이 여사가 쓴 자서전을 보면 그의 삶은 길고 험난했다.

이 여사는 2008년 저술한 자서전 ‘동행’에서 1962년 김대중과 결혼하면서 이처럼 험난한 여정을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남편은 수차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고, 어둡고 쓸쓸한 감옥과 연금의 긴 나날들, 이국에서의 망명 생활 등은 신산하고 고통스러운 세월이었다고 했다. 이 여사는 남편이 차디찬 감방에 있는 기간에 홀로 기도하고 눈물로 지새운 밤도 많았다며 독재는 잔혹했고, 정치의 뒤안길은 참으로 무상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이 여사는 유신 통치와 제5공화국이 지속되는 고통의 심연 속에서 지순한 아름다움을 목격하기도 했다며 “어떠한 억압과 시련 속에서도 의를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은 결코 절멸하지 않음을 똑똑히 볼 수 있었고, 그토록 수많은 국민의 소망이 헛되지 않아서 민주주의는 점차로 결실을 맺었다”고 썼다. 김 대통령의 대통령 당선-남북정상회담-노벨 평화상 수상에 이르렀을 때 이 여사는 어쩌면 남편과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누렸다고도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문득 돌아보니 극한적 고통과 환희의 양극단을 극적으로 체험한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며 “사형수로부터 대통령이 된 사람의 동반자로 살아온 것”이라고 평가했다.

유복한 의사의 딸 여성운동의 눈 키워

애초 이 여사는 의사의 딸로 태어난 유복한 집 자녀였다. 특히 아들 딸 차별없는 부모 밑에서 성장해 여성운동가로서의 환경도 어려서부터 갖춰져 있었다. 이 여사는 어머니가 이화고녀 시절 “여자도 공부해야 한다”고 틈만나면 주문해 몇 번 씩 ‘결혼하지 않는다’, ‘건강해야 한다’, ‘공부를 많이 하자’고 자신과 약속하고 또 다짐했다며 그것만이 어머니의 뜻을 이루는 길이라고 믿었다고 썼다.

해방직전 충남 예산의 삽교공립국민학교에 부설된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원으로 부임하면서 지켜본 농촌 아낙네들의 현실이 가혹했다고 전했다. 이 여사는 “권위적인 가부장제 아래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 중노동에 짓눌렸다”며 “농촌 여인들의 삶은 오로지 가족을 위한 희생 뿐이었다”고 표현했다.

김대중과의 만남은 모험이었다

이희호 여사의 이런 인생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김대중과 만남에서였다. 이 여사는 “그 사람 김대중은 노모와 어린 두 아들을 거느린 가난한 남자였다. 그의 셋방에는 앓아누은 여동생도 있었다. 그는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정치 재수생이었다”고 평가했다.

DJ는 서너차례 국회의원에 낙선하다 1961년 강원도 인제의 보궐선거에서 마침내 당선됐지만 사흘 뒤에 5·16 쿠데타가 일어나 국회가 해산됐다. 장면 내각에서 여당인 민주당 대변인을 지냈던 경력 때문에 검거되어 두차례에 걸쳐 3개월간 구속됐다. 그런 김 대통령을 두고 이 여사는 “늘 책을 읽고 메모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다”며 “이 비범한 남자의 꿈이 꿈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결혼하려고 하자 주변에서 다 만류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가 미국 망명시절 피플지에 실렸던 사진. 사진=이희호 자서전 동행서 재촬영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가 미국 망명시절 피플지에 실렸던 사진. 사진=이희호 자서전 동행서 재촬영

김 대통령은 청혼도 무척 정치적이고 논리적이었다고 떠올렸다. “나에게는 원대한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 참된 민주주의를 꽃피우고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이 여사는 “그에게 정치는 꿈을 이루는 길이며 존재 이유였다면 나에게는 남녀평등의 조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길 중의 하나였다”며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보다는 서로가 공유한 꿈에 대한 신뢰가 그와 나를 동여맨 끈이 되었다”고 썼다.

하지만 김대중과 이희호의 결혼은 ‘모험이었다’. 김 대통령이 1963년 11월 6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된 이후 국회의원으로서 두각을 나타내 스타로 떠올랐다. 대선 후보로 박정희와 선거에서 100만 표차로 석패한 뒤부터 고난이 시작됐다. 1973년 8월8일 김 대통령이 도쿄에서 납치됐다가 극적으로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던 때를 두고 이 여사는 “그 때도 박 정권은 ‘김대중의 자작극’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며 “아 하늘이 두렵지 않은가 나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고 당시 심정을 전했다.

박정희가 총격을 당했을 때 김 대통령과 이 여사 내외엔 ‘기쁘지 않으냐’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고 썼다. 이 여사는 “그러나 우리는 결코 박 대통령의 불행한 죽음을 기뻐하지 않았다”며 “장기 독재의 종식은 환영할 일이었지만 ‘암살’이라는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는 비열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김 대통령이 애석해했다며 이승만 대통령이 그랬듯이 박 대통령도 조만간 국민들 앞에 스스로 굴복할 수밖에 없었는데 ‘궁정 모반’이 일어났다고 전했다.

나는 광주가 남편의 목숨을 구했다고 믿는다

무엇보다 이 여사에게는 5월 광주 민주화운동이 터졌을 때가 가장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신군부가 1980년 7월4일 김대중이 광주항쟁의 배후조종자라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발표했을 때 군부가 김 대통령을 회유하려던 장면을 소개했다. 이학봉 수사단장이 발표 엿새전에 찾아와 협력하라고 요구하면서 정보부 직원을 통해 신문 한무더기를 보여줬다. 광주 사건이 실린 신문이었다. 김 대통령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사망자 수를 보고 기절했다”며 “나를 지지해준 젊은이들, 광주에서 죽은 사람들, 나를 그토록 신뢰하고 존경하는 가족들을 배반할 수 없었다. 죽어서 살자고 결심했다. 사흘 후 그가 왔다. ‘협력할 수 없다. 죽음이 곧 삶이다’라고 거부했다”고 썼다.

이희호 여사는 이 장면을 두고 “나는 광주가 남편의 목숨을 구했다고 믿는다”며 “광주에서 살상을 한 신군부는 김대중을 결코 죽일 수 없었고, 김대중 역시 민주주의를 위해 피를 흘린 광주를 배반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이 여사는 “만약 그때 거듭된 고난으로 지쳐서 회유에 굴복하고 협력했더라면 그 인생이 얼마나 비루해졌을까”라며 “나 역시 그런 남편을 용서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불의에 굴복하지 않은 그를 헌신적으로 도운 것은 단지 내가 그의 배우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라고 썼다.

이 여사는 남편(김대중)이 한참후에 “나도 인간인데 어찌 살고 싶지 않았겠소. 해외로 나가 가족들과 조용히 살까 하고 마음이 흔들릴 때 제일 먼저 당신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가 지난 1962년 5월10일 체부동 이 여사의 외삼촌댁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있다. 사진=이희호 자서전 동행에서 재촬영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가 지난 1962년 5월10일 체부동 이 여사의 외삼촌댁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있다. 사진=이희호 자서전 동행에서 재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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