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호 여사 빈소를 찾은 이들은 그를 그저 ‘대통령의 아내’가 아닌 여성·민주화운동가로 기억했다. 11일 이 여사 빈소가 마련된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은 오전부터 정치인과 일반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졌고, 이를 취재하려는 기자들로 북적였다.

이날 유가족을 제외하고 가장 먼저 빈소를 찾은 문희상 국회의장은 조문을 마친 뒤 울먹이는 목소리로 “10년 전 김대중 대통령이 돌아가셨을 때 이희호 여사가 ‘아프고 견디기 힘든 인생을 참고 견뎌준 당신, 사랑하고 존경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지금 이희호 여사에게 그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두 분이 원하셨던 자유와 정의, 민주주의와 인권, 한반도 평화 완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영면하신 이희호 여사께서 하늘나라에서 빨리 김대중 대통령을 다시 만나 아무 슬픔도 아픔도 없는 세월을 지내시길 간곡히 기도하겠다”고 전했다.

앞서 오후 2시로 공지됐던 조문 시간은 몰려드는 추모객들을 고려해 오전 11시30분으로 앞당겨졌다. 빈소 입구 오른쪽에 마련된 포토라인에는 수십 명의 취재진이 자리했다. 조문을 마치고 나온 정치인들이 포토라인 앞에 설 때마다 발언을 들으려고 앞쪽으로 기자들이 모이는 게 반복되면서, 취재 지원을 맡은 김형구 민주평화당 수석부대변인이 복도 통로를 가로막지는 말아달라는 병원 측 요구를 몇차례나 전했다.

▲ 6월 11일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이희호 여사 빈소. 사진=연합뉴스
▲ 6월 11일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이희호 여사 빈소. 사진=연합뉴스

문 의장과 설훈 더불어민주당 의원, 최경환 민주평화당 의원이 일찌감치 빈소를 방문한 가운데,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 이해찬 민주당 대표,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 등이 오전에 방문해 고인을 추모했다. 전날 이 여사를 만났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배우자 권양숙 여사는 오후 1시20분께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과 함께 빈소를 찾았다. 20여분 뒤 조문을 마치고 나온 권 여사는 모여든 취재진을 뒤로 하고 조용히 빈소에서 빠져나갔다.

애초 조문 시작 시간이었던 오후 2시가 다가오자 박원순 서울시장 내외, 이정미 대표를 비롯한 정의당 의원들,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 등 수석비서관급 이상의 청와대 조문단 등 발길이 이어졌다. 문성근 배우에 이어 방송인 김어준·김용민씨, 주진우 기자 등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멤버들도 비슷한 시각 빈소를 찾았다.

동교동계 출신이자 김대중 정부와 박근혜 정부에서 모두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한광옥 전 비서실장은 이날 “오늘 이희호 여사 서거에 동교동계 정치인들 뿐 아니라 많은 분들이 조문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께서 동서화합과 국민통합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는 걸 입증하고 있다”며 “(이 여사는) 여성지위 향상을 위해 많은 공헌했고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통합 포용 정책을 위해 뒤에서 많은 도움을 주셨다”고 말했다.

▲ 1987년 11월 평민당 김대중 후보 서귀포 유세장에서 부인 이휘호 여사가 단상에서 지원연설을 하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 1987년 11월 평민당 김대중 후보 서귀포 유세장에서 부인 이휘호 여사가 단상에서 지원연설을 하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DJ의 비서’ 출신 인사들은 여성운동가 이희호 여사 일화들을 전했다. 1세대 동교동계로 분류되는 한화갑 한반도평화재단총재는 “이 여사는 김대중 대통령이 가장 외롭고 고달플 때 미국 유학까지 다녀와 DJ와 결혼했다. 그때 YWCA 선배들이 눈물을 흘리며 왜 그 소중한 인생을 그런 초라한 사람에게 바치려고 하느냐고 말렸는데, 이 여사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분’이라며 김대중 대통령을 선택해줬다”며 “대한민국을 위해서나 김대중 대통령을 위해서나 이희호 여사를 위해서나 얼마나 현명한 선택이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동교동계 핵심이었던 한화갑 총재는 “김대중 정부는 김대중·이희호의 공동정부”라고 강조했다.

80년대 DJ 정치비서 출신 이석현 민주당 의원은 “1987년 대선을 앞두고 선거운동할 때 이 여사가 마이크를 들고 연설을 했다. 당시 비서실 회의에서 거부감이 있을 수 있으니 여사께서 연설을 안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다”며 “이 여사에게 대중연설은 아닌 것 같다, 당시 권사였으니까 교회 돌아다니면서 목사들 만나 인사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더니 이 여사가 정색을 하고 ‘지금은 여성이 마이크를 들어야 하는 시대야. 대중에게 얘기를 해야 돼. 나는 김대중 후보 아내로서 이 일을 도울 뿐 아니라 나라의 정의를 세우기 위해 연설하러 다닌다’고 말했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회고했다.

장례위원장을 맡은 장상 전 이화여대 총장은 “추도사를 쓰다가 생각해보니 이희호 여사는 이 시대의 정신을 온 몸으로 구현했을 뿐 아니라 ‘여성 지도자’가 아닌 시대의 ‘지도자’였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 뒤 취재진에게 “여러분께서 각별히 마음을 써서 가시는 길을 아름답게 표현해주시기 바란다”고 조심스레 당부하기도 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핀란드 국빈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 제안으로 장상 전 총리, 권노갑 민주평화당 고문과 함께 장례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오후 3시께 빈소를 찾은 이 총리는 “북유럽에 계신 대통령께서 총리가 공동장례위원장을 맡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전달했고, 기존 공동장례위원장께서 수용해주셨다. 소홀함이 없도록 챙기겠다”고 밝혔다. 이어 “김대중 대통령께서 워낙 강인한 분이었지만 수많은 고난을 이겨내실 때 이 여사의 강인함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며 “이 여사께서는 원칙을 지키고 굳건하게 투쟁을 독려했다. 그런 분이 대통령 옆에 계셨다는 건 대한민국 민주화를 위해 큰 축복이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모셨던 개인으로서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전했다.

▲ 11일 핀란드 국빈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 제안에 따라 이낙연 국무총리가 권노갑 민주평화당 고문, 장상 전 이화여대 총장과 함께 장례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사진=연합뉴스
▲ 11일 핀란드 국빈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 제안에 따라 이낙연 국무총리가 권노갑 민주평화당 고문, 장상 전 이화여대 총장과 함께 장례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사진=연합뉴스

‘여성지도자 영부인 이희호 여사 사회장’은 이날 조문을 시작으로 12일 오전 11시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의 입관 예배, 14일 오전 7시 신촌 창천감리교회 장례 예배로 이어진다. 고인은 14일 오전 6시 장례식장을 떠나 장례 예배를 마치고 동교동 사저를 들른 뒤, 국립서울현충원 김대중 전 대통령 묘소에 합장된다.

이희호 여사는 지난 10일 오후 11시37분 향년 97세 나이로 소천했다. 장례위원회 측은 이 여사가 지난 3월부터 노환으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해왔으며 영면하기 직전까지 의식을 잃지 않고 가족들과 찬송과 시편 낭송을 했다고 밝혔다. 김대중평화센터 측은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동교동 사저를 ‘대통령 사저 기념관’(가칭)으로 사용하고 노벨평화상 상금을 대통령 기념사업 기금으로 사용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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