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폭력, 비폭력, 비폭력” 노조원들은 팔뚝을 흔들며 구호를 뱉었다. 확성기를 든 노조 간부는 “절대 우리가 먼저 폭력을 써서는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지난달 31일 새벽 현대중공업 주주총회가 열리기로 한 울산 동구 한마음회관 앞. 노조원들은 주주총회를 강행하려는 사측을 저지할 채비 중이었다.

폭력은 용인될 수 없다. 하지만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로 대표되는 울산의 금속노조원들은 자신들의 ‘강성 투쟁’에 자부심을 가져왔던 것도 사실이다. 비록 불법이지만, 노조원들은 노동자의 육체적인 힘으로 자본의 힘을 이겨내는 자신들 투쟁이 전국 노동자에게 통쾌함과 희망을 선사한다고 여겨왔다. 울산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근거지이자 우리나라 노동운동을 이끄는 곳이었다. 그 배경을 이해했을 때 그날 ‘비폭력’을 외치는 노조원들은 어색했다.

오전 10시30분, 주주총회가 열리기로 한 시간보다 30분 지난 시점이었다. 확성기를 들고 한마음회관 앞에 나타난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주주총회 장소가 울산대학교 체육관으로 변경됐다고 알렸다. 시작 시간은 11시10분이라고 했다. 남은 시간은 40분, 교통체증까지 생각한다면 노조원들의 주주총회 참석은 물리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웠다. 노조원들 상당수가 현대중공업 소액주주였다.

노조원들은 바리게이트로 쳐놨던 오토바이를 집어타고 내달렸다. 오토바이가 아니면 시간 내 도착은 불가능했다. 노조원을 붙잡아 오토바이를 얻어 탔다. 곡예 같은 질주를 한 오토바이 부대 선두가 울산대 정문을 통과한 건 11시11분이었다. 정문은 이미 용역과 경찰로 막혀 있었다. 노조원은 무방비였던 후문을 공략했다. 노조원들이 몰려들자 용역들은 황급히 쇠사슬과 자물쇠로 유리문을 걸어 잠갔다. 화 난 노조원들은 유리문을 깼다.

1차 저지선이 무너지고, 2차 저지선이 형성됐다. 벽 하나를 두고 체육관 안에선 3분30초 만에 끝난 주주총회가 진행 중이었다. 용역들은 서로 엉겨 붙어 인간 장벽을 만들어 몸으로 노조원들을 막았다. 노조원들은 체육관 단상으로 이어지는 길을 트려고 용역 한 명 한 명을 떼어내 밖으로 내보냈다.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노조원들은 “비폭력, 비폭력” 구호를 외쳤다.

오전 11시17분, 용역 중 한명이 노조원들을 향해 소화기를 뿌렸다. 소화기 분말은 위에서 아래로 직선을 그리며 헬멧을 쓴 노조원 얼굴을 강타했다. 조금 충격이었다. 사측은 노조원들을 배제하고 주주총회를 진행하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밀폐된 지하는 금세 소화기 분말로 가득 차 숨쉬기 어려웠다. 노조원들은 일단 후퇴해 밖으로 나왔다.

언론 보도를 종합했을 때, 이후 노조원들은 주주총회가 끝난 주주총회장에 들어가 분풀이를 한 것으로 보인다. 사측은 노조원들이 소화기를 쏘고 주주총회장 벽면을 부수는 등 난동을 부렸다고 주장했다. 폐쇄회로 영상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자와 통화에선 “보여줄 순 있지만 영상 제공(전송)은 어렵다”고 전했다.

대부분의 언론은 사측 말을 그대로 받아 노조의 폭력성을 부각하는 보도를 쏟아냈다. 노조가 먼저 소화기를 쐈고 체육관 벽면을 부쉈다고 했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적어도 ‘확인된 사실’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노조원들이 뒤에 소화기를 쐈을 지도 모르지만, 먼저 쏜 건 용역이었다. 노조가 벽을 부수는 걸 본 기자는 아무도 없다. 부서진 걸 봤을 뿐이다. 상황이 벌어질 때 노조원과 용역이 부딪히는 현장에 있던 기자는 필자뿐이었고, 필자 또한 주주총회장 내부를 보진 못했다.

▲ 박현광 비즈한국 기자
▲ 박현광 비즈한국 기자

물론 사측이 폐쇄회로 영상을 특정 매체에 보여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지난 7일에도 필자와 통화에서 “영상 제공은 어렵다”면서 “아직 (영상을) 기자에게 보여준 적은 없다”고 말했다. 대부분 매체는 사실 확인 없이 사측 말만 듣고 그것이 사실인양 보도한 셈이다.

쏟아지는 거짓 보도를 마주하며 현장에 있었던 기자로서 씁쓸했다. 물론 누가 물리력을 먼저, 더 강력하게 동원했느냐 하는 문제는 현대중공업의 대우조선 해양 인수합병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사실로 위장한 거짓 한 조각은 마지막까지 이성의 끈을 놓지 않으려 비폭력을 외치던 노조원들의 노력을, 그 진실을 뭉개버리기엔 충분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