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이 판치는 시대에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곧 혁명이다.” 조지 오웰의 저 멋진 명언이 ‘탈진실’의 시대에선 각자 진영의 전투력을 끌어올리는 구호가 되어버린다. 미국의 저명한 저술가 리 매킨타이어의 책 ‘포스트트루스’가 국내에 번역됐다. 가짜뉴스와 탈진실 담론에 관한 최근 동향을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대중적 미디어비평서다. KBS ‘저널리즘토크쇼J’에서 저널리즘전문가로 활약 중인 정준희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 겸임교수가 이 책의 해제를 썼다.

책을 따라가 보자. 구텐베르크가 1439년 인쇄술을 발명한 이래로 ‘저널리즘’이 시작됐다면, 1830년대 이전까지 객관성은 논란거리가 아니었다. 신문은 당파적 관점에서 보도하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러나 1840년대 전신이 발명되며 연합뉴스통신사, 그 유명한 AP통신이 탄생했다. 뉴욕의 여러 신문사가 합작한 결과물이었던 AP통신은 다양한 정치성향의 신문사에게 뉴스를 제공해야 했고, AP로써는 상업적 성공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객관적 보도를 해야 했다.

황색언론의 선정성이 극에 달했던 1896년 뉴욕타임스가 부유한 독자를 겨냥해 사실보도를 강조하며 객관주의는 저널리즘의 보편적 가치가 되었다. 그러나 디지털시대, 무료로 볼 수 있는 미디어라는 혁명적 변화가 다가왔고, 디지털은 다시금 황색언론을 전면에 내세웠다. 더 많은 체류 시간을 원하는 SNS와 유튜브는 ‘인지편향’을 유발하는 알고리즘을 도입했고,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가짜뉴스에 노출되기 시작했다. 

▲ 포스트트루스, 두리반, 16000원.
▲ 포스트트루스, 두리반, 16000원.

소셜미디어가 새로운 뉴스 매체로 떠오르면서 사실과 의견의 경계는 흐려졌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뉴스를 확인한다는 말은 자신과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을 ‘친구 삭제’하듯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뉴스 출처를 무시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저자는 “정치적 이념을 내세우려는 자들이 사람들의 무지와 편향을 이용하기에 너무나도 적절한 환경이 갖추어지고 말았다”고 진단한다. 더불어 저자는 인지편향의 확산배경으로 전통미디어의 쇠퇴에 주목한다. 

1996년 MSNBC와 폭스뉴스가 등장했다. 진보와 보수를 대변하는 이 방송은 스스로를 CNN의 대안으로 강조했다. 특히 폭스뉴스는 당파적 뉴스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며 훗날 TV조선의 롤모델이 되었다. 폭스뉴스에서 객관적 뉴스와 당파적 의견 사이의 경계는 모호해졌다. 저자는 “편향된 의견에 바탕을 둔 미디어가 떠오르면서 기존 전통적 미디어는 선호도 면에서 경쟁력을 잃어버렸다”며 다음과 같이 적었다.

“폭스뉴스가 다른 언론이 모두 진보 쪽으로 편향되어 있으니 보수 편향적 보도로 균형을 잡겠다고 했을 때, 전통미디어 입장에선 자신들이 진보 편향적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이제부터 공정하고 균형 잡힌 보도가 무엇인지 보여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어떤 논점을 다루더라도 양쪽 입장을 모두 보도했다. 그 결과 아이러니하게도 보도의 객관성이 높아지기는커녕 정확한 뉴스 보도에 집중하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그렇게 언론은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사람들이 꾸며낸 거짓도 ‘논란이 많은 이슈’라고 착각하면서 양쪽 입장을 모두 보도하기 시작했다. 한국을 예로 들면 ‘JTBC 태블릿PC 조작설’이나 ‘5·18 북한군 개입설’ 같은 이슈다. 미국에선 지구온난화를 두고 석유회사들이 특정연구를 지원하고 미디어가 ‘논란’으로 보도하게 만들며 ‘당파적’ 사안이 됐다. 지구온난화를 걱정하며 재생에너지 중심으로의 에너지전환에 동의하면 민주당 지지자가 되는 식이었다. 

“객관성이 필요한 이유도 진실과 거짓에 균등한 시간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실 자체를 전달하기 위해서 아닌가? … 뉴스에서 봤다는데, 누가 대중을 욕할 수 있을까? 언론은 자신들이 편향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도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두느라 정작 ‘진실을 전달하는 일’은 도외시하고 있었다. 조작된 의혹을 가지고 진실에 대한 혼란을 퍼뜨리고자 했던 자들의 손에 제대로 놀아난 것이다.” 그렇게 미국에선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었다.

▲ 게티이미지.
▲ 게티이미지.

트럼프는 자신의 책 ‘거래의 기술’에서 “미디어는 진실보다 논란을 더 좋아한다”고 적었다. 그는 대선 기간 ‘힐러리 가짜뉴스’의 최대 수혜자였다. 저자는 “균형 잡힌 보도를 해야 한다는 압력에 굴복한 언론이 열성 당원들이 제공하는 정보마저 모두 받아들이며 극단적 의견에도 지나친 신뢰성을 부여했다”고 지적한다. 이 같은 흐름으로 언론에 대한 미국인의 신뢰도는 바닥을 쳤다. 5대5에 가까운 중립이 ‘공정’으로 통용되는 한국 주류 언론의 현실과도 맞닿아있다. 

이런 가운데 팟캐스트와 트위터, 그리고 유튜브와 페이스북은 뉴스수용자를 파고들었다. “어느 뉴스든 당파심이 강한 시청자가 너무 많기 때문에 전통적 미디어와 대안적 미디어의 경계는 모호해졌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진실성과는 동떨어진 가치를 추구하는 출처로부터 뉴스를 확인하려고 한다. … 어차피 모든 미디어가 편향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치우친 미디어를 선택하더라도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셜미디어가 떠오르고 전통미디어가 추락하며 혼란은 극에 치달았다. “오늘날 뉴스수용자들은 당파적 의견에 끊임없이 노출된다. 어차피 주류 언론의 권위는 떨어졌기 때문에 프로파간다로 이익을 얻는 이들은 더 이상 언론이 자신에게 유리한 이야기를 전달하게 만들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진실을 끌어내릴 준비는 모두 갖춰졌다.” 저자의 진단대로 이제 선동가들은 방송을 장악하려 하지 않는다. 유튜브를 켜고 ‘돌격대원’이 되어 ‘구독’과 ‘알림’을 잠식할 뿐이다. 

▲ 디자인=이우림 기자.
▲ 디자인=이우림 기자.

20세기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자신의 책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이렇게 적었다. “전체주의 지배가 노리는 가장 이상적 대상은 확신에 찬 나치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아니다. 사실과 허구 혹은 참과 거짓을 더 이상 분간하지 못하는 일반 사람들이다.” 이 같은 인식의 연장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차피 진실이 온갖 헛소리 밑에 파묻혀 있는데 굳이 진실을 검열할 필요가 어디 있을까? 정확히 이 지점이 탈진실현상의 핵심이다.” 

정준희 교수는 이 책의 해제에서 “가짜뉴스는 완전히 악의적인 허위와 완벽한 선의의 진실 사이의 느슨하고 넓은 스펙트럼 가운데 어느 지점에서 계속 자리를 옮겨가고 있는, 탈진실 시대의 사회정치적 문화적 커뮤니케이션 양식의 특정 조합”이라고 정의한다. 정 교수는 탈진실 시대를 가리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도저히 진실이라고 볼 수 없는 허위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다분히 체념적이거나 상당 부분 관용적이 되었다는 점”이라고 꼬집는다.  

슬기로운 뉴스수용자들은 뭘 해야 할까. 저자는 “핵무기가 존재한다고 세계가 멸망하지 않는 것처럼 가짜뉴스가 곧바로 탈진실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소셜미디어도 도구일 뿐 그 자체로 결과는 아니다”라고 지적하며 “우리는 거짓을 퍼뜨릴 수도 있지만 진실을 퍼뜨릴 수도 있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기계적 중립성은 속이려는 자들이 원하는 것이란 사실을 기억하자”며 “진짜 뉴스로 가짜뉴스를 덮어버리자”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를 위해 다시금 저널리즘에 주목한다. “탐사보도기관이 출처가 믿을 만하고 사실 검증이 이뤄졌으며 증거가 기반이 되는 보도를 진행할 수 있게 재정적으로 지원하자”고 외친다. 더불어 언론사 간 협업 팩트체크를 비롯해 디지털에서의 허위 정보 유통을 막는 기술적 해결책도 모색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무엇보다 “비판적 사고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자”고 말한다. 다시 조지 오웰이다. “거짓이 판치는 시대에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곧 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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