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6일 현충일 추념사에서 약산 김원봉(1898~1958)을 언급하고 평가하자 조선·중앙·동아 등 보수신문이 7일 일제히 문 대통령을 비난했다. 현충일 추념사에서 김원봉이 언급된 대목은 다음과 같다.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10일 광복군을 앞세워 일제와의 전면전을 선포했습니다. 광복군에는 무정부주의세력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이어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되어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역량을 집결했습니다. 그 힘으로 1943년, 영국군과 함께 인도-버마 전선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고, 1945년에는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함께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던 중 광복을 맞았습니다. 김구 선생은 광복군의 국내 진공작전이 이뤄지기 전에 일제가 항복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했습니다. 그러나 통합된 광복군 대원들의 불굴의 항쟁의지, 연합군과 함께 기른 군사적 역량은 광복 후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되고, 나아가 한미동맹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 조선일보 7일자 1면.
▲ 조선일보 7일자 1면.

조선일보 “6·25 남침의 역사마저 뒤집으려”

조선일보는 거세게 비난했다. 이 신문은 1면 머리기사 제목을 “6·25영령 앞에서, 김원봉 띄우기”라고 뽑았다. 

조선일보는 “김원봉은 일제강점기 때 의열단, 조선의용대를 조직해 무장 투쟁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했다”며 “그러나 해방 이후 월북해 김일성 정권에서 국가검열상, 노동상 등 요직을 맡았고, ‘조국해방전쟁’(6·25)에서 공훈을 세웠다는 이유로 훈장을 받았다”고 했다. 이어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문 대통령이 김원봉을 다시 언급한 것은 보훈 대상에 친북 좌파 인물까지 넣어 ‘역사 다시 쓰기’에 나서려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고 주장했다. 

이 신문 사설은 더 나아갔다. 사설은 “(김원봉은) ‘조국 해방전쟁(6·25)에서 공훈을 세웠다’며 김일성으로부터 최고 훈장의 하나인 노력 훈장까지 받았다”며 “김원봉이 공을 세웠다는 6·25로 국토가 결딴나고 우리 국민이 떼죽음을 당했다. 사회 주류 교체가 필생의 숙원이라는 문 대통령이 이제 6·25 남침의 역사마저 거꾸로 뒤집으려 한다”고 비난했다. 

사설은 “문 대통령은 ‘보수든 진보든 모든 애국을 존경한다’고 했다. 김원봉 찬양의 맥락에서 보면 북한의 ‘김씨 왕조 진보’도 ‘애국’의 범주에 드나”라고 비꼬기도 했다. ‘김원봉 언급’이 ‘6·25 남침 뒤집기’가 됐다.

▲ 조선일보 7일자 4면.
▲ 조선일보 7일자 4면.

동아일보도 사설에서 “대통령이 역사학계의 합의조차 이뤄지지 않은 김원봉의 행적을 6·25 순국용사들을 기리는 현충일 추념사에 넣은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더구나 국군 창설과 한미동맹의 뿌리를 서술하면서 김원봉을 거론한 것은 당치 않은 일”이라며 “대통령 추념사가 주된 맥락인 국민 통합을 위한 메시지로 전달되지 않고 새로운 보수와 진보 갈등의 불씨를 던진 것”이라고 해설했다.

중앙일보도 사설에서 “다른 날도 아닌 현충일 추념사에 김원봉을 넣은 것은 이념 갈등을 촉발할 가능성이 크다. 애국과 통합의 범위를 넓히자는 취지라고 해도 꼭 추념사를 통해 제기해야 했는지는 납득하기 어렵다. 진영 대립을 키우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지적에 문 대통령은 무엇이라 답할 것인가”라고 비판했다. 

경향신문은 “김원봉의 삶에 대한 평가와 서훈 여부를 두고 진보·보수 진영은 앞으로도 거세게 부딪힐 것으로 전망된다. 김원봉이 총선을 앞둔 여야 이념 논쟁의 핵심 고리가 될 수도 있다”고 해석했다.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상지학원 이사장)은 지난해 8월 한겨레 칼럼(“잊힌 독립운동가들을 생각한다”)에 김원봉을 주제로 글을 썼다. 김원봉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글이다.

“(해방 이후) 귀국한 김원봉은 혼란한 정세에서도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에 노력한다. 의열단 동지 유석현의 증언에 의하면, 그 무렵 그가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갖은 수모를 당하여 그 뒤 행로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노덕술은 ‘남로당이 주도한 파업에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약산을 잡아 ‘빨갱이 두목’이라고 뺨을 때리며 모욕했다는 것이다. 독립운동 거두가 친일 경관에게 수모를 당하고 풀려난 후 사흘을 꼬박 울며 ‘여기서는 왜놈 등쌀에 언제 죽을지 몰라’하며 한탄했다는 것이다. 1947년 7월 여운형이 암살된 후 그는 친일파와 극우세력으로부터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하였고 거처까지 옮겨 다녀야만 했다. 김원봉이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하고 평양에 남게 된 것은 이런 배경이 있다.”

“북한에서 그는 한때 인민공화당 위원장으로서 활동했지만, 1948년 9월 북한 초대 내각의 국가검열상으로 입각했고, 그 뒤 노동상,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부위원장직 등을 역임했다. 그런 중에도 6·25 때 납북되었던 조소앙·안재홍 등과 인연을 맺고, 이들과 ‘중립화 평화통일 방안’ 등을 모색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1958년 11월 ‘연안파’가 숙청될 때 김원봉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국 관내에서 누구보다 혁혁한 항일운동을 벌인 약산은 이렇게 사라졌고, 남북에서 잊힌 존재가 되었다.”

트럼프 “북 처형설 의문”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5일(현지시각) 북·미 정상회담에 관여한 북한 인사들의 처형설에 “정확한 보도인지 모르겠다”며 의문을 표했다. 

아일랜드를 방문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 인사들의 처형 보도를 봤느냐는 취재진 질문에 “보도가 정확한지 모르겠다. 우리가 상대한 신사들 중 한 명은 우리가 잘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라며 “그가 죽임을 당했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는 전날 밤 극장에 있었고, 그러니까 죽임당하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외신은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한 ‘처형되지 않은 1명’이 김혁철 북한 국무위원회 대미 특별대표인지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인지 명확하지 않다고 했다. 조선일보는 지난달 31일자 1면(“‘김영철은 노역刑, 김혁철은 총살’”)에서 김혁철 특별대표가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총살됐고 김영철 부위원장은 강제 노역 등 혁명화 조치됐다고 북한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 동아일보 7일자 18면.
▲ 동아일보 7일자 18면.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별보좌관은 7일자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처형설 관련 질문에 “김정은 위원장이 하노이 회담 결렬 책임이 전적으로 미국에 있다고 주장하려면 자기 협상팀을 숙청하거나 그들에게 큰 불이익을 주면 안 된다. 자기들이 잘못했다는 걸 자인하는 꼴밖에 안 된다. 북이 그 정도 생각은 한다”고 밝혔다. 

문 특보는 “이미 김 위원장이 각종 정상회담에 나와서 북한은 정상국가이고 자기는 정상국 지도자라고 했는데 그러고서는 그런 처벌을 했을 때 일어날 파장을, 북한에 대해 비판적인 미국·한국 사람들이 그걸 정치적으로 어떻게 활용할지를 김 위원장과 측근이 모를 리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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