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 비례대표의 30%를 청년에게
국회의원 비례대표의 30%를 청년에게
[윤형중 칼럼] ‘세대’ 넘는 ‘정체성’을 갖기 어려운 나라, 인위적 조정 절실

양육자로서 동네 놀이터에 나가는 일이 잦다보니 처음 마주치는 아이들이 어떤 식으로 처음 관계를 맺는지 관찰한다. 많은 아이들이 대여섯 살만 되어도 첫 질문을 이렇게 던진다. “너 몇 살이야?”

어른들이 자주 아이들에게 나이를 물으니 자기들 사이에서도 그게 궁금했던 걸까. 많은 경우 그게 아니었다. 나이를 묻고 난 뒤론 “내가 형(혹은 언니)이야”라고 위계를 확인한다. 위계가 아닌 그냥 서로 간의 호칭을 확인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것도 대부분 아니었다. 형이나 언니, 오빠나 누나에게 “야” 혹은 이름을 부를 땐 아이들 혹은 주변의 어른들이 자주 지적한다. “형이야. 형이라고 불러야지.”

기자는 나이를 잊기 쉬운 직업이면서도 절실하게 느끼는 양면이 있는 직업이다. 경제부에서 기업을 취재할 땐 40대 부장도 50대 임원도 20~30대 기자를 극진하게 대우한다. 한국 사회에선 경제적 갑을관계만이 나이를 압도한다. 

반면 정치부에 있을 땐, 초면인데도 혹은 대면한 적이 없는 정치인을 전화 인터뷰하는데도 반말을 시전하는 ‘분’이 꼭 있다. 그 ‘분’에게 꼬박꼬박 존댓말로 응대하고 전화를 끊고 나면 몇 분간은 불쾌함의 여운을 떨쳐내느라 시간을 보낸다. 위계에 대한 성찰이 없는 사람이 권력마저 가지게 되면 결례가 습관이 된다. “걸레”를 입에 담는 결례도 그렇게 나온다.

나는 간혹 주변인들에게 “그 사람 내 친구에요”라고 소개할 때가 있다. 그때마다 많이 받는 질문은 “두 분 동갑이었어요?”다. 난 동갑이어야만 친구가 되는 한국 문화에 소소한 저항을 하고 있다. 보다 적극적 저항을 한다면 한국 사회에서 ‘나이, 연차, 학번’을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는 캠페인을 전개하고 싶다.

한국 사회의 위계 사례를 늘어놓는 이유는 엉뚱해 보이지만 ‘정치 분야에서 청년 대표성을 강화하자’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다. 구체적으론 국회의원 비례대표의 30%를 청년에게 할당하자는 주장이다. 현행 선거법에선 비례대표가 47석이니 30%면 14석이고, 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된 선거법이 통과되면 비례대표가 75석으로 늘어나 30%가 23석이 된다. 선거법이 바뀌고 모든 정당이 이 주장을 받아들인다 해도 23석은 전체 국회의원의 8%도 되지 않는다. 

한국 정치에서 청년 문제가 의제화되지 않고 청년이 대표되지 않는다는 지적은 더 할 필요가 없는 얘기다. 정치란 누군가를 대변하는 일이다. 지금 정치는 어떤가. 2019년 유권자 4307만여명 가운데 45세 미만은 45.2%를 차지하지만, 45세 미만 국회의원은 전체의 6.3%에 지나지 않는다. 국제의회연맹(IPU) 조사 결과 45세 미만 청년의원 비율이 150개 조사 대상 국가들 가운데 143위다. 

▲ 2016년 4월11일 4·13 총선을 이틀 앞둔 국회에서 제20대 국회의원들에게 지급할 배지가 공개됐다. ⓒ 연합뉴스
▲ 2016년 4월11일 4·13 총선을 이틀 앞둔 국회에서 제20대 국회의원들에게 지급할 배지가 공개됐다. ⓒ 연합뉴스

물론 청년이 아니어도 청년을 대변할 수 있다. 실제로 민주당 내 몇몇 의원들이 비슷한 얘기를 한다고 한다. (관련기사 : 중앙일보) [여의도 인싸] 청년 의원은 2030을 대변할까? 여권의 ‘청년 공천’ 딜레마 04월15일) 문제는 한국의 문화가 이를 가로막는다는 점이다. ‘나이 위계’가 세대를 가로지르는 소통을 어렵게 한다. 386세대 중 편하게 생각을 물어볼 수 있는 스무 살 넘게 차이나는 친구가 있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386세대가 아니다. ‘386세대’는 단순히 같은 나이대를 지칭하지 않고 비슷한 특징을 가지는 동류 집단을 의미하고, 그 중 하나가 세대를 가로지르는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다. 

한국에선 정치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나이순으로 차곡차곡 직급이 배열되는 편이다. 국회의원은 50~70대, 보좌관은 40~50대, 비서는 20~30대가 맡듯, 기업에서도 임원은 50대 이상, 부장과 차장은 40대가, 대리와 사원은 20~30대가 맡고 있다. 

어차피 지금의 20~30대도 나중에 임원이 되고, 좋은 자리에 갈 것이 아니냐는 문제제기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이철승 서강대 교수가 쓴 ‘세대, 계급, 위계’ 보고서는 1960~1969년생들이 2010년대에 이전 세대가 같은 나이 대에 그랬듯 100대 기업 임원진의 60%대를 차지하지만, 이 흐름이 최근에 끊겼다고 전한다. 1970~1974년생은 2017년에도 전체 임원의 9.4%를 차지할 뿐이고, 50대와 60대 임원진 비율은 국회 장악률(83%)보다 높은 86%에 이른다고 지적한다. 

▲ 윤형중 LAB2050 연구원.
▲ 윤형중 LAB2050 연구원.

이것은 권력과 자원의 세대 이전이 지체되는 문제보다 심각하다. 사회에 시급성을 요하고, 심각한 정도가 각기 다른 문제들이 산적해 있고, 그 문제들에 영향을 받는 세대들은 각기 다르다. 특정한 문제에 긴밀히 영향을 받는 세대가 권력을 가질 때까지 문제 해결을 기다릴 수가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정부의 연금, 정년연장, 부동산 정책 등에 청년 목소리가 반영되고 있는가.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과 환경만 해도 세대 간에 다른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 한국처럼 세대를 뛰어넘어 자기 존재를 확장하는 정체성을 가지기 어려운 나라에선 인위적 조정이 더 절실하다.

김누리 중앙대 교수는 지난달 5일 한겨레 칼럼에서 “재벌개혁, 정치개혁, 교육개혁, 검찰개혁, 사법개혁을 결연히 감행”하여 “후세대에게 지옥을 넘겨주지 않는 것”이 “86세대에게 남겨진 마지막 시대적 소명”이라고 주장했다. 그 주장에 이렇게 반박하고 싶다. “그 문제들의 해결 주체가 자신들이 아님을 깨닫는 것이 86세대에게 남겨진 마지막 소명”이라고 말이다. 사회 문제를 한 세대가 해결하려는 인식 자체가 오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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