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시간으로 지난 5월 25일,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제72차 WHO(세계보건기구) 총회가 열리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의료 종사자만 신경을 쓸 소식이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IT와 게임계의 사람들이 총회 결과가 빠르게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대체 어떤 총회였기에 IT와 게임업계 관계자들이 숨을 졸이며 총회를 주목했을까. 다름 아닌 몇 년째 한국 게임계 초유의 관심사였던 ‘게임 장애’(Gaming Disorder)가 정식으로 질병 분류로 포함된 ‘국제질병분류 11차 개정안’(ICD-11)의 통과 여부가 결정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일찌감치 게임회사와 개발자, 팬, 그리고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을 비롯한 유관기관은 ‘게임 장애’가 ICD-11에 포함되는 것을 거세게 반대했다. 몇몇 우려와 달리 ICD-11에 ‘게임 장애’가 통과된다고 한 순간에 전세계 모든 국가에서 게임 장애가 질병으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ICD-11은 ‘제안’일뿐, 실제로 각 국가에서 ICD-11에 담긴 질병분류를 자신들의 국가에도 적용시킬 것인지는 다시 한 번 별도의 국가별 절차를 거쳐야 한다. 게다가 이미 몇몇 언론이 지적했듯, 단순히 게임을 오래 즐긴다고 ‘게임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니다. ICD-11에서는 최소 1년 이상 자기 자신이 게임을 즐기는 행위를 통제할 수 없으며, 게임이 다른 일상 생활의 행위들보다 우선시하며, 개인-가족-사회적-교육적-직업적 영역에서 심각성을 보일 때 ‘게임 장애’라 진단을 내릴 수 있다고 규정을 하고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ICD-11에 ‘게임 장애’가 포함되는 순간, 한국을 비롯한 각 국가별로 ‘게임 장애’를 논의하는 일이 발생할 수 밖엔 없다. 게임계는 이러한 상황에 우려를 표했고, 국제적 반대 운동을 펼쳤다. WHO 총회 B위원회에서는 ICD-11을 단 하나의 반대나 기권표도 없이 만장일치로 찬성했다. 그렇게 ICD-11에서는 공식적으로 ‘게임 장애’가 하나의 단독적인 질병 분류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에 많은 게임 단체들과 개발자, 그리고 게임 언론들은 분노에 가득차 있다. 몇몇 인물은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게임에 적대적인’ 동아시아 국가들의 로비로 ICD-11에 게임 장애가 증재되었다는 음모론을 내세우기도 했다. 동시에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ICD-11의 결정사항은 각 국가별로 별도의 등재 과정을 거쳐야 하기에, 한국의 질병코드 분류안인 KCD(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만이라도 게임 장애가 등재되지 않기 위한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미 게임계는 WHO의 게임 장애 질병코드 등록에 반대하는 행동을 빠르게 드러내고 있다. 5월 27일에는 한국을 비롯한 미국, 유럽, 캐나다, 호주 등 전세계 게임산업협단체들이 WHO에 재고를 촉구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으며, 이어서 5월 28일에는 한국게임개발자협회-한국인디게임협회-스마트폰게임개발자그룹, 그리고 근래 설립된 민주노총 화학섬유노조 산하의 게임사 노조들(넥슨, 스마일게이트 등)을 비롯한 게임 제작자 단체들이 공동으로 WHO를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5월 29일에는 한국게임학회, 한국게임산업협회를 비롯한 90여개 단체가 ‘게임질병코드 도입 반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발족하며 국회의원회관에서 장례식 퍼포먼스를 펼쳤다. WHO가 ‘게임을 죽였다’는 의미였다.

▲ '게임 문화 게임 산업' 근조 현수막 걸린 공대위 출범식.  29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게임질병코드 도입 반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출범식에서 참석자들이 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하사헌 기자
▲ '게임 문화 게임 산업' 근조 현수막 걸린 공대위 출범식. 29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게임질병코드 도입 반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출범식에서 참석자들이 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하사헌 기자

분명 게임계의 날선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1980년대 중후반 미국에서는 아타리(Atari), 일본에서는 닌텐도 패밀리컴퓨터(약칭 ‘패미컴’, 한국에서는 현대전자-현, SK하이닉스-에서 ‘현대 컴보이’로 발매.)로 본격적으로 싹이 터오른 비디오 게임 붐은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화려한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동시에 사회와 기성 세대로부터 많은 질타에 시달려야 했다. 폭력적이며 선정적인 요소가 가득한 게임이 한창 성장할 시기의 아동과 청소년을 불량하게 만든다는 이유였다.

특히 한국의 경우는 1990년대 중후반 사전검열이 위헌으로 판정나기 전까지는 게임이 번번이 공연윤리위원회로 대표되는 검열 기관의 타깃이 되었다. 최신 문화, 서브컬쳐를 반가워하지 않는 세대들은 만화 등과 더불어 게임을 하찮은 것으로 쉽게 취급했다. 이러한 정서는 과거에 비하면 줄었지만 2010년대 현재에도 엄연히 존재한다. 게다가 2011년에는 청소년보호법의 개정으로 ‘게임 시간 선택제’, 소위 ‘셧다운제’라 불리는 청소년의 야간 게임을 제한하는 골자의 법이 통과되며 많은 논쟁이 있었다. 그 이후로도 결국 통과되지 않았지만 알코올 등과 함께 게임을 ‘중독 물질’로 지정하는 골자의 법, 중독 예방을 이유로 매출액의 일정액을 강제 징수하는 취지의 법이 입법되며 게임계는 무수한 충돌에 휘말렸다. 이러한 과정을 직접 거친 게임계의 사람들에게 WHO 차원의 ‘게임 장애’ 등재 소식에 절대 기분이 좋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한국의 몇몇 이들이 게임을 껄끄럽게 바라보는 시선이 존대한다는 사실을 곧 몇몇 이들의 퍼포먼스대로 ‘한국 게임은 죽었다’는 내용으로 연결시킬 수 있을까. 한국 게임계는 지금까지 게임을 불온하거나 불량한 매체로 바라보는 시선에 맞서 ‘게임은 문화’이며, 동시에 다양한 문화 산업 중 게임의 수출액이 가장 많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2018년 대한민국 게임백서’를 기준으로 2017년 한국 게임 산업의 수출액은 약 6조 6천 980억원이다.) 하지만 정말로 한국 게임사들은 게임을 ‘문화’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해왔는가. 그리고 ‘수출액’이 많은 이유만으로 게임을 나쁘게 취급하지 말아달라는 주장은 얼마나 효용성이 있을까?

당장 셧다운제가 통과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자. 본격적으로 셧다운제 문제가 수면에 올라온 것은 2009년경이지만, 처음으로 시민단체에서 셧다운제 도입을 요구하는 주장이 나온 것은 2004년이었다. 지금은 여성가족부 산하지만 당시에는 문화관광부 소관의 위원회이자, 청소년보호법 관련 업무를 수행하는 기관인 ‘청소년보호위원회’는 2004년부터 청소년 ‘수면권’ 침해의 심각성과 온라인 게임 사이의 연관 관계를 살펴보는 연구를 수행했다. 서서히 그 당시부터 게임에 지나치게 ‘과몰입’(‘중독’)되는 바람에 아이들이 수면에 피해를 입는다는 이야기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2005년에는 KBS ‘추적 60분’이 온라인 게임의 문제점을 집중분석하는 내용의 취재분을 방송했고, 그 이후로도 셧다운제의 도입으로 청소년의 수면권을 보장하자는 주장이 다양한 공청회와 토론, 그리고 연구 용역을 거쳐 서서히 기반이 마련되었다.

셧다운제 도입을 추진하는 이들이 발빠르게 움직이는 동안, 정작 게임계는 반대 성명을 제시하는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저 셧다운제 도입 시도는 게임 진흥을 막는 걸림돌이며, 부당한 주장이라는 원론적인 입장만 반복했을 뿐이다. 게임계의 주장이 그저 말에 그칠 때, 셧다운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5년 간 꾸준하게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와 여론을 마련했다. 2009년 셧다운제가 거세게 공론화된 이유는 정치권과 여성계가 합작하여 게임계를 공격한 배후의 음모가 아니라, 꾸준하게 활동하며 공의를 모은 셧다운제 추진 측의 단계적인 행동 덕분이었다. 동시에 그 사이에 아무런 행동이나 캠페인도 벌이지 않은 게임계의 게으름도 컸다.

▲@pixabay
▲@pixabay

게임계의 게으름은 이뿐만이 아니다. 2000년대 초중반을 거치며 ‘정액제’가 대세였던 한국 온라인 게임이 무료로 게임을 즐기게 하는 대신 ‘유료 아이템’ 판매를 도입한 ‘부분 유료화’가 대세가 되며 수익이 빠르게 증대했고, 여기에 해외 수출이 본격적으로 물살을 타며 넥슨-NC소프트를 비롯한 1세대 온라인 게임 개발사는 물론 한국 게임 산업 전반이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같은 시기, 시민단체들은 게임사가 게임 내에서 판매하는 ‘유료 아이템’이 도박적인 속성이 있음을 지적하며 반대하는 입장을 내놓았다. 셧다운제에 대한 요구가 처음 나온 2000년대 중반에 함께 나온 주장이었다. 특히 2006년 YNK코리아 사의 온라인 게임 '로한'이 도박 ‘바카라’를 연상케 하는 아이템 확률 추첨으로 큰 논란이 일며, 게임 심의 및 등급 분류기관인 ‘게임물등급위원회’(현 게임물관리위원회)가 시정을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바뀐 것은 별로 없었다. 날이 갈수록 유료 아이템을 판매하는 방식과 아이템의 확률 추첨 방식은 더욱 교묘하게 발전했고, 이러한 사업 모델은 해외에도 절찬리에 보급되었다. 마침내 2010년대 이후로 이러한 게임의 확률형 아이템이 ‘사행성’의 소지가 있다는 비판이 전세계적으로 제기되었고, 급기야 일본, 중국, 벨기에 등의 국가에서는 이 문제가 사회적 문제가 되자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규제에 나선 상황이다. 한국 역시 확률형 아이템을 규제하는 법안이 지속적으로 논의되자, 그제서야 업계는 ‘자율 규제’를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실질적으로 바뀐 것은 여전히 크지 않다. 정부와 국회, 시민단체는 물론 게임 팬들의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다.

어디 그뿐인가. 한국 게임계는 내적으로는 물론 외적으로도 이미지 관리에 실패했다. 2016년에 실체가 드러난 넥슨-진경준 게이트, 2017년에 불거진 전병헌 전 국회의원 겸 한국이스포츠협회(KeSPA, 케스파) 회장의 비리 의혹은 게임계가 이미 정권과 유착되며 비리를 저지를 수 있음을 드러냈다. 게다가 이 두 비리 사건은 모두 사적인 이익만을 추구할 뿐, 단 한 번이라도 게임계 전반을 위한 로비는 없었다는 사실까지 드러나며 한국 게임이 공동의 이익을 위해 거의 뭉치고 있지 않음을 씁쓸하게 입증하는 단적인 사건이 되었다.

더 나아가서 한국 게임계는 게임계가 소수자 혐오 문제나 노동 문제에 지극히도 무관심함을 스스로 자인했다. 2016년 넥슨 사의 온라인 게임 ‘클로저스’에 목소리로 참여한 성우 김자연이 자신의 트위터로 페미니즘과 연관된 문구를 올리고, 더 나아가서는 페미니즘 글귀가 박힌 티셔츠를 입어 인증샷을 찍었다는 이유로 일부 팬들의 거센 항의를 받고 계약이 해지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에 웹툰을 그리는 작가들, 프로그래머나 e스포츠 캐스터를 비롯한 게임계 관계자들이 항의하자 혐오적인 공격은 다시 이들에게 가해졌다.

▲넥슨의 '티나' 캐릭터는 목소리가 교체돼 '업데이트'됐다. 사진=넥슨 홈페이지
▲2016년 7월 넥슨은 넥슨의 '티나' 캐릭터의 성우가 트위터에 페미니즘 연관 문구를 올렸다는 이유로 목소리를 교체해 업데이트했다. 사진=넥슨 홈페이지.

그리고 그 공격을 게임사들은 방어하거나 적절히 대처하는 대신,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소수자 혐오에 편승했다. 나이스게임TV에서 근무하며 게임을 중계했던 김경우(닉네임 ‘에스페란자’) 캐스터를 비롯한 이들이 ’페미니즘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계약이 해지되거나 부당하게 해고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러한 흐름은 2018년에도 그대로 이어지며 ’악튜러스‘, ’라그나로크 온라인‘, ’그라나도 에스파다‘를 개발한 스타 개발자 김학규가 페미니즘 문구를 쓴 자사 직원에게 페미니즘이 ’사회적 분열과 증오를 야기하는 반사회적 논리‘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등 사실상 사상 검증에 가까운 발언을 공개적으로 내뱉으며 큰 지탄을 받았다. 인기 리듬게임 DJMAX 시리즈의 최신작 ’DJMAX RESPECT’를 만든 기획/개발자 백승철(닉네임 ‘BEXTER’)은 공식 SNS 계정을 통해 페미니즘 관련 문구를 공유한 일러스트레이터가 무수한 공격을 받자, ‘팬들이 더 이상 속상해하고 마음이 아파하는 모습을 원치 않는다’는 이유로 교체를 시사해 큰 파장이 일었다. 결과적으로 일러스트레이터 교체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게임 개발사의 인권 감수성이 심각한 수준으로 낮음을 보이는 일련의 사건이었다.

게다가 게임 개발사 상당수는 별명이 ‘구로의 등대’, ‘판교의 등불’이라는 명칭이 불릴 정도로 고강도의 야간-장시간 노동이 고착화 되어 있다. 이는 게임 산업의 특성상 한국 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도 빈발하는 문제지만, 한국은 여기에 ‘포괄 임금제’ 문제가 추가적으로 덧붙으며 야간-초과 근무에 대한 제대로 된 수당도 받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넷마블에서는 게임 개발자가 89시간 연속 근무 끝에 사우나에서 과로로 사망하는 사건이, 그 이후에는 다른 게임 개발자 한 명이 투신자살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후로도 위메이드에서는 직접적으로 게임 개발자의 야간-장시간 노동을 촉구하는 발언이 외부로 유출되며, 스마일게이트에서는 열악한 게임 개발 환경에 문제를 제기하고 노조 설립을 추진한 직원을 권고 사직으로 내쫓은 사건이 폭로되며 한동안 문제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에 넥슨, 스마일게이트, 네이버 등에서 노동조합이 설립된 상황이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바뀐 것은 크지 않았다. 오히려 게임 언론사들은 더욱 혐오와 차별적인 언행을 확대 재생산하며 자신들에게 심각한 문제적 인식이 있음을 멀리 전달하기에 바빴다. 제우미디어의 게임 웹진 ‘게임메카’는 블리자드 사의 인기 게임 ‘오버워치’의 간판 캐릭터 ‘솔져:76’이 동성애자라는 설정을 전하며, ‘정치적 올바름을 위한 것이 아니냐는’ 혐오적인 주장만 크게 강조해 보도하며 물의를 일으켰다. (관련기사 : 게임메카 ‘솔져도 동성애자였다, 오버워치 또 다시 성소수자 설정 논란’) 그리고 또 다른 게임 웹진 ‘인벤’에서는 미국의 한 게임 개발자가 열악한 게임 노동 환경으로 인해 질 좋은 게임을 만들기 어렵다는 토로를 한 것에 대해, ‘왜 우리가 당신들 사정까지 신경 써야 합니까?’라는 제목을 달며 좋은 게임이 제작되지 못한 것에 노동 환경 등을 드는 것은 변명이거나 의미가 없다는 투의 기자 칼럼을 작성해 큰 논란을 만들었다. (관련기사 : 인벤 ‘왜 우리가 당신들 사정까지 신경 써야 합니까?’)

분명 한국 게임계에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셧다운제나 확률형 아이템 문제가 본격적인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기까지 최소 5년 이상의 시간이 존재했다. 하지만 움직임은 없었고, 뒤늦게서야 셧다운제의 부당함과 확률형 아이템 규제의 문제를 말하고 다녔을 뿐이다. 그 이후로도 게임계는 말은 많지만 그 말이 실제 행동과는 이어지지 않는 일을 끊임없이 벌였다. 도리어 스스로 비리, 혐오적 행동, 노동 탄압 등 이미지를 올리기는커녕 계속 망치는 행동만 끊임없이 반복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게임에 대해서 원래부터 애착이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대체 누가 한국 게임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지난 2월 영국의 옥스퍼드대-카디프대가 공동으로 연구한 ‘게임과 10대 폭력성 사이 상관 연구’의 결과는 한국 게임계에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많은 게임계 인사의 주장대로 ‘게임 콘텐츠’가 곧 10대의 폭력성으로 이어지는 근거는 희박했다. 대다수의 언론들은 딱 이 지점까지만 보도했다. 그러나 해당 연구는 여기서 끝이 나지 않았다. 분명 ‘게임 콘텐츠’는 연관성이 적을지도 몰라도, 그 대신 ‘게임 커뮤니티’로 보면 사정은 달라졌다. 게임이 분노적인 감정과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여지가 있으며, 그로 인해 다시 게임 커뮤니티에서 경쟁 심리, ‘트롤링’(trolling, 의도적인 관심 및 분노 유발 행위) 등 ‘반사회적 행위’는 엄연히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연구는 추가적으로 담고 있었다. 한국 게임 상당수가 온라인 게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게임 커뮤니티의 문제점을 지적한 이 연구는 어떤 의미로는 한국 게임 전체와도 연결이 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한국 게임계에 필요한 것은 숨을 고르고, 과거의 역사를 바라본 뒤 다시 자신의 주변을 바라보는 ‘성찰’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 한국 게임계는 PC용 1인 게임 시장을 포기한채 온라인 게임으로 방향을 전환하며 호황을 맞이했고, 그 덕분에 막대한 게임 산업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게임 산업의 외형적인 크기는 키웠지만 정작 그 안에 담긴 문화도, 내부에서 통용되는 기준도 제대로 세우지 못했다. 그리고 질적인 요소를 신경쓰지 못한 결과는 이렇게 다시 부메랑처럼 되돌아 오는 상황이다.

이미 많이 늦었지만, 아주 조금이라도 시간은 남아 있다. 진작에 신경쓰며 고민했다면 지금보다는 상황이 나았겠지만 어쩌겠는가. 찰나의 ‘골든 타임’이라도 소중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게임계 외부와 계속 대화의 장을 만들고, 당장의 수익에만 매몰되지 않는 환경을 함께 구축하고, 노동-젠더-장애 등을 비롯한 다양한 소수자 정체성을 고민해야 한다. 허나 아직까지도 한국 게임계에서는 그저 WHO의 질병 코드 등재에 분노만 할 뿐, 자기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성찰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은 듯 하다. 진정으로 한국 게임을 망치는 것은 WHO인가, 여성가족부와 페미니즘 사상인가, 아니면 게임계 자기 자신들인가.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