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 감독, 취재, 촬영 등. 장르를 막론한 방송프로그램 제작진과 출연진은 언제나 소수의 이름으로 대표된다. 시청자들에게 보이지 않는 방송작가들의 노동력은 쉽게 지워진다. ‘당신은 법적 노동자가 아니다’라는 마법의 언어는, 밤낮과 휴일을 가리지 않고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던 팀 안에서 하루아침에 방송작가들의 노동권과 인권을 지우기도 한다. 사회의 비리를 고발하는 방송사에서도 이들은 늘 지워지고 있다.

국회를 방문한 방송작가들이 정부, 정치권, 언론을 향해 방송작가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나서달라고 촉구했다. ‘방송작가유니온’이라는 별칭으로 더 친숙한 전국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지부장 이미지)가 3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정의당과 방송작가 노동권 보장을 위한 간담회를 가졌다. 이미지 지부장은 “대한민국 방송사에 수많은 시사프로그램이 있지만 어두운 지점이 방송작가 문제 아닌가 싶다”며 “2019년 5월 이 시점까지 여전히 방송작가들은 구두계약으로 ‘내일부터 일하자, 얼마줄게’라는 말을 듣고 일한다. 이제는 비정상의 정상화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프리랜서라는 이유로 기본 노동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방송작가들은 스스로를 “업무 실질은 상근인 ‘위장된 프리랜서’가 상당수”라 말한다. 방송작가유니온이 전국 방송작가 580명을 대상으로 4월22일~26일까지 온라인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방송작가 93.4%는 프리랜서 형태로 고용돼있지만 72.4%가 방송사나 외주제작사로 출·퇴근하며 상근 형태로 일했고, 서브·막내작가 상근 비율은 79.4%에 달했다. 실제 대다수 구인 공고도 ‘상근’을 명시하고 있다.

노동시간을 기준으로 보면 노동법 적용 예외 대상인 주 15시간 미만 초단시간 노동자는 11.4%에 그쳤다. 주 40~52시간 근무한다는 응답이 28.6%, 법정근로시간인 주 52시간을 넘어 68시간까지 일하는 경우가 26.4%, 68시간 이상도 7.9%로 나타났다. 그러나 4대 보험에 가입한 응답자는 3.1%, 시간 외 수당을 받은 경우는 2.8%, 퇴직금을 받은 사례는 1.8%에 불과했다. 병가를 쓰지 못해 아픈 걸 참고, 119가 올 때까지 자막을 뽑은 사례들이 속출하는 이유다.

박지혜 방송작가유니온 사무차장은 “노조 출범 후 ‘막내작가 최저임금 받기 운동’을 했다. ‘막내작가의 경우 일 가르치는데 왜 돈을 줘야 하냐, 너희가 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얘기까지 듣곤 했다”며 “이런 상황에서 개인이 최저임금을 달라고 요구하기조차 싶지 않다. 실제 한 지역 조합원은 지난해 기준 월 120만원을 받는데, 편의점 알바를 해도 157만원 받는다며 임금인상을 요구했더니 ‘작가는 노동자가 아니라 최저임금 안 맞춰도 법적 문제 없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호칭에서부터 시작되는 차별은 방송작가들을 구조적 을에 가두고 있다. 박 사무차장은 “신입PD나 조연출에게는 ‘신입’, ‘야 막내’라 부르지 않는다. 연출팀 내에서 막내라 불릴지라도 작가처럼 모든 직군에게 막내라 불리거나, 내 직업이 막내가 되지는 않는다. 여초직군 방송작가 막내는 암묵적으로 조직 내 서열 최하위로 시키면 뭐든 해야 하는 분위기가 조성된다”고 설명했다. KBS의 경우 작가들을 프로그램 엔딩 스크롤에 ‘자료조사’로 표기해 업무 전문성을 지우고, YTN의 경우 ‘프리랜서’라고 부르는 사례들도 지적됐다.

프리랜서라는 고용 형태가 해고를 남발하고 정당화하는 관행도 문제다. A작가는 “내일 녹화 준비하는데 우리 몰래 뒤에서 다른 작가들을 꾸리고 있었다는 걸 작가협회 구인공고 통해 알게 됐다. 작가 7명 중 누구도 그만둬야 하는 걸 모르는 상태였다. 조율을 했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했지만 ‘프리랜서인데 우리가 자를 수 있는 게 아니냐’고 하더라”며 “모 종편 채널 담당 PD가 ‘내가 메인작가보다 돈을 덜 벌어도 정규직하는 이유가 너희처럼 잘리지 않으려고 하는 거다. 아쉬우면 너희도 정규직 하라’는 식으로 얘기했다”고 토로했다.

A작가는 불합리한 임금 지급 체계나 방송가에 만연한 성희롱 문제들도 지적했다. 파일럿이나 시즌제 프로그램이 늘어나면서 프로그램을 기획·준비하는 3~4개월 동안 받아야 할 돈의 30~40%만 받고, 정작 제대로 된 임금을 받는 기간은 단 2주에 그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 여성 작가들을 대상으로 “너희가 못생겨서 잘린 거다” 혹은 “너희가 예뻐서 뽑았다. 이전 작가들은 못생겨서 잘랐다”는 등 성희롱은 일상적 피해다.

SBS 시사고발프로그램 ‘뉴스토리’ 부당해고 사례는 작가들이 처한 고용불안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B작가는 “지난해 2월 계약서 쓴 지 2주만에 부당해고 당했고 문제를 공론화하는 과정에서 충격을 받았다. 15년 만에 이런 일을 처음 겪었는데, 이런 일이 비일비재한데 유난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는 “작가들이 단체행동에 나서서 기사화된 뒤 SBS 사과를 요구했는데 ‘억울하면 소송하라’는 반응이었다”며 “법적으로 보호받을 장치가 아무 것도 없고 소송하려면 민사로 가야 하는데 수년의 소송기간을 버틸 수 있는 작가는 없다”고 말했다. “문제가 공론화되면 작가들이 찍혀서 목소리를 못낸다는 상황을 귀신같이 알고 악용하는 사례”다.

B작가는 이어 “SBS 보도국에서 정의로운 기자들과 일하는 작가들이 이렇게 부당해고 당했다고 하는데, 분명 보도할 수 있는 내용인데 객관적으로 법적으로 다툴 문제이지 정의의 문제는 아니라는 이중적 태도에 굉장히 실망했다”며 “내가 겪은 보도국, YTN, 연합뉴스TV, 종합편성채널 등 나름 사회정의 실현하겠다는 곳들에서 프리랜서, 특히 작가들에 대한 태도에 굉장히 많은 실망감을 느낀다”고 전했다.

▲ 30일 국회에서 정의당 주최 방송작가 노동권 간담회를 마친 방송작가들과 이정미 대표 등 정의당 관계자들이 '밤낮 없이 일하는' 방송 작가들의 노동권 개선 촉구를 의미하는 퍼포먼스를 하며 기념촬영하고 있다. 사진=노지민 기자
▲ 30일 국회에서 정의당 주최 방송작가 노동권 간담회를 마친 방송작가들과 이정미 대표 등 정의당 관계자들이 '밤낮 없이 일하는' 방송 작가들의 노동권 개선 촉구를 의미하는 퍼포먼스를 하며 기념촬영하고 있다. 사진=노지민 기자

17년 동안 지상파 방송작가로 일해온 C작가는 “방송작가라는 직업은 미혼여성들 노동력을 갈아서 만들어지는 셈”이라며 여성이 절대다수인 방송작가 직군에 전무한 모성권 보호 문제를 지적했다. 지난 2016년 방송작가 실태조사 표본 633명 중 여성은 94.6%인 599명, 연령대는 624명 중 73.2%로 20대가 가장 많은 반면 40대는 0.7%, 배우자가 있는 경우는 6.75%에 불과했다.

미혼 여성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이유로는 잦은 밤샘 등 노동강도가 꼽힌다. 지난해 방송작가유니온 조사에서 자유롭게 임신을 결정할 수 있다는 응답은 29.2%, 유급으로 출산 휴가를 사용해봤다고 밝힌 방송작가는 단 1명. C작가는 “현직 유명 지상파 프로그램 작가로부터 제보가 들어왔다. 임신을 했는데 프로그램 팀 아무에게도 이야기를 못했고, 배가 부를 때까지 가리고 다니다가 나중에 정 안 되면 얘기하려고 한다더라. 방송사에 굉장히 돈 많이 벌어다주는 프로그램”이라며 “이런 현실에서 누가 출산을 하겠나. 정부, 정치권, 방송사는 지금이라도 모성보호권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윤정 방송작가유니온 부지부장은 “신입작가, 여성 청년 비정규직을 방송사들이 프리랜서로 규정해서 쓰는 거 자체가 문제다. 변화는 가장 낮은 고리부터 시작해야 한다. 신입작가들을 대상으로 방송사가 제대로 된 근로계약 체결부터 시작하며 문제를 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이름만 특수할 뿐 전혀 특수하지 않은 특수고용근로자 노동권 개선은 문재인 대통령 공약이기도 하다. 소중한 움직임으로 문화체육관광부의 표준계약서 제정과 권고가 이뤄졌으니 이제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며 “문화체육관광부, 고용노동부, 방송통신위원회 등이 전방위적으로 나서서 자신 고통에 숨죽여야 하는 부조리를 이제 끝내야 한다”며 “모자람 없도록 뼈를 때려달라. 열심히 듣고 실천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대표는 “정의당과 방송작가유니온은 남다른 인연이 있다. 2년 전 고 노회찬 대표가 수행 없이 홀로 방송작가유니온 출범식에 참석해 축하해줬을 만큼 생전에 애틋하게 여겼던 노동조합이라는 기억이 난다. 노회찬재단에서도 첫 후원금 지원 대상에 방송작가유니온을 포함시켰을 만큼 양쪽이 누구보다 끈끈한 연을 이어왔다고 생각한다”며 “그런 특별한 인연 때문에라도, 정의당은 여러분의 노동권 확보에 강한 책임감을 갖고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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