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한국영화·한국인 최초다. AFP통신은 이 소식을 전하며 “봉준호 감독은 박근혜 정부 때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에 오른 인물”이라고 보도했다. 앞서 봉 감독은 2년 전 한 인터뷰에서 “몇 년 동안은 상당히 악몽 같은 기간이었다. 한국 예술가들이 블랙리스트 때문에 깊은 트라우마에 시달렸다”고 말했다.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은 27일 이 같은 발언을 인용하며 “봉준호 감독 같은 세계적 감독이 그런 얘기를 할 정도였으니 다른 예술가들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동안 블랙리스트로 인해 암흑 같은 시간을 견뎌내야 했던 봉준호 감독, 다른 예술가들에게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며 “앞으로는 그런 일이 절대 없어야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JTBC 보도화면 갈무리.
5월 26일자 JTBC 보도화면 갈무리.

그러나 특정 문화·예술인을 마치 ‘기생충’처럼 취급·분류해 차별·배제했던 블랙리스트 사태는 떠들썩했던 언론 보도와 달리 △책임자 처벌 △피해자 명예회복 및 보상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개선 등 주요한 후속 조치가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미디어오늘이 최근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가 작성한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 제도개선 권고 이행현황 보고서’를 확인한 결과 진상조사위가 지난해 5월 확정한 85건의 권고과제 중 문체부 스스로 과제를 완료했다고 밝힌 것은 총 46건(2019년 4월 말 기준)으로, 문화행정 투명성 강화 차원의 △제도변화 △조직개편 △선언적 협약이 주를 이뤘다.

헌법개정을 통한 표현의 자유 및 문화기본권 확대 권고의 경우 장기과제로 분류됐고, 책임자 처벌 법적 근거 마련 권고의 경우 토론회 수준의 의견수렴에 그쳤다. 피해자 명예회복과 피해보상도 ‘검토 중’으로 분류되는데 머물렀다. 문체부 조직 개혁을 통한 소속기관 자율성 및 전문성 확보 권고의 경우 문체부 내 ‘예술인권익과’ 신설 검토 정도가 가시적 움직임이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영화진흥위원회의 공공기관 운영법 적용 예외 추진의 경우도 지난 1월30일 ‘기타 공공기관’으로 변경되었으나 법 적용 예외는 역시 ‘검토 중’이다. 문체부는 보고서를 통해 ‘참여와 협치에 기반한 문화행정 평가 및 환류 체계 구축’을 완료했다고 밝혔으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완료했는지는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양구 이행협치추진단 민간위원은 문체부의 이행 보고서를 두고 “세부 과제별 이행현황에 대한 세부 점검이 어렵다”고 꼬집으며 △정부 차원의 블랙리스트 사태 해결 의지 부재 △전면적인 문화행정 혁신의 부재 △대통령의 책임 인정과 사과 부재 △피해보상에 대한 논의 부재 등을 지적했다. 앞서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가 꾸려졌으나 자유한국당의 방해 속에 1년간의 조사는 어려움을 겪었고 이후 제도개선을 위한 이행협치추진단이 조직되었다.

이행협치추진단 민간위원인 정윤희 문화민주주의실천연대 공동운영위원장은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블랙리스트 문제가 다 해결된 것처럼 언론을 통해 나가고 있지만 지금껏 제도개선은 굉장히 미흡하다. 정부 사과도 형식적이었다. 민간위원들에게 전달되는 정보도 제한적이다”라며 현 상황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정윤희 위원장은 “블랙리스트 사태는 진상조사부터 미진했고 책임규명은 안 됐다. 블랙리스트 방지와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필요하지만 지금 블랙리스트 책임자들은 검찰에 기소조차 되지 않은 상황”이라고 밝혔다.

SBS의 문체부 블랙리스트 단독 보도화면 갈무리. 언론도 블랙리스트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SBS의 문체부 블랙리스트 단독 보도화면 갈무리. 언론도 블랙리스트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김소연 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 제도개선팀장은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문체부) 보고서 자체가 굉장히 부실해서 문제를 짚기 어려울 정도”라고 평가하며 “국가예술위원회 추진이나 헌법개정처럼 문체부가 단독으로 추진하기 어려운 권고안에 문체부는 장기과제로만 설정했을 뿐 어떤 과정으로 (장기과제를) 풀어낼지 논의조차 하지 않는 상황”이라고 비판했다. “(제도개선) 목표와 무관한 사업을 가져온 뒤 달성됐다는 식의 대목도 있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문체부가 보고서에서 △국가의 책임 인정과 사과 △책임자 및 가해자 처벌 등의 권고 과제를 완료했다는 대목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블랙리스트 피해자 중 일부는 여전히 대통령의 공식 사과를 요구한다. 특히 책임자 처벌의 경우 문체부는 ‘자체징계 및 수사의뢰’로 과제를 완료했다고 밝혔으나 블랙리스트 피해자 상당수는 책임자 대부분이 처벌받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지난해 진상조사위는 블랙리스트 책임규명을 위해 26명 수사의뢰, 105명 징계 권고를 의결했다. 그러나 문체부가 법률검토를 거친 뒤 징계 대상자는 급격히 줄었다. 징계시효 경과 등 사유로 징계처분 대상을 벗어난 직원도 13명이었다. 당시 이원재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 대변인은 “131명의 처벌을 권고했는데 수사의뢰를 제외하면 그냥 주의만 12명 주겠다고 한 것으로 사실 단 한 명도 징계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정윤희 위원장은 “블랙리스트 피해자들은 정부를 상대로 민사소송에 나섰으나 정부는 1심 패소 후 항소에 나섰다”고 비판했다. 앞서 1월24일 국내 첫 ‘블랙리스트’ 국가배상 1심 선고가 나왔다. 청주지법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의 국가책임을 인정하며 “개인 2명과 단체 2곳에 각 2000만원을, 나머지 원고 23명에게 각 1500만원 등 모두 4억 2500만원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판시했다.

이 같은 비판여론과 관련, 김정배 문체부 문화정책실장은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최선을 다해서 매듭을 풀려고 노력 중이다. 이행 협치단을 매달 가동하고 있다”고 답했으며 “진상조사위 활동도 지난 2월 7권 분량의 백서로 냈다. 책임자 처벌은 사법당국의 영역이다. 지난해 7명을 수사 의뢰했으나 아직까지 기소 여부도 결정되지 않았다. 우리도 답답하다”고 말했다.

김정배 문화정책실장은 대국민 사과 요구와 관련해선 “도종환 장관이 2018년 12월31일 사과했다. 대통령 사과를 요구하는데 대통령께서 갑자기 사과하면 뜬금없지 않겠나. 무언가 계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블랙리스트 건으로 기소된 김기춘·박근혜씨가 유죄를 선고받거나 블랙리스트 방지 관련법이 제정되는 날 대국민 사과를 하는 식의 상징적 계기가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민사소송 항소 결정에 대해선 “(박근혜정부) 블랙리스트 사례만 1만건인데 소송은 전국 여러 곳에서 진행 중이다. 다른 판결에서 청주지법과 똑같은 판결이 나온다는 보장이 없다”고 답했다. 보상이 빠르게 이뤄지면 좋겠지만 큰 사안인 만큼 다른 판례들을 보고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의미다. 김 실장은 “항소는 법무부 의견이었다. 문체부 권한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블랙리스트 관련 특별법 필요성에는 “김영주 의원이 대표 발의한 법안을 블랙리스트 방지법이라 불러도 무방하다”는 말로 대신했다. 앞서 김영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4월19일 ‘예술인의 지위 및 권리보장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김 의원은 “이른바 ‘블랙리스트 사태’와 ‘예술계 미투 운동’ 등 예술인의 지위와 권리를 침해하는 사태가 연이어 발생하여 많은 예술인들이 직·간접적 피해를 봤다”며 입법 취지를 밝혔다.

해당 법안에는 △예술표현의 자유는 보호되어야 하고, 예술인은 노동과 복지에 있어 다른 직업과 동등한 지위를 보장받으며 성 평등한 예술환경에서 활동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예술을 검열하거나, 정당한 이유 없이 예술 활동의 성과를 전파하는 활동을 방해하는 행위를 해선 안 된다 △예술지원에 있어 투명성·공정성 등을 확보해야 한다 등의 내용을 담았다. 하지만 해당 법안이 언제 제정될지 역시 기약이 없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