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에어’ 불이 들어왔다. “자, 음악 소리 올라가고.” PD 역할 어제원씨(66)가 말했다. 엔지니어를 맡은 이승철씨(33)가 조심스럽게 바를 올린다. “이제 줄이고, 멘트 큐!”

“민지씨 최근에 무슨 영화 봤어요?” 진행자 노동주씨(37)의 오프닝 멘트다. 동료 진행자 조민지씨(29)가 당황했는지 말을 하지 않아 적막이 이어졌다. 어제원씨가 나선다. “동주, 멘트는 좋은데 대본에 없는 거 물어보니까 깝깝해불지. 자 다시허자.”

“요즘 어벤저스라는 영화가 대박인데요.” “네 저도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시각장애가 있어서 외국영화를 보기 어려워요. 시각장애인들도 외국영화를 편하게 보는 날이 왔으면 합니다.” 이번에는 순조로웠다.

광장제작단의 녹음 현장. 왼쪽부터 이사랑, 조민지, 노동주, 전세빈, 노선호씨.
광장제작단의 녹음 현장. 왼쪽부터 이사랑, 조민지, 노동주, 전세빈, 노선호씨.

지난 4월27일 오전, 광주 시청자미디어센터의 장애인 제작단(광장제작단) 라디오 녹음 현장을 찾았다. 이들이 제작하는 콘텐츠는 ‘이야기가 흐르는 은하수 다방’, 줄여서 ‘이은다’다. 장애인과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날 주제는 ‘문화생활’이다.  

광장제작단은 광주 시청자미디어센터의 강사지원사업을 계기로 지난 4월 설립했다. 제작단 다수는 시각장애인이며 뇌병변, 지적장애인도 있다. 이날은 역량강화교육의 일환으로 실습 녹음을 했다.

교육 단계라 중간 중간 강사들이 지도한다. NG가 이어지자 이성균 강사(36)가 상황 정리에 나섰다. “취지에 어긋나게 말할 때가 있어요. 그런 건 자제해주시고. 동주형은 진행자니까 말을 너무 많이 하지는 말고, 대신 중간에 영화 얘기가 나올 땐 형이 주인공이 되어야 해.” 진행자 노동주씨는 시각장애인 독립영화 세 편을 제작한 영화감독으로 ‘서울장애인 국제영화제’ 대상도 수상했다.

다시 녹음이 이어졌다. 전세빈씨(50)는 볼링 경험을 소개했다. “우리 같이 앞을 못 보는 사람들은 기준점이 없어서 잘 못 던지잖아요. 그래서 ‘가이드 레일’이라는 게 있어서 이걸 쓰면 볼링을 할 수 있어요.” 이어 노선호씨(42)가 악기를 어떻게 배웠는지 설명했다. “시력을 잃은 다음부터 악기를 다루는데 막막했어요. 악보를 보지 못하니 계명도 모르고 가사도 못 보는 거죠. 기타 같은 악기보다는 부는 악기가 비교적 편해요. 지금은 오카리나를 해요. MR을 계속 들으며 똑같이 하려고 계속 연습했어요.”

'이은다' 진행자 노동주씨. 그는 장애인 영화감독이다. 사진=금준경 기자.
'이은다' 진행자 노동주씨. 그는 장애인 영화감독이다. 사진=금준경 기자.

진행자 조민지씨는 “저는 5년 전부터 댄스스포츠를 배웠어요”라고 했다. 전세빈씨가 “상대와 호흡을 어떻게 맞출 수 있어요?”라고 물었다. 조민지씨가 답했다. “오히려 수월해요. 남자 댄서가 리드하는 걸 따르면 되거든요. 아, 발레 전공자이신 세빈씨는 무용을 지도하신다고 들었어요.”

전세빈씨가 바통을 이어받아 말했다. “눈이 나빠지기 전에 학생들에게 발레를 가르쳤는데요. 눈이 나빠지고 나서도 서울맹학교 학생들을 2년 정도 가르쳤어요.” 노동주씨가 “안 보이는데 어떻게 지도했는지” 묻자 전세빈씨는 “오히려 그 심정을 잘 아니까 잘 가르칠 수 있어요. 앞이 보이지 않으니 자세는 직접 손으로 하나하나 만지면서 지도했어요”라고 말했다.

녹음이 끝났다. 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옆 사람의 팔뚝에 손을 얹었다. 강사들이 앞서서 걷자 한발짝씩 조심스럽게 내딛으며 스튜디오 밖으로 나왔다. 

“우리가 ‘시각’(시각장애인)이라 잘 할 수 있을까 망설였는데 교육을 받으니까 되긴 되더라고요. 처음에는 귀찮았는데 지금은 녹음 날짜가 기다려집니다.” 어제원씨가 말했다. 그는 60세에 시력을 잃었다. 처음에는 자포자기했지만 지금은 여러 활동을 하며 삶을 즐기고 있다. 전세빈씨는 “우리 콘텐츠는 장애인을 위한 내용이지만, 비장애인들의 인식 개선에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광장제작단 회의 모습. 사진=금준경 기자.
광장제작단 회의 모습. 사진=금준경 기자.
녹음 부스에 들어서는 광장제작단. 사진=금준경 기자.
녹음 부스에 들어서는 광장제작단. 사진=금준경 기자.

제작 과정에는 여러 고충이 있다. 어제원씨는 “저는 약시라 약간 보이는데 전맹이신 분들은 문자를 점자로 바꿔서 읽을 수 있게 자료를 넘겨드리고요. 어느 정도는 즉흥적으로 평소 생각을 얘기해요”라고 했다.

이날 녹음 때는 마이크가 설치된 방향과 진행자의 고개가 엇갈렸다. 조민지씨는 “갑자기 누가 날 건드려도 무슨 신호인지 알 수 없어서 힘들죠. 동료가 버벅댈 때 입모양으로 표현해주거나 글자를 써서 보여줄 수도 없고요”라고 했다. 이성균 강사는 “가장 큰 문제는 이동이었어요. 차를 잡지 못해 이동에 1시간씩 더 걸리기도 하면 서로 시간을 맞추기 힘든데, 광주센터의 노인미디어봉사단 분들이 차량 지원을 해주셔서 같은 시간에 모일 수 있게 됐어요”라고 했다.

어제원씨는 TV보다 ‘라디오’를 선호한다. “TV를 봐 봤자 보이지도 않으니까. 음성으로만 하는 라디오가 우리에게는 더 친숙해요. 지금은 제작을 하니까 더 애착이 생기더라고요.” 노동주씨는 “TV 보는 걸 포기했어요”라고 했다. 이들에게 TV는 다가가기 어려운 매체다. 

전세빈씨가 자세하게 설명했다. “뭐든 50%만 이해한다고 생각하면 돼요. 외국어가 나오면 전혀 감을 못 잡고, 다큐멘터리는 영상만 나올 때는 이해를 못해요. 음식을 맛있게 먹는다는 멘트가 나와도 그게 무슨 음식인지 몰라요.” 그는 “화면해설 방송으로 제작되는 건 ‘커피를 마시고 있는 주인공’처럼 대사가 없는 상황에서 일일이 설명을 해 주니 좋아요”라고 했다. 

이들은 정부로부터 시각장애인용 TV를 보급 받았지만 여전히 미디어 접근권이 열악하다. 어제원씨는 “드라마 같은 거 해설로 만드는 비중이 많지 않은 거죠. 해설방송으로 뉴스를 한번 봤는데 어떤 방송사는 자막을 안 읽어주고 음악만 나가더라고요”라고 했다. 화면해설방송은 화면을 제대로 해설하지 못하고 지상파 방송 기준 의무편성 비율도 고작 10%로 ‘양’도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비장애인들은 이미 300미터, 500미터씩 가고 있는데 장애인들은 제자리 걸음으로 간다고 해야 할까요.” 이사랑씨(27)는 “시각장애인들도 해설을 해주는 프로그램이 있으면 볼 수 있고 검색할 수 있고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데 미디어 사용 환경이 정말 열악해요”라고 강조했다.

최근 교육을 수료한 광장제작단은 오는 6월부터 정식 녹음을 한다. 이들이 제작해온 콘텐츠는 공동체라디오인 광주시민방송을 통해 ‘전파’를 탄다. 주요 지상파 방송과는 ‘시청자 참여 프로그램’ 제작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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