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와 콘텐츠에는 수많은 특성을 가진 다양한 장르가 존재한다. 콘텐츠가 자신의 매력을 선보일 수 있는 기회는 한정적이고, 날이 갈수록 증가하는 경쟁자와 맞서 시청자를 확고하게 사로잡기 위해서 오늘도 많은 창작자들은 밤을 새며 머리를 이리저리 굴린다. 모든 장르의 창작자가 매혹적인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헌신을 아끼지 않겠지만, 이 중 감히 어려운 장르를 단 하나만 정하자면 나는 ‘코미디’를 고르고 싶다.

사람을 웃긴다는 것은 얼핏 보기엔 쉽게 보이지만, 타인을 웃게 만드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나에게는 웃겨 보여도 다른 이들에게는 하나도 재미가 없을 수도 있고, 아무리 웃겨도 잘못하여 선을 넘는 순간 차별적인 비하가 되기 쉬운 장르가 코미디다. 하나의 잘 만든 코미디를 위하여 코미디언을 비롯한 코미디 영역의 창작자들은 타인의 반응과 트렌드를 철저하게 분석하며, 평소에 웃을 일이 많지 않은 현대인들이 조금이라도 얼굴에 미소를 지을 수 있도록 노력한다.

그러한 차원에서 KBS의 간판 코미디 프로그램이자, 한동안은 한국 방송 코미디 전체의 아이콘이었던 ‘개그콘서트’가 올해 5월 1000회를 맞이한 것은 무척이나 의미 있는 기록이다. 특히 MBC와 SBS가 일찌감치 코미디 프로그램을 폐지한 상황에서, ‘개그콘서트’는 유일하게 지상파 방송국에서 명맥을 유지하는 코미디 프로그램이다. 코미디 프로그램의 빈자리를 예능 프로그램이 메운 현실에서 개그콘서트가 일요일 9시라는 황금시간대를 꾸준히 고수하는 모습은 ‘개그콘서트’라는 브랜드가 지닌 힘을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만든다.

물론 그 힘이 예전 같지 않은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2010년대 중반까지 꾸준히 스타 코미디언과 유행어를 배출했던 ‘개그콘서트’는 2019년 현재에는 과거와 같은 영광을 더 이상 누리고지 못하고 있다. 이제 시청자들은 개그콘서트에 어떤 코너가 방송 중인지, 어떤 코미디언이 출연하는지에 큰 관심을 쏟지 않는다. MBC나 SBS와 달리 그간 쌓아놓은 기반이 무척이나 탄탄하기에 아직까지는 명맥을 잇고 있지만, 2016년 이후로는 ‘개그콘서트’와 같은 시간대에 방송하며 시청률 20%대를 안정적으로 달성하는 SBS의 관찰 예능 프로그램 ‘미운 우리 새끼’에 완벽하게 밀린지 오래다. 근래 ‘개그콘서트’의 시청률은 5-6%에 머물러 있었다.

KBS 개그콘서트 1000회.
KBS 개그콘서트 1000회.

하지만 ‘개그콘서트’의 진정한 문제는 따로 있다. 시대가 흘렀지만, 코미디의 질은 거의 업데이트가 되지 않았다. 물론 ‘개그콘서트’는 타사의 코미디 프로그램보다 상대적으로 유행에 민감했었기에 여전히 최신 트렌드를 빠르게 코미디에 녹여내는 흐름은 변치 않았지만, 이를 한 편의 ‘코미디’로서 묶어내는 감각은 여전히 과거의 관습에 얽매여 있다. 외모나 몸매, 성별을 소재로 쉽게 웃음을 자아내려는 시도가 매년 반복되고 있으며, 과거에는 촌철살인으로 다가왔을 코미디의 각본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형식을 그대로 답습하며 점차 시청자들에게 고리타분한 이미지만 강화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지난 5월 19일에 방송된 개그콘서트 1000회 특집은 최근 ‘개그콘서트’가 놓인 난국을 그대로 답습하는 이상을 넘지 못했다. ‘1000회 기념’이라는 타이틀에 맞게 2주 편성으로 기획된 특집은 ‘비상대책위원회’나 ‘수다맨’ 같이 과거 선풍적인 인기를 끈 코너를 다시 재연하고 왕년의 인기 개그맨은 물론 유명 게스트를 섭외하며 평소보다 높은 8.0%의 시청률(닐슨코리아 기준)을 모으는 것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1000회 특집은 과거 인기 코너를 다시 재연하는 이상을 넘지 못했다. 그저 달라진 시대상에 맞게 일부 디테일만 수정하고, 사정상 출연이 어렵게 된 코미디언을 다른 코미디언으로 바꿨을 뿐이다. 특히 ‘봉숭아학당’처럼 코미디언들의 개인기에 의존하는 코너들은, 과거의 유행어를 힘들게 재연하여 전시할 뿐 유의미한 웃음의 맥락을 만드는 것에는 철저히 실패하고 말았다.

KBS 개그콘서트 1000회.
KBS 개그콘서트 1000회.

도리어 개그콘서트는 1000회 특집을 통해 ‘앞으로도 결코 달라지지 않을 것’을 선언하는 듯한 면모를 보여주기까지 했다. 코미디언 박준형, 오지헌, 정종철이 출연해 2005년부터 2006년까지 큰 인기를 얻은 ‘사랑의 가족’의 재연에서는 오지헌이 “지금은 외모 비하 개그를 싫어하는 시대”라면서 걱정하는 대사를 하자 박준형이 “우리의 개그는 비하가 아니라 팩트다”는 코미디를 선보였다.

분명 이들의 외모는 마냥 잘 생겼다 말하기엔 어려우며, 이들의 인기 요인도 특유의 외모에서 비롯된 바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과거 코미디가 인기를 얻었던 맥락을 이해할 필요성과는 별개로, 외모 비하 개그를 약 15년 이후에도 그대로 다시 재현하는 모습에 마냥 웃고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득 지난 2015년, ‘개그콘서트’가 훨씬 오래 전부터 콩트 프로그램으로서 명성을 얻고 몇 년전까지는 CJ ENM의 tvN을 통해서 한국판이 방송되었던 미국 NBC 방송국의 장수 프로그램 ‘SNL’ (Saturday Night Live) 의 40주년 특집이 생각났다. 장장 3시간 30분이나 방송했던 SNL의 40주년 특집 역시 마냥 참신한 개그로만 가득한 것은 아니었다. 과거 유명세를 지녔던 개그를 이전과 똑같은 톤으로 재현하거나, 심지어는 SNL을 통해 인기를 얻은 스타 연예인에 지나치게 신경 쓰다 코너의 흐름이 늘어지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SNL 40주년은 과거에 대한 답습만 담긴 것은 아니었다. 매주 토요일 생방송으로 제작되는 SNL을 만들기 위한 스탭들에게 헌사를 보내는 콩트를 만드는 한편, 멜리사 맥카시나 케이트 맥키넌 같이 이미 여러모로 두각을 드러내던 여성 코미디언의 실력을 자유자재로 드러낼 수 있는 코너를 마련하기도 했다. ‘뉴욕 타임즈’나 ‘가디언’ 같은 매체들 역시 SNL 40주년이 과거 코너의 재현에 치중하다보니 아쉬운 구석이 많았음을 세세하게 지적하면서도, SNL이 왜 아직도 미국을 대표하는 콩트 프로그램인지를 스스로 입증했다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개그콘서트 1000회는 대체 무엇을 남겼는가. 스스로의 개그에 대한 성찰도 없었고, 언론 차원의 방송 프로그램 비평은 이미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스탠드업 코미디가 늘어나고, 최근에는 넷플릭스가 코미디언 박나래의 소속사 JDB엔터테인먼트와 공동으로 기획한 단독 스탠드업 코미디쇼 ‘박나래의 농염주의보’ 공연을 성황리에 마무리지으며 한국의 코미디 취향이 점차 바뀌고 있음을 드러냈다. 그러나 한국의 방송 코미디는 여전히 과거 영광을 누리던 시절에 그대로 머무르고 있다.

여기엔 ‘개그콘서트’ 뿐만 아니라 tvN의 ‘코미디빅리그’도 자유롭지 않으며, iHQ 계열의 케이블 채널 ‘코미디TV’는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 ‘스마일킹’을 최근 새롭게 방송 중이지만 박승대, 심형래를 전면으로 내세우며 노골적으로 과거 코미디를 답습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회도 변하고, 코미디에 대한 취향도 변하지만, 정작 ‘방송 코미디’는 그 옛날 그대로 변화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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