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참사 피해자들이 서울 여의도 옥시레킷벤키저 본사 앞에 세운 시민분향소를 어쩔 수 없이 철수하며 정부와 기업의 책임을 촉구했다. 가장 낮은 피해단계인 4단계를 받은 고 조덕진씨가 1403번째로 사망자로 숨지고 농성장이 세워진 지 22일 만이다. 그 사이 사망자는 4명 늘어 1407명이 됐다.

가습기살균제 참사 전국네트워크(가습기넷)는 24일 오전 옥시(현 RB코리아)가 입주한 서울 여의도 IFC몰 빌딩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농성을 이어갈 여건조차 되지 않아 분향소를 정리한다고 밝혔다. 피해자와 가족들이 모두 질환을 앓거나 가족을 보살펴야 해 농성장을 지키기 어려운 탓이다.

가습기살균제 참사 피해자들이 24일 서울 여의도 옥시레킷벤키저 본사 앞에 세운 시민분향소를 철수하고 정부와 기업의 책임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피해자와 가족들이 가습기살균제 피해로 숨진 이들을 추모하며 묵념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가습기살균제 참사 피해자들이 24일 서울 여의도 옥시레킷벤키저 본사 앞에 세운 시민분향소를 철수하고 정부와 기업의 책임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피해자와 가족들이 가습기살균제 피해로 숨진 이들을 추모하며 묵념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이성진 가습기넷 간사는 “피해자들이 모두 몸이 편찮고, 피해자가 전국에 퍼져 있다 보니 이곳 농성장을 한 달 유지하는 것도 힘겨웠다”고 말했다. 기자회견에 참가한 한 피해자 가족은 “계단 세 개를 올라가지 못하고 손을 떠는데 어떻게 농성장에 나와 있겠나. 다들 생계와 생존이 먼저라 나와 있지 못한다”고 했다. 이들은 농성 천막만 남겨두고 기자회견 장소로 사용하기로 했다.

이날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가족 8명은 현행 피해 판정기준을 폐지하고 전신질환을 가습기살균제 피해로 인정하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정부는 말단기 소엽중심성 폐섬유화를 동반한 간질성 폐질환만 건강피해 인정기준으로 삼아, 피해자를 네 단계로 찢어놨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손상 가능성에 따라 피해를 4단계로 나눠 지원 여부를 정한다. 1~2단계 피해자는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피해일 가능성이 높은 경우로 보고, 3~4단계는 낮거나 없다고 판단한다. 1~2단계 피해자는 정부 예산으로 피해 지원 받고, 기업과 민사 소송에서 승소 가능성이 비교적 높다. 3~4단계는 그렇지 못하다. 

문제는 피해 인정 범위를 매우 좁게 잡은 점이다. 정부는 폐질환과 천식, 태아 피해 가운데서도 일부만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피해(1~2단계)로 인정한다. 특히 폐질환은 말단기관지 등 특정 경로에서 시작한 폐섬유화만을 인정한다. 눈, 코, 피부, 혈액 등 폐 이외 전신에서 나타나는 질환은 아예 피해 판정 기준으로 삼지 않았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대다수가 4단계 피해자에 속한다. 사망자도 4단계 피해자가 921명으로 가장 많다. 그러나 3·4단계는 가습기살균제 탓일 ‘개연성’이 낮다고 분류돼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한다. 고 조덕진씨도 4단계로 분류돼 피해자 측이 자비로 병원비와 장례비를 치렀다.

가습기살균제 참사 피해자들이 24일 서울 여의도 옥시레킷벤키저 본사 앞에 세운 시민분향소를 철수하고 정부와 기업의 책임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피해자 이재성씨(가운데)가 가습기살균제 피해로 숨진 아기의 영정사진을 들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가습기살균제 참사 피해자들이 24일 서울 여의도 옥시레킷벤키저 본사 앞에 세운 시민분향소를 철수하고 정부와 기업의 책임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피해자 이재성씨(가운데)가 가습기살균제 피해로 숨진 아기의 영정사진을 들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가습기살균제 참사 피해자 및 사망자의 가족들이 24일 서울 여의도 옥시레킷벤키저 본사 앞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가습기살균제 참사 피해자 및 사망자의 가족들이 24일 서울 여의도 옥시레킷벤키저 본사 앞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이재성(55)씨는 2001년부터 10년 간 옥시와 애경이 판매하는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했다. 이씨는 2003년 처음 호흡곤란을 겪은 뒤 현재 폐섬유질환을 비롯해 피부와 눈, 코 등 온몸에 질환이 퍼졌다. 그러나 폐섬유화 범위가 작다는 이유로 4단계로 분류됐다. 부인과 중학생 자녀도 같은 시기 천식 등 질환을 얻었지만 자녀만 피해를 신고해 4단계로 분류됐다.

이씨는 “폐 주위에 점이 나고 입안과 피부에 혹이 난다. 빠르게 늙어가고 근육을 쓰기 힘들어 정상 노동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지원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는 지난 7일 청와대 앞에서 정부와 기업의 책임을 촉구하는 삭발식에도 참여했지만, 몸이 좋지 않아 농성장을 지킬 수 없었다고 했다.

옥시 제품을 사용한 김응익(62)씨는 “전쟁이 나 1400여명이 넘게 죽으면 피해자들을 이렇게 대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에 정부가 있는 게 맞나. 언제까지 피해자들이 길거리에 내몰려 이 싸움을 해야 하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김씨는 간질성 폐섬유화를 비롯해 피부와 근육 등에 합병증을 앓고 있지만, 역시 폐섬유화만으로 4단계로 분류됐다.

가습기살균제 참사 피해자들이 24일 서울 여의도 옥시레킷벤키저 본사가 24층에 자리한 IFC몰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가습기살균제 참사 피해자들이 24일 서울 여의도 옥시레킷벤키저 본사가 24층에 자리한 IFC몰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이들은 “피해 사망자가 50명, 100명, 500명에서 이제는 1400명을 넘겼다. 숫자가 점차 늘어나니 오히려 시민들은 피해 숫자에 둔감해지고 내 일이 아니라고 여기는 듯하다”며 정부가 하루빨리 나서야 한다고 했다.

피해자들은 환경부에 가습기살균제 노출이 인정되면 ‘건강 피해자’로 인정하는 새로운 판정기준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또 피해인정 범위를 전신 질환으로 확대하고, 정부가 피해자 지원을 책임지라고 요구했다.

가습기살균제 참사 전국 네트워크는 전체 가습기살균제 사용 인원이 450만명에 이른다고 추정한다. 이 가운데 건강 피해자는 49만~50만명으로 추산되고, 중증 피해자는 4만명으로 추산된다. 현재까지 6422명이 피해를 신고했고, 이 중 1407명이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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