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낙태죄 처벌 조항 폐지를 유예한 내년 말이 1년 반가량 남았다. 낙태 범죄화가 여성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는 헌재 결정 취지를 살려 관련법 전면 개정 요구와 특정기간 낙태를 허용하거나 제한할 사유를 둬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하다. 국회입법조사처가 처음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에 따른 입법과제’ 토론회를 개최한 22일 여성·의료·종교·법조계 관계자들이 향후 입법 방향을 논했다.

국회입법조사처 보건복지여성팀 김주경 입법조사관은 △임부 요청에 따른 사유불문 임신중절 시기 결정 △생명보호 수단과 정도를 달리 정할 시기 결정 △청소년 임부 등 보호자 동의 요건 △시술 전 상담·숙려기간 등 절차적 요건 △의료서비스 접근성 제고 정책 △신념에 의한 의료인 진료 거부 등을 쟁점으로 제시했다.

현행 형법상 낙태 처벌규정은 낙태한 여성의 ‘자기 낙태죄’, 임신한 여성 부탁·승낙을 받아 시술한 사람의 ‘동의 낙태죄’, 임부 부탁·승낙이 없음에도 낙태시킨 사람의 ‘부동의 낙태죄’를 기본으로, 의사·한의사·조산사 등에는 업무상 동의 낙태죄로 가중 처벌하고 있다. 처벌 대상 예외 조항은 모자보건법으로 규정한다.

국회입법조사처가 처음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에 따른 입법과제’ 토론회를 개최한 22일 여성·의료·종교·법조계 관계자들이 향후 입법 방향을 논했다.
국회입법조사처가 처음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에 따른 입법과제’ 토론회를 개최한 22일 여성·의료·종교·법조계 관계자들이 향후 입법 방향을 논했다.

김동식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자기낙태죄와 동의낙태죄는 삭제가 바람직하다”며 “임신한 여성이 임신중단을 충분히 숙고한 뒤 결정하도록 함과 동시에 의학적으로 안전한 임신중단시술이 이뤄지도록 입법조치해야 한다”고 했다.

김 연구위원은 “‘안전성’은 여성의 건강·상황에 따라 매우 다를 수 있으나 평균적 위험 가능성만을 기준으로 시기를 제안한 헌재 결정이 아쉬운 부분”이라며 “1삼분기에 한정해 여성 요청만으로 허용된다면 개인이 통제 불가능한 상황으로 이 시기를 넘길 수밖에 없는 여성은 지금과 같이 음성적 시술을 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의료인의 거부와 고비용 협상 등 문제가 여전할 것”이라고 했다.

낙태죄 헌법소원 대리인단을 맡았던 차혜령 변호사는 “법정의견이 임신종결의 사회적·경제적 사유를 설시하면서 ‘다양하고 광범위한 사회·경제적 사유에 의한 낙태갈등 상황’이라고 한 점을 유의해야 한다”며 “임신 주수를 어떻게 할지 등 사유의 조합 방식으로 논의를 이끌어가는 건 부정적”이라고 밝혔다. “국회 입법 시 형사처벌 여부나 범위 논의에 매몰되기보다 우선적으로 합법화되는 영역의 임신종결을 여성의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보장이라는 차원에서 어떻게 다룰지 폭넓은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장인 정재우 신부는 “여성이 낙태하지 않을 자기결정권 보호”를 강조했다. 여성의 부모나, 태아 아버지 등이 낙태를 종용하거나 책임을 거부하는 경우 낙태 압력을 받는 여성을 보호할 방안과 자녀 양육 책임을 기피하는 아버지 방임에 조치가 함께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정 신부는 “태아의 생명 보호라는 중대한 공익에 부합하는 낙태 거부 자유가 우선적으로 보장돼야 한다”며 “의료인과 의료기관에게 낙태를 의무로 부과할 수 없으며, 협력하도록 강요할 수 없다. 낙태시술 기관을 안내하거나 알선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대한산부인과학회 공식 입장은 어떠한 형태의 낙태수술도 허용할 수 없다”라고 밝힌 김재연 대한산부인과의사회 법제이사는 “임신 초기 12주까지는 어떠한 사유 요구 없이 임신한 여성이 자신의 숙고와 판단 아래 낙태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임신 12~22주까지 우생학적·윤리적 적응과 강간, 태아의 심각한 기형이 확인된 경우 의사의 판단에 따라 수술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이사는 “의사나 여성이나 낙태로 인해 어떠한 사유가 됐든 처벌해서는 안 된다. 대신 상담 규정 같은 경우 아기를 낳을 때까지 어떤 제도가 있고 정부 지원 등을 얘기해주고, 주거시설까지 지원한다는 등 제도를 총 동원해서 출산할 양육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낙태 시술 전 상담과 숙려기간의 이면을 봐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상담과 정보 제공 이후 의무적 숙려기간을 둘 경우 시술을 지연시켜 여성이 안전하고 합법적 낙태 시술에 접근할 가능성을 제한할 수 있다고 밝혔다. 실제 프랑스는 여성에게 심리적 부담을 줘 임신중단 지체 결과를 초래, 의료비 지출을 늘리고 시술 위험률을 높인다는 이유로 2015년 1주 숙려기간을 폐지했다.

김동식 연구위원은 “임신중단 기준에 부합하는 대상인지 등을 체크하려는 목적으로 승인제도를 두거나, 여성 요구가 없음에도 입양이나 출산 등 편향적 정보를 포함한 상담 제도를 마련하는 것은 반드시 지양돼야 한다”며 “임신중단 지체로 발생할 상황을 악화시키고 임신중단기간을 넘김으로써 원정낙태 등 더 위험한 임신중단을 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도 있다”고 했다. 어디까지나 여성 건강권과 생명권을 보장하기 위한 정보와 상담 서비스가 제공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날 토론을 들은 차인순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입법심의관은 “피임에서 임신, 임신중단, 출산에 이르기까지 전체적 재생산 과정에서 발생할 사회적 과제를 헌재 판결 취지에 따라 조망해보고 논의를 다측면으로 확장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근로기준법과 관련해서도 낙태가 죄였기 때문에 인공유산 경험자들이 유산휴가를 받지 못해 건강권을 침해받은 문제도 있다”며 “헌재 논리를 그대로 문안에 반영하는 게 아니라 취지를 어떻게 반영할지 일관된 논의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국회에 주어진 시간은 그리 여유롭지 않다. 이재명 입법조사관은 “2020년 초 국회의원 총선거가 예정돼 있고 이후 원 구성에도 일정한 기간이 경과할 걸로 예상된다는 점에서, 헌재가 정한 2020년 12월31일 이전에 국회가 낙태 법제 개선을 긴밀하게 논의할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다”고 했다. 차예령 변호사는 “기한과 사유, 절차 모두가 권리 보장과 직결되는 사항이므로 입법의 핵심 내용에 관해서는 대통령령으로 위임하지 말고 국회를 중심으로 사회적 논의와 토론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