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합니다. 살인범 가족으로 몰리다니….”

지난 1월 21일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실. 판문점 군기문란 사건과 김훈 중위 사건 보도 과정에서 김 중위 타살의 유력한 용의자로 거명된 김영훈 중사(28) 가족이 방문했다.

김 중사 가족은 현재 김 중사와 관련한 언론 보도에 대해 명예훼손 소송을 준비중이다. 뚜렷한 증거도 없이 살인범으로 지목해 치유할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었다는 것이다. 언론계 안팎에서도 김훈 중위 의문사 사건 보도에 대한 비판 여론이 무성하다.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지 못한채 널뛰기식 보도로 일관했다는 것이다 초기에는 국방위나 김훈 중위 유족측 주장에 의존해 일방 보도를 내보더니, 특조단의 조사가 마무리되어가자 출입처 시각에만 의존하는 관행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번 보도가 군내 의문사 사건에 대한 최초의 심층보도란 점, 또 군내부라는 특수 상황을 감안한다면 독자적인 탐사 보도에 한계가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 벽을 깨기위한 언론의 자세는 ‘초보적’ 수준을 넘지 못했다.

무엇보다 하나의 ‘개연성’에만 의지해 한 인간을 ‘살인범’ ‘간첩’으로까지 몰아간 점은 무책임한 선정주의 보도와 다를 바 없었다는 것이다.

김영훈 중사 보도의 경우 자칫 거액의 손해배상까지 예견되고 있는 상황이다. 아직 특별조사단의 최종 결과 발표가 나오지 않았지만 특조단이 이번 사건을 ‘자살’로 단정하고 있어 법리적 해석상 언론은 극히 불리한 위치에 있다.

언론에 투영된 김영훈 중사는 어떤 인물인가.
김 훈 중위 의문사 문제가 언론에 일제히 등장한 것이 지난해 12월 9일. 판문점 공동 경비 구역에 근무하는 하사관과 사병이 상부의 허가 없이 북한 경비병들과 수시로 접촉한 사실이 공개되면서 김 훈 중위 사망 역시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다.

언론은 김 훈 중위 의문사에 대해 타살 가능성에 무게를 실었다.
당연히 용의자도 거명됐다. 김 중위 소대에서 부소대장을 역임한 김영훈 중사가 장본인. 언론의 시나리오는 단순했다. 김 훈 중위가 살해됐고 그 범인은 적과 내통해온 김영훈 중사라는 식이었다. 이 시나리오에 근거해 숱한 기사가 양산되기 시작했다.

<‘사인=자살’ 꿰 맞추려 조작 은폐 의혹>(동아일보 12월 10일자 3면),<북서 김중위 살해 사주 개연성>(세계일보 12월 10일),<‘김 중위 타살’ 일부 진술 확보>(문화일보 12월 10일), <“김중위 살해범은 2명 이상”>(한국일보 12월 11일) 등등.

이 과정에서 용의자 김 중사에게 화살이 빗발쳤다.
<“부소대장이 북한군과 술판”>(동아일보 12월 10일),<짙어지는 타살 가능성-김중위 부임 무렵, 김중사 북접촉 중단>(한겨레 12월 10일), <김 중사 ‘사건’뒤 특혜 인사 의혹>(중앙일보 12월 11일) 등등.
김 중사 실명은 12월 10일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국민, 경향, 동아, 중앙, 문화, 대한매일 등이 12월 10일을 전후로 김영훈 중사를 기명해 보도하기 시작한데 반해 조선과 한국일보는 끝까지 비실명 원칙을 고수했다. 언론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김 중위가 북지령으로 살해됐을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김 중사에게 고정간첩 혐의마저 추가했다.

대표적인 것이 경향신문 12월 10일자 사회면 머릿기사. 이 기사는 김중사가 북한의 지령을 받고 김 중위를 살해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김 중사를 확실한 범인인양 보도했다. 경향은 12월 11일자에선 김영훈 중사의 사진까지 게재했다.

“김 중사가 북한군과의 접촉 등 자신의 이적행위가 탄로날까봐 범행했을 가능성과 김 중사가 북한측 지령을 받고 김 중위를 살해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어 충격을 주고 있다”

종합한다면 김 중사는 ‘군사분계선에 술상 놓고 북한군과 대작’하고 ‘근무성적 꼴찌’에 ‘짧은 어학’, 게다가 ‘고정간첩’ 의혹까지 있는 한마디로 수준이하의 ‘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보도는 특조단이 자살쪽에 무게를 실으면서 급속히 줄어들었다.
‘김중위 타살’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고 보도했으나 특조단의 조사 결과 ‘김영훈 중사 살해혐의를 못 밝혔다’고 꼬리를 내렸다.

초기와는 달리 자체적인 취재망을 가동, 실체적 진상 규명도 거의 없었고 김 중사 가족이 손배 소송을 준비중이라는 소문이 돈 탓인지 극도의 조심스러움을 감추지 않고 있다.

김영훈 중사 보도는 한국언론의 ‘광기’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집단적인 여론 몰이와 함께 최고조의 격앙된 보도를 집중적으로 내보냈다가 그야말로 허무하게 사그라드는 결말. 일관성도 집중력도 없다. 보도 초기에는 타살의 가능성에만 몰두하더니 특조단이 자살쪽으로 결론을 몰아가자 ‘자살’에 방점을 두고 있다.

속단할수 없지만 김 중사의 용의점이 완벽하게 풀린 것은 아니다. 따라서 결론이 내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김 훈 중위 사건 전체 보도를 평가한다는 것 역시 성급한 측면이 없지 않다.

속 사정에 밝은 김훈 중위 사건 관계자들은 김 중사에게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버리지 않고 있으며 결정적이고 유력한 증거를 조만간 제출할 가능성도 남아 있다.

그러나 절도범 조차도 익명 보도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김 중사를 기명 보도하고 혐의점을 증폭한 언론의 행태가 신중하지 못한 처사였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 경솔함은 어쩌면 사상 초유의 거액 손해배상이란 비참한 결과를 가져 올지도 모를 일이다.

황덕남 변호사는 “언론이 김 중사와 관련한 국회, 국방부 자료를 토대로 기사를 썼는지 아니면 순전히 추측에 의존한 것인지 규명하는 것이 극히 중요하다”며 “만약 자료에 근거하지 않은채 김 중사 연루 부분을 확대 과장했을 경우 언론의 법적 책임을 피할수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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