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과 달리 신문에는 날이면 날마다 정치뉴스가 꽤나 많다.
정권교체 이후 과거 1년 넘게 대부분 욕설로 가득찬 싸움질 얘기다.

이 싸움판에 관한 뉴스는 대개 읽지 않아도 일상생활에 아무런 불편이 없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살이에 대범한 사람이라도 무관심할 수 없는 뉴스들이 있다.

우선 경제파탄 이후 경제뉴스와 업계뉴스가 홍수를 이루고 있다.
그 대부분이 결국은 실직이나, 실직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감봉이라는 어두운 그림자로 이어진다.
게다가 고도성장의 신화와 ‘선진국병’이 와해되면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자긍심이 산산조작이 났다.

그래서 요즘 신문·방송의 뉴스나 기획기사·기획프로그램은 우리를 주눅들게 하고 있다.
환상과 자긍심이 컸던만큼 자신이 왜소하고 초라해졌다는 패배감은 더욱 강하다.
그런 판에 매체마다 ‘벼락부자’들의 기적같은 성공담으로 떠들썩하다.

남들은 부도와 실직홍수로 얼이 빠졌을 때 주식선물거래를 맡은 증권사 직원이 눈 깜짝하는 사이에 몇십억을 벌었다고 했다. 재미교포청년 아무개는 몇억달러의 돈벼락을 맞은 벤처기업가라든가, 맨 손으로 창업했던 젊은 이가 한해 매출 얼마짜리 사장님이 됐다는 등등.

벼락부자들의 성공담은 초라하고 왜소해진 보통사람들을 더욱 초라하고, 더욱 왜소하게 만든다. 어느 날 갑짜기 거리로 밀려날까 전전긍긍하고 있는 사람들-허둥지둥 일터로 나가, 정밀기계처럼 최선을 다해 일하고, 정해진 날짜에 가벼워진 월급봉투를 받고, 그것을 이리 재고 저리 재가면서 구두쇠노릇을 해야하는 보통사람들을 기가 죽게 만든다.

게다가 신문·방송들은 날이면 날마다 “변해야 산다”고 다그치고 있다. “너도 미구에 죽을 수 있다”는 협박과도 같다. 그뿐만이 아니다. 과거 김영삼정부가 노래했던 ‘세계화’가 이제는 도도히 흐르는 급류가 돼서 우리를 압도하고 있다. ‘외자도입’과 ‘해외매각’이 우리 귀를 아프게 하고, 기업만 다그쳤던 ‘경쟁력’이 이제는 못난 시민들도 압박하고 있다.

많은 전문가와 교수님들이 ‘세계시민’이 돼야한다고 외치고 있다. 외국유학은 커녕 동남아여행도 못해본 못난 보통사람들은 쥐구멍이라도 찾아야할 판이다.
이처럼 요즘 신문·방송에 의하면, 그리고 신문·방송에 등장하는 전문가·권위자들에 의하면 ‘세계화’는 인류사의 마지막 종착점인 것같다. 과연 그럴까?

지금 우리를 채찍질하고 있는 ‘세계화’는 우리 역사상 두번째 겪는 경험이다.
첫번째 ‘세계화’는 몽고인들이 유라시아대륙에 동·서양을 아우른 대제국을 이룩했을 때였다.

고려가 자그마치 42년 동안의 피나는 전쟁끝에 강화도에서 나와 몽고군의 위협에 노출돼있는 개경(開京)에 돌아오기로 동의한 것은 원종(元宗) 1년(1260·몽고 세조 1년)이었다.

원(元)나라의 벼슬을 받은 홍다구(洪茶丘)는 임금 원종에게 절도하지 않았고, 고려의 대장군 최면에게 곤장을 치는 등(원종 15년) 횡포를 일삼았다.

그는 비록 고려출신이지만, 13세기의 ‘세계인’이었다.
고려는 원의 요구로 일본정벌 연합군에 참가했다. 1차 원정때(1274년)에는 백성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판에 전함 9백여척을 만들고 전투병력 8천명, 항해요원과 인력 6천7백명등 총인원 1만4천7백명을 보냈다.

2차 원정때(1280년)에는 전함 9백척을 만들고 전투병력 9천9백60명등 총인원 2만6천9백89명을 보냈다. 이중 7천5백29명이 태풍으로 희생됐다.

그러면서도 고려는 원나라와의 ‘혼인동맹’ 형식을 통해 영토주권을 대부분 회수하고 종묘사직을 지켰다. 그나마 고려를 짓눌렀던 ‘몽고인에 의한 세계화’는 1백년으로 끝났다.

몽고인의 무자비한 기마부대와 달리, 오늘날의 세계화는 서방세계의 거대자본과 거대산업 그리고 과학기술의 산물이다.
손바닥만한 땅에서 뜀박질하다가 경제파탄의 날벼락을 만난 우리로서는 한없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기마부대의 무자비한 파괴력이 만든 세계화와 오늘날의 세계화가 어디까지 같고, 어디부터 다른지 판단하기는 이르다. 하지만 ‘세계화’가 마치 인류역사의 절대적 종착점인 것처럼 맹신하고 합창하는 것만은 다시 생각해야한다.

언론은 유행가의 가수가 돼서는 안된다. 판단은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안목을 가지고 냉철하게 내려야 한다. 또 주눅들고 비참하리만큼 기가 죽고 왜소해지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감동과 꿈과 용기를 주는 것도 언론의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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