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똘레랑스’라는 프랑스 말이 한동안 이땅의 화두를 휩쓸었던 것은, 순전히 홍세화씨의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 덕분이 이나었던가 싶다. “존중하시오. 그리하여 존중하게 하시오.” ─ 똘레랑스라는 낱말의 뜻을 한마디의 우리 말로 옮기기가 어렵다고 전제하는 그는, 잔디밭의 푯말에 적힌 문자를 빌어 그나름의 풀이를 시도한다.

그러나 프랑스 말엔 도대체 깜깜한 주제임을 무릅쓰고, 만용의 객기로 풀이한다면 똘레랑스의 가장 가까운 번역은 역시 관용이다. 실제로 똘레랑스를 관용으로 옮겨낸 사례는 쉽사리 확인된다. 가령 마르쿠제의 <억압적 관용>도 그 하나이다. 뒤에 붙은 관용의 원문은 분명히 똘레랑스가 아니던가.

<택시 운전사>를 읽고 난 홍세화씨의 독자들 또한 서로의 존중이라는 문맥을 떠받치는 건 아무래도 관용이 아니겠느냐는 풀이에 기울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경계되고 아무리 지탄되어도, 말과 글이란 거두절미의 숙명을 벗어나기 어려운 것인가.

<택시 운전사>의 깊은 뜻과는 달리 똘레랑스는 그저 전제도 조건도 없는 무제한 관용의 뜻으로만 번져난다. 마르쿠제 투로 말한다면 ‘순수관용’의 추구로만 질주한다.

아직도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는 <택시 운전사>가 이 소식에 접한다면 얼마나 당혹해 할까, 남의 일같지 않은 안타까움에 젖게 된다. 그 모두가 <택시 운전사> 탓만은 아닐 터이지만, 어제와 오늘에 펼쳐지는 이 땅의 풍경을 보라. 몇십년만의 정권교체를 이루었다고 자화자평하는 오늘의 정권은 관용과 화해를 더 없는 미덕으로 떠받든다. 억압과 폭력으로 겨레를 짓밟았던 군부독재의 정치집단마저 용서하자고 목청을 높인다. 화해의 손짓을 뻔질나게 흔들어댄다.

이 마당에 무슨 지역연합 따위의 정치적 속내까지를 거론할 겨를은 없다. 비록 사면 복권이 되었다고는 할지라도 역사의 죄인일 수 밖에 없는 저들은, 관용과 화해의 손짓에 오히려 오만한 반응마저 숨기지 않는다.

언감생심, 저들 스스로가 먼저 용서를 빌고자 하는 몸짓은 털끝도 보이지 않는다. 저들의 우두머리인 전직 대통령은, 대법원이 판결한 추징금도 다 내지 않는다. 저들의 추징금을 거두어들이고자 하는 강제력도 전혀 행사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의기투합’의 냄새를 씻을 길이 없다. 기세를 얻은 저들은 마침내 신당론을 흩날리며, 우두머리를 뒤따라 방방곡곡을 누벼댄다. ‘역사의 정당한 평가’를 받겠다는 강변도 서슴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주와 민주와 평등의 깃발을 나부끼며 결연히 일어섰다가, 저들의 무리에게 무참히 짓밟혀버린 5월의 역사는 무엇인가. 그 민중의 죽음은 무엇인가.

분명히 그 때문일 터이다. 흔히들 “우리의 5월, 우리의 광주는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끝날 수 없다”고도 외쳐진다. 저들의 행상에서도, 그 단편들만으로도, 역시 우리의 5월과 우리의 광주는 끝나지 않았음이 확인된다.

아직도 우리의 5월과 우리의 광주는 진행되고 지속되어야 할 당위의 역사이다!
그 거창한 기류에 견주면 작은 파편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마침내 저들 집단의 과벨스 격이었던 허문도라는 사람이, 이른바 ‘국민의 정부’시대의 언론에 재진입하리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불교TV(btn)의 사장님이 된다고 한다. 그것도 다른 달이 아닌 우리의 5월에, 당당한 진입의 발걸음을 내딛겠다고 한다. 운영자금이 궁색한 불교 종단쪽에선 대자대비와 관용의 정신을, 반역사의 방패막이로 내세운다.

이 마당에 군소리는 부질없고 무력하게만 들린다. 오로지 <택시 운전사>의 똘레랑스란 무엇이었던가, 그리고 마르쿠제가 역설했던 <억압적 관용>이란 무엇인가를 되새기는 것으로, 어안이 벙벙한 나의 말문을 대신하고자 한다.

“프랑스의 권력은 사회와 역사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것에 반하여 한국의 권력은 그 현대사가 증명하고 있듯이 역사에 대해서나 사회에 대하여 전혀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택시 운전사> 홍세화씨의 말이다.

“순수관용은, 관용해서는 안될 정책과 조건 그리고 행동에까지 관용의 손을 뻗친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억압과 폭력에 대한 봉사일 뿐이다.” 관용이라는 이름도 역사의 진실에 등을 돌릴 수는 없다는 마르쿠제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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