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드골 장군은 나치협력 민족반역자를 숙청하면서 가장 먼저 언론인들을 심판대에 올렸다.
당시 일부 세력은 언론자유를 들먹이며 이를 반대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드골은 그 어느 집단보다 언론인들을 더욱 엄하게 처벌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언론인은 도덕의 상징이기 때문에 첫 심판에 올려 가차없이 처단했다’고 기록했다.

드골의 나치협력 반역자 처단 전말을 국내에선 처음으로 소개한 ‘프랑스의 대숙청’의 저자 주섭일 참여연대 고문은 드골의 언론인 숙청엔 이같은 당위론적 의미이외에도 반민족세력의 저항을 조기에 차단한다는 전략적 측면이 더 강하게 존재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드골은 친나치 언론을 먼저 숙청하지 못하면 반민족세력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반나치 언론이 숙청을 방해하도록 여론을 몰아갈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분석된다”며 “새로운 질서를 실현하기 위한 드골의 전략적인 판단”이었다고 평가했다.

‘언론개혁이 없이는 사회개혁이 없다’는 명제를 드골은 일찌감치 알았고 그래서 과감히 실천했다는 것. 저자인 주 고문이 개혁정부를 표방하는 현 정부에게 충고하는 메시지인 셈이다.

주섭일 고문은 한국언론계에서 최고의 ‘유럽통’으로 통한다. 유럽과 관련한 그의 이력을 보면 이는 잘 나타난다.

72년부터 신군부세력에 의해 해고된 80년까지 그는 중앙일보 주프랑스 특파원을 지냈다. 해고된 후 그는 파리 제13대학교에서 수학, ‘프랑스 혁명과 한말 변혁운동 비교연구’란 주제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땄으며 소르본느대학 프랑스혁명연구소 연구원을 역임했다.

87년 잠시 귀국한 후 다시 89년부터 95년까지 세계일보 유럽총국장을 지냈으며 96년에 재귀국한 후 지난 98년 3월 후배들이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떠나는 것을 보고 자신도 사표를 던졌다.

그는 “현정부가 신문개혁에 대해 ‘자율’을 얘기하고 있지만 ‘자율’과 ‘자발’을 통해 언론개혁은 불가능하며 그 반면교사는 프랑스”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언론은 4.19혁명 당시 반독재전선에 나섰던 것을 제외하면 굴종과 왜곡의 역사를 걸어왔다”며 “20세기가 지나기 전에 개혁을 해야 하지만 지금으로 봐선 불가능해 보인다”고 평가했다.

그는 그러나 “프랑스에서 했던 것과 같은 언론계 인적청산은 현실적으로 힘들겠지만 드골이 언론인 숙청과 함께 진행했던 언론정책은 신문개혁의 프로그램으로 참고할 만하다”고 지적했다.

드골은 프랑스 언론을 각계 각층의 여론을 대변할 수 있게 재편했다. 우파와 자본가들의 대변지 ‘르피가로’ 지식인 중산층의 대변지 ‘르몽드’. 노동대중을 대변하는 ‘뤼마니떼’와 ‘리베라시옹’ 등으로 재편, 사회의 다양한 의견들이 표출될 수 있도록 유도해 사회의 건강성을 유지토록 했다는 것이다.

노동자에서 재벌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대변하는 체 하면서도 결국 보수층의 입장만 대변하는 한국의 언론상황이 재편돼야 할 방향이라는 것이다. 그는 “기존 보수언론에 대항할 수 있는 대항언론이 계속 나와 언론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프랑스의 언론인 숙청은 단순히 반민족세력의 처벌만 아니라 카멜레온처럼 변신을 거듭하는 부도덕한 인간들이 언론을 주도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며 “한국 언론계의 카멜레온들도 언론을 주도할 자격이 없음을 직시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의 대숙청 어떤 내용인가


프랑스의 나치협력 언론과 언론인들에 대한 처벌은 가혹하고도 엄격했다.
프랑스 임시정부는 44년 9월 30일 언론계 숙청에 대한 훈령을 발표, 나치점령군과 비시정권의 지시와 규정에 순종한 언론사는 모두 발행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나치의 파리점령 이후(40년 6월 25일) 창간된 모든 신문과 잡지들.

그리고 나치독일의 점령기간에 계속 발행된 신문과 잡지들을 모두 발행금지시켰다.
언론사 538개가 재판에 회부되어 115개 사가 유죄선고를 받아 모두 폐쇄됐다.

나머지 64개사는 전재산 몰수, 51개사는 일부 재산 몰수됐다(48년말 기준), 또한 ‘내가 도처에 있다’ 신문의 브라지아크 편집국장, ‘르 프티 니소아지’의 르전 사장 등 상당수의 언론인들이 사형된 것을 비롯 친나치 언론인과 사주는 사형, 종신강제노동형 등 엄한 처벌을 받았다.

또한 나치독일의 선전전문방송인 ‘슈투트가르트’ 방송의 프랑스어 담당 보도국장 페르돈네 등 나치의 앵무새노릇을 한 방송사의 아나운서들도 총살됐다. 반면 ‘르피가로’는 사장이 나치점령시절 지하저항운동에 참여한 공이 인정돼 비시정권시절 신문을 계속 발행했음에도 똑같은 제호로 파리에서 유일하게 복간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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