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반, 하얀 꽃눈이 소복하게 내려앉은 이팝나무 가로수 길을 따라 이른 출근을 한다. 이팝나무 꽃을 보면 이름처럼 흰 쌀알이 쌓인 것 같다. 해마다 이맘때면 보릿고개를 넘겨야 했던 옛사람들도 저 꽃을 보면 같은 생각을 했을게다.

나는 1987년 유성기업 부천공장에 입사했다. 당시 유성기업에도 어김없이 민주화 바람은 불었고 그때 생애 첫 파업을 경험했다. 지금이야 민주노총으로, 금속노조로 뭉쳐 있고 노동자들 연대도 당연하게 여기지만 당시엔 파업하면서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할지 어떻게 할지도 몰랐다. 부서별로 조를 짜서 외부인이 공장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뜬눈으로 공장 외각을 지켰고, 밤새 드럼통을 두드려 대며 불렀던 노동가라고 하는 것도 김민기의 ‘늙은 군인의 노래’를 “나 태어나 이 강산에 노동자 되어”로 고친 ‘늙은 노동자의 노래’나, “도깨비 빤스는 튼튼하지요. 질기고도 튼튼하지요. 민주노조는 튼튼하지요. 질기고도 튼튼하지요” 뭐 이런 노래를 악다구니를 써대며 불렀다. 

구호도 마찬가지였다. “별 보고 출근해서 별 보고 퇴근한다”, “배고파서 못 살겠다 임금인상 쟁취하자”, “임금인상 쟁취하여 사랑받는 아빠 되자”라는 먹고살기 위한, 도시빈민 탈출을 위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3년 지난 1990년 또 다시 유성기업에 파업의 바람이 불었고 회사는 이에 대항해 직장을 폐쇄했다. 공권력이 들어와 조합원 전원을 연행했다. 87년과 90년 모두 공장 내 박스창고에 불을 질러 연기를 피우고 연기가 나면서 소방차가 들이닥쳐 파업대오가 흐트러지는 회사의 전술에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다. “유성기업 만세!” 만세 삼창 소리와 함께 파업은 끝이 났다.

▲ 1992년 노조 활동 초창기 유성기업노조 지역공동 임투 전진대회 사진=유성지회.
▲ 1992년 노조 활동 초창기 유성기업노조 지역공동 임투 전진대회 사진=유성지회.

당시 주변의 공장들은 백전백승 하는데 유독 유성기업만은 백전백패였다. 당시 파업을 주도했던 주동자들은 해고당했고 복직을 꿈꾸며 수 개월 동안 붉은 장미가 흐드러진 공장 담벼락 밑에서 밤늦게까지 양말을 팔았으나 우린 모두 외면했다. 그렇게 유성의 깨어 있는 노동자들은 회사에서 잘려나갔다.

그때도 회사 관리자 편에 선 노동자가 있었고 파업하면 파업에 불참하고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도 있었다. 이후 끈질긴 노력 끝에 이런 노동자들이 파업에 100% 참여하면서 우리도 결국 승리 할 수 있었다.

새벽 향기를 즐기며 이팝나무 가로수 길을 지나 공장이 가까워지자 갑자기 쿵쾅거리며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새벽을 가르며 모내기에 한창인 농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왜 그런지 유성기업 노조파괴의 시작이었던 2011년만 떠오른다. 매끼 올라오던 김 가루와 우리가 직접 만든 세상에서 제일 맛없던 김치, 비닐하우스 농성장의 물구덩이 잠자리와 유독 파업노동자들을 좋아했던 갈색 고양이, 써레질해 놓은 논바닥에 쳐박혀 뻑뻑 담배를 피워대던 용역들, 그놈들 입에서 쏟아져 나오던 욕설과 용역을 싸고돌던 경찰, 검찰 노동부에 대한 기억들.

151일 고공농성을 진행한 굴다리를 지나자 유성 사측에 협조적이던 버스회사가 나온다. 용역 깡패와 싸우다 이곳으로 도망친 조합원을 잠복하던 경찰은 허리를 꺾으며 체포했다. 멀리 옥상에는 채증을 위해 설치한 망루가 있다. 도끼날 같은 철조망을 4겹, 5겹씩 둘러치고 노조 출입을 막았던 유성기업의 담장 끝에는 정문이 있다. 2011년 정문에서 우리는 헬멧 쓰고 방패 든 용역이 휘두르는 해머, 삼각대, 곤봉에 두들겨 맞았다. 그리스 범벅이던 컨테이너 장벽과 용역은 이제 없지만 대신 수십 개의 CCTV 카메라가 하루종일 정문을 감시한다.

그날 이후 회사는 마음대로 해고하고, 해고자 출입을 막고, 그래서 싸우면 이를 빌미로 징계하고, 고소하고, 벌금을 물리고 다 끝나면 다시 징계하고, 고소하기를 반복했다. 현장에 들어가면 소속 파트장은 금속노조 조합원만 골라서 화장실 몇 번 가는지, 전화기 몇 번 보는지, 노동조합 사무실에는 몇 번 갔는지, 누굴 만나는지 시시콜콜 관찰일지를 작성했다. 그러면 회사는 이를 근거로 임금을 삭감했다. 왜 삭감하느냐고 따져 물으면 현장으로 돌아가라 강압하고 그래서 또 항의하면 명령불복이라며 경고장을 날린다. 이제 또 징계하고, 고소하고... 무한반복이다. 회사는 아예 시비조, 몸빵조, 채증조를 엮은 구사대를 보내 쟁의행위를 방해했다. 시비조가 시비를 걸고, 조합원이 반발하면 몸빵조가 쓰러지고, 이를 채증조가 찍어서 다시 징계하고, 고소하고... 무한반복이다. 이렇게 쌓인 고소·고발이 1300여 건이다.

▲ 유성기업지회 조합원들이 고 박문열 조합원 노제를 하려고 작업장으로 이동 중이다. 사진=유성기업지회
▲ 유성기업지회 조합원들이 고 박문열 조합원 노제를 하려고 작업장으로 이동 중이다. 사진=유성기업지회

금속노조를 파괴하려고 어용노조를 설립하고 회유와 협박이 일상이 되면서 현장의 차별은 더욱 커졌다. 어용노조와는 신속하게 협상을 끝내고 금속노조와는 교섭을 질질 끌라는 창조컨설팅의 ‘조언’은 유성기업 사측의 ‘신념’처럼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것을 반복누적한 결과, 어용노조와 금속노조는 일당으로 8000원의 임금격차가 생겼다. 이로 인해 금속노조 조합원 중 60명이 법정 최저임금에 미달하자 회사는 이들만 상여를 월할로 분할지급하고 있다. 이에 반해 사측 불법에 처벌은 한없이 가볍다. 사측 노조파괴에 처벌은 무혐의, 증거불충분, 혐의없음을 반복하다가 노조의 재정신청이 있고서야 6년 만에 겨우 구속됐다. 그것도 실형은 단 1명에 그쳤다.

탄압에 노출된 조합원들은 하나 둘 쓰러져갔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몸으로 나타나는 “신체화 증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박문열 동지가 우리의 곁을 떠났고, 오동환 동지, 한광호 동지가 떠나갔다. 2018년에는 한 달 동안 3명의 노동자가 쓰러져 사경을 헤맸고, 그중 한 동지는 말과 행동을 잃어버렸다. 유성기업 노동자들의 정신건강을 염려한 노동부의 임시건강검진명령도 회사는 이유를 대며 걷어차 버렸다. 노동부 지청장도 고개를 내저은 사측의 행위에 처벌을 기대했으나 검찰은 내사종결하고 말았다. 급기야 국가인권위원회가 유성기업 노동자들의 정신건강에 개입해 실태조사를 진행했고 권고사항까지 발표했으나 역시나 회사는 불복해 행정소송 중이다. 급하게 추경예산을 통해 마련된 치유 자금은 노사의 합의가 있어야만 사용할 수 있다 한다. 물론 회사는 합의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 도성대 유성기업 지회장이 눈물로 박문열 동지를 보내는 조사를 하고 있다. 사진=유성기업지회
▲ 도성대 유성기업 지회장이 눈물로 박문열 동지를 보내는 조사를 하고 있다. 사진=유성기업지회

회사에게 교섭은 8년 전이나 지금이나 처벌을 피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노동자는 속절없이 쓰러지고 죽어가는데 교섭은 3개월에 한 번, 2개월에 한 번 잊을만하면 열린다. 회사에게 교섭은 했다는 기록만 남기면 되고 이 기록은 유시영 회장 재판에 면피용 증거로 쓰인다.

1987년 “배고파서 못 살겠다”던 생계형 투쟁은 2011년 죽지 않고 일할 권리를 찾는 생존형 투쟁으로 바뀌었다. 세상은 확실히 나아졌는데 유성기업은 오히려 반대가 아닌가 서글프다. 퇴근 후 버스 안에서 숨을 거둔 동료, 잠을 자다가 깨어나지 못한 동료, 공장에서 일하다가 갑자기 쓰러진 동료, 자신들의 목숨을 스스로 버려야 했던 동료를 보면서 야간노동의 심각함을 깨달았고 자연스럽게 “밤에는 잠 좀 자자”는 말이 나왔다. 

2019년 현재 주간연속2교대제는 상식이 되었지만 2011년 당시에는 획기적인 요구였다. 부품납품회사에서 좋은 조건으로 먼저 주간연속2교대제를 시행하는 것을 원청인 현대자동차는 용납할 수 없었다. 이것은 수고스럽게도 원청이 나서서 납품사의 민주노조를 깨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됐다. 유성기업 노조파괴를 배후조종한 현대자동차 재판은 발생 8년이 지났음에도 여태 1심조차 끝나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예측 가능한 삶을 갈구한다. 어느 대선 후보가 외친 “저녁이 있는 삶”은 그래서 많은 공감을 얻었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해 건강하게 일하고 정해진 시간에 퇴근해 가족과 친구와 함께 할 수 있는 삶은 분명 소중하다. 지옥 같은 공장을 벗어나도 편히 쉴 보금자리를 빼앗긴 노동자는 갈 곳이 없다. 1년 농사를 준비하는 농민을 보면서, 봄과 함께 찾아온 흐드러진 꽃들의 향연에도 마음을 빼앗길 수 없는 이유다.

▲ 유성기업 노동자 살리기 충남대책위원회가 충남도청에서 국가인권위 권고 100일에 즈음해 유성기업 사태 해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유성기업지회
▲ 유성기업 노동자 살리기 충남대책위원회가 충남도청에서 국가인권위 권고 100일에 즈음해 유성기업 사태 해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유성기업지회

노조파괴 8년의 역사, 2011년 5월18일 유성기업 직장폐쇄로 시작한 노조파괴의 비극이 이제 8년을 꽉 채운다. 이 모든 사태의 정점에 있는 유시영 회장은 결자해지의 자세로 교섭에 나와야 한다. 노동자에게 예측 가능한 일상과 저녁이 있는 삶을 돌려줘야 한다. 형제같은 동료관계, 잃어버린 보금자리를 다시 돌려줘야만 한다. 구속위기에 처해있는 배임과 횡령죄만 피하고 보자는 얄팍한 합의가 아니라, 진정으로 과오를 뉘우치고 피해자에게 사과하며 노사가 함께하는 회사를 만들겠다는 결단이 필요한 때다. 이제 정문을 넘었다. 지금 출근하는 유성의 모든 노동자가 보람찬 하루 일을 끝내고 이팝나무 화려한 꽃 터널을 지나 저녁이 있는 삶 속으로 퇴근하는 그런 날을, 간절하게 소망한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