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언론 실천은 내릴 수 없는 깃발
자유언론 실천은 내릴 수 없는 깃발
[이부영 이사장 연속기고2] 1975년 자유언론실천운동을 돌아본다

4. 대량해직과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결성, 민주화운동 참여

최종적인 해직언론인은 113명이었다. 내쫒긴 언론인들은 3월17일 즉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설립하고 부당해고 철회투쟁에 들어갔다. 그들은 매일 아침 출근 시간에 동아일보사 앞에 도열해서 동아일보 사주의 부당해고에 항의하고 자유언론의 대의에 복귀하도록 요구했다. 당시는 남부 베트남이 붕괴하고 있던 예민한 시기였다. 매일 백만 명씩 여의도 광장에 모여 반공궐기대회를 열고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된 살벌한 시기였다. 동아투위 사람들은 자신들의 대의에 충실하여 담담히 회사 앞에 도열하여 시위한 뒤 신문회관 앞까지 행진했다. 동아투위의 앞에는 험한 가시밭길이 가로막았다. 투위의 유인물 ‘동아투위 소식’을 배포했다가 여러 명이 구류에 넘겨졌다. 필자는 동아일보에서 쫒겨난 뒤에도 찾아오는 외신기자들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 외신기자를 비롯해서 외국인들과 내국인들의 접촉을 막고 처벌하기 위해 형법 104조 2항이 신설되었다. 바로 필자 같은 사람들을 처벌하려는 것이었다. 필자는 1975년 6월초에 중앙정보부에 체포되었고 동료이자 대학동창인 성유보 동아노조 조직부장도 잇따라 연행되었다. 두 사람은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그리고 필자에게는 긴급조치 9호와 형법 104조 2항(외국인에게 유신체제를 비판한 죄)이 적용되어 중앙정보부에 의해 구속되었다. 동아투위의 자유언론운동이 공산주의자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것을 선전하려는 엉성한 조작극이었다. 두 사람과 관련해서 동아투위 동료들이 수없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시달렸다. 억울한 마음으로 갇혀있으면서도 동료들에게는 미안했다. 2014년에 별세한 성유보 형과 필자는 2015년에 이른바 ‘청우회’ 사건에 대해 무죄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동아자유언론운동에 붉은 칠을 하려던 유신정권의 시도는 70년대 유신체제 긴급조치시대에는 그대로 통용되었다고 하겠다. 40년 만에 무죄선고를 받고 보니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었다. 최근 2019년에는 고문과 강제자백에 따른 피해에 대해 위자료 소송이 진행되었는데 1심에서 승소했다.

1977년말 2년 7개월만에 출옥해보니 동아투위 동료들은 아직도 자유언론에 대한 의욕과 투쟁에 충실하고 있었다. 안종필 위원장을 비롯한 여러 동지들이 긴급조치 9호 아래서 10·24선언 4주년을 맞아 ‘동아투위소식’에 ‘보도되지 않은 민주인권일지’ 125건을 펴내려고 하고 있었다. 유신정권에게 길들여진 이른바 제도언론들이 무시한 민족민주사건들을 기록하고 알리려는 시도였다. 이 자료들을 공개하고 배포하는 것은 바로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될 일이었다. 안종필 위원장을 비롯, 장윤환 윤활식 안성열 박종만 성유보 김종철 이기중 홍종민 정연주 등 10명의 투위원들이 구속되었다. 10명의 언론인들이 긴급조치9호 위반으로 구속된 대형 사건이었다. 그런데도 제도언론에서는 이 사건을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다. 이들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1심과 항소심을 받는 동안 법정을 민주주의와 언론자유에 대한 진지한 강의 장소로 바꿔놓았다. 동아투위는 더욱 단단하게 결속했다. 다만 안타까운 사실은 안종필 동아투위 위원장이 옥중에서 얻는 암으로 출옥 직후 별세한 일이었다. 안 위원장은 옥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필자는 출옥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감옥행에서 면제되었다. 그 대신 투옥된 투위원들의 옥바라지와 법정투쟁 뒷바라지를 맡았다.

1979년 10·26 박정희 피살로 유신체제가 끝나서 동아투위와 조선투위의 대량해직 사건이 해소되고 복직과 자유언론 실현으로 연결되기를 기대했지만, 전두환 등의 12·12쿠데타로부터 이어진 5·18 광주학살과 5공의 출현으로 70년대 유신 피해 언론인들의 원상회복은 무산되고 말았다. 더욱이 전두환 정권은 1980년에 전국적으로 수많은 언론인들을 해직시켰다. 70년대 해직언론인에 80년대 해직언론인들까지 합쳐져 언론인 수난시대는 계속됐다.

▲ 동아일보 언론인들은 1974년 10월24일 동아투위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다.
▲ 동아일보 언론인들은 1974년 10월24일 동아투위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다.
군사독재시대의 장기화 추세에 부닥쳐 해직언론인들도 자신들의 장래에 대해 깊이 고민해야 했다. 공고해진 군사독재의 벽을 앞에 놓고 저들이 무너지지 않는 이상 언론인으로 복귀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전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론인에 머물지 않고 군사독재정권을 물리치는 대열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하는 방향설정이 불가피해졌다. 그런가 하면 출판업의 길을 걷고자 하는 투위원들도 늘어났다. 출판도 넓은 의미의 언론의 길이기도 했다. 근현대사를 새로운 관점으로 조명하는 역사서적과 사회과학서적을 만들거나 번역 소개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동아 조선투위 사람들의 출판계 참여는 출판계의 분위기를 일신했다. 필자 자신도 생계에 보태고자 사회과학 서적과 문학 서적 혹은 역사물 번역에 종사하곤 했다.

필자를 비롯해서 성유보 임채정 김종철 정동익 등 동아투위원들은 민민협 민통련 민문협 전민련 등 재야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필자는 재야민주화운동에 참여하면서 투옥 빈도가 잦아졌다. 다섯 차례 도합 7년여 동안 투옥됐다. 동아투위는 70년대에 자유언론실천에 근거해서 언론민주화운동에 전념했다면 80년대에는 언론운동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재야민주화운동과 평화통일운동에까지 보폭을 넓혔다.

동아투위 위원들은 재야 민주화운동의 원로그룹과 학생운동 세대의 중간세대로서, 그리고 사회경험을 가진 실무책임자로서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1987년 6월항쟁에서 동아투위원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소임을 감당했다. 필자는 민민협(민중민주운동협의회) 공동대표, 민통련(민족통일민중운동연합) 상임위원장과 사무처장, 그리고 전민련(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의장을 맡아 일했다. 성유보 동지는 6월항쟁 당시 민통련 사무처장을 거쳐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사무처장을 수행했다.

필자는 6월항쟁 중에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이 은폐조작되어 있는 사실을 취재하여 감옥 밖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게 전달함으로써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되도록 했다. 해직언론인으로서 은폐-조작된 진실을 바로 알리고자 노력했다. 밖에서 6월항쟁의 실무책임을 수행했던 성유보, 임채정, 김종철, 정동익 투위원들도 민통련과 국본에서 6월항쟁 성공에 큰 역할을 해냈다. 그러나 야권의 분열로 정권교체에 실패하자 70년대 동아-조선 그리고 80년도 해직언론인 과제는 미완의 과제로 남겨졌다. 그 후유증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 동아자유언론수호위원회가 결성 40주년을 맞아 동아일보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동아일보는 쓰레기다”란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미디어오늘 자료사진
▲ 동아자유언론수호위원회가 결성 40주년을 맞아 동아일보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동아일보는 쓰레기다”란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미디어오늘 자료사진
5. 한겨레신문 창간의 의미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10주년이 되는 1984년 10월24일 동아투위와 조선투위는 공동성명에서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민주화운동이 터져나오는 마당에 유독 제도언론에서만은 조금의 민주화 요구도 표출되지 않음을 보고 한심스러운 느낌을 금하지 못한다. 양 투위는 민주언론이 이 땅에 확고히 수립될 때까지 계속될 민주언론운동에 동참하고 연대하고 협조할 것”을 다짐했다. 그로부터 두달 후인 12월19일 동아투위 조선투위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회원들과 뜻있는 출판인들이 주축이 되어 민주언론운동협의회(언협)가 창립되었다. 언협은 창립 이듬해인 1985년 6월15일 기관지 월간 ‘말’을 창간하고 제도언론이 다루지 않는 중요한 사건들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언협 의장으로서 송건호 선생이 발행인을 맡았다. 1986년 10월호에는 군사정권이 언론을 어떻게 조종했는가를 보여주는 520건의 ‘보도지침’(1985.10~1986.8)을 공개했다, 이 사건으로 김주언 한국일보 기자, 언협 김태홍 사무국장, 신홍범 박우정 실행위원이 구속되었다. 월간 ‘말’지는 70, 80년대 자유언론운동이 모색해온 대안언론의 역할울 수행하면서 민주화 시대에 어떤 언론을 수립해야 할까를 보여주었다.

한겨레신문의 창간은 민주화를 위한 국민항쟁이 열어준 새로운 언론환경, 신문제작에 뛰어들 수 있는 해직기자들의 존재, 그리고 제도언론에 절망하고 자유롭고 독립된 언론을 갈망하는 잠재적 독자층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맞아 들었기에 가능했다. 동아투위 이병주 위원장, 조선투위 정태기 위원장과 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의 김태홍 회장을 중심으로 6월항쟁 전후 논의를 계속하면서 송건호 언협 이사장을 대표로 모셨다. 국민주 모금으로 막대한 자금을 마련하기로 했고 안국동에 사무실을 차렸다. 1987년 10월 하순 폭넓은 의견을 수렴해서 제호를 ‘한겨레신문’으로 확정했다. 10월30일 창간발기인대회가 서울 명동YWCA 대강당에서 열렸다, 그러나 1987년 대선이 양김의 분열로 노태우의 승리로 귀결되자 국민모금운동의 열기는 싸늘하게 식었다. 그때 동아투위 강정문이 쓴 광고 한 줄이 물줄기를 되돌려놨다. “민주화는 한판의 승부가 아닙니다. 허탈과 좌절을 떨쳐버리고 한겨레신문 창간에 힘을 모아 주십시오!” 이렇게 하여 50억 원의 창간기금이 모였고 한겨레신문은 오늘도 발간되고 있다.

▲ 한겨레 창간호.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겨레 창간호.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6. 자유언론 실천은 내릴 수 없는 깃발

유신체제의 폭압에 맞서 시작된 자유언론 실천운동은 군사독재를 거쳐 탈냉전 민주화시대에도 아직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다. 민주화의 심화, 남북평화공존시대를 여는데 살아있는 실천과제로 작동하고 있다. 자유언론실천재단은 그 소임을 감당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필자 이부영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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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
장준하선생기념사업회 전 회장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전 상임의장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전 사무처장
14, 15, 16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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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2019-05-14 16:23:22
그때 동아투위 강정문이 쓴 광고 한 줄이 물줄기를 되돌려놨다. “민주화는 한판의 승부가 아닙니다. 허탈과 좌절을 떨쳐버리고 한겨레신문 창간에 힘을 모아 주십시오!” <<< 민주화, 그리고 공정한 사회는 단 한 번의 기회로 오지 않는다. 체계적이고, 촘촘한 법과 국민의 높은 지성, 그리고 참여가 단단한 민주주의를 만든다. 쫓기듯이, 한 방에 해결하려 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