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삼성바이오로직스가 분식회계 사실을 감추려고 공장 바닥을 뜯고 서버와 노트북을 숨겼다가 검찰에 압수당했다. 삼성바이오는 검찰 수사에 대비해 빼돌린 공용 서버와 노트북 등을 인천 송도공장 마룻바닥 아래에 숨겼다.
검찰은 7일 이 공장에서 수십 테라바이트의 대용량 서버 등을 발견하고 이를 숨긴 회사 보안 실무책임자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이 보안 실무책임자는 대리급으로 이 사람에게 증거인멸을 지시한 윗선이 더 있을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윗선으로 삼성전자 사업지원TF 소속 백아무개 상무를 지목하고 있다. 보안 실무책임자가 검찰에 사업지원TF 쪽 지시였다고 진술했다.
삼바, 이번엔 공장 바닥에 서버·노트북 숨겨
앞서 검찰은 백 상무 등은 자회사 삼성에피스 사장과 임직원의 컴퓨터와 핸드폰을 뒤져 ‘JY(이재용)’, ‘VIP(박근혜 전 대통령)’ 등의 단어가 들어간 문건과 보고서 등을 삭제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삼성바이오의 삼성에피스 회계처리가 연관됐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반면 이 소식을 1단 기사로 처리한 신문도 많았다. 한국일보와 동아일보는 이날 10면에 각각 1단 기사로 보도했다. 매일경제신문도 이 소식을 29면에 1단 기사로 처리했다.
한국일보는 이날 24면에 ‘삼성전자 일하고 싶은 기업 세계 2위’라는 기사를 2단 기사로 실었다.
박정희, 긴급조치 정당성 위해 ‘울릉도간첩단’ 꼭 필요했다
민청학련, 인민혁명당재건위사건이 터지기 직전 울릉도간첩단사건이 있었다. 단행본 ‘울릉도 1974’(최창남, 뿌리와이파리, 2012)에는 1974년 3월15일 긴급조치 시대 최초의 대규모 조직사건인 ‘울릉도간첩단사건’으로 영문도 모른 채 간첩이 된 시민 47명의 기구한 인생 이야기가 담겼다. 민청학련과 인혁당 주역들은 늦게나마 그 의로움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울릉도 사건의 47명은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다. 외롭게 10년, 20년 옥살이하고 세 사람은 사형까지 당했다.
1974년 2월 울릉도와 전북 등에서 47명의 사람들이 중앙정보부에 연행됐다. 이들은 끌려가 짧게는 2일, 길게는 30일 동안 불법 구금돼 구타와 고문당했다. 수사관들은 애당초 이들의 말을 듣지도 않았다. 이들은 잔인한 고문 끝에 결국 수사관이 불러주는 대로 조서를 받아 적고 지장을 찍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건은 1974년 3월15일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이 직접 나와 울릉도간첩단사건이란 이름으로 발표됐다.
그뒤 울릉도간첩단 사건은 조용히 잊혀졌다. 1973년 11월 최종길 서울대 교수를 고문하고 죽인 중앙정보부의 차철권이 울릉도 사건 조작의 장본인이다. 그는 최 교수 살인의혹으로 징계를 받았다가, 울릉도사건 덕분에 4개월 만에 사무관에서 서기관으로 특진했다.
이 단행본을 쓴 최창남 목사는 ‘노동의 새벽’, ‘저 놀부 두 손에 떡 들고’ 같은 민중가요를 작곡했던 노동운동가였다. 어린 시절 부천의 미군부대 옆에 살았다. 넝마주이와 부랑자, 매춘부가 모인 양동에서 세상을 배웠고 새봄교회를 만들어 가난한 자들과 함께 했다. 교회를 그만두고 노동운동에 참여했다가 1992년 다시 교회로 돌아와 2006년 일을 접었다. 최창남은 연세대 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 울릉도사건을 접한 뒤 살아남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한맺힌 삶을 기록했다.
재일교포간첩으로 발표된 이좌영은 전북 출신으로 일본에서 성공한 사업가였고 울릉도 출신으로 이 사건 때문에 사형당한 김용득과 친분이 있었다. 중앙정보부는 일본의 이좌영과 울릉도를 묶어 하나의 사건으로 만들었다.
영남대 법대를 나와 세무사였던 전영관(1930년생)은 사업에 실패해 울릉도에서 작은 오징어잡이 배 한척으로 어렵게 살았다.
중앙정보부 직원들은 1974년 2월 바람 찬 울릉도 밤실마을에 사는 14살 여중 1학년 전동희와 세 동생이 있는 집에 들이닥쳤다. 검정 양복을 입은 정보부원들은 어머니 김용희 씨(1937년생)와 전동희, 바로 밑 두 동생을 도동경찰서로 잡아갔다. 집에는 만 3살짜리 막내만 남았다. 아버지는 이미 경찰서에 잡혀와 있었다.
전동희와 두 동생은 다음날 새벽 풀려났지만 아버지와는 영영 이별이었다, 어머니도 10년의 긴 이별을 해야 했다. 중앙정보부는 아버지 전영관이 남파간첩이라 불리는 장조카 전덕술에게 포섭돼 월북해 간첩활동했고, 어머니 김용희도 남편과 함께 노동당에 입당했다고 꾸몄다. 유신정권은 중학교 1학년과 초등학교 어린이 2명, 만 3살의 아이만 남겨둔채 부부를 함께 구속하는 야만을 저질렀다.
반장인 동희가 선생님께 인사하려고 하자 선생은 부반장에게 인사를 대신하게 했고 신문을 보여줬다. 신문엔 아버지를 간첩단 우두머리로, 함께 붙들려 간 큰아버지와 사촌 오빠들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동네 사람들은 어린 동희를 빨갱이 새끼라고 손가락질했다.
배는 압수됐고 어린 동희는 동생들과 살기 위해 오징어를 말렸다. 집은 경매로 넘어갔다. 고등학교에 들어갔지만 학교를 자퇴해야 했다. 결국 대구의 이모가 하던 버선공장에 시다로 들어가 동생들과 함께 살았다.
전동희가 18살 때인 1977년 아버지는 사형 당했다. 옥중의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알릴 수도 없었다. 동희가 24살 때 어머니가 10년 옥살이에서 풀려났다. 고단한 20대를 보낸 동희는 30대 중반에 신장이 망가져 인공투석기로 생명을 이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