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아이가 아까워요. 카메라테스트라도 보시죠.”

전화 한 통마다 100만원이 나왔다. 아역 연예기획사(엔터테인먼트) 관계자들이 ‘부모 DB’를 보고 연락해 이렇게 운을 뗀다. 대회를 연 뒤 “상은 못 탔지만 아이가 예뻐서 기회를 주고 싶다”며 부모를 사무실까지 유도한다. “경쟁이 치열해 놓치면 안된다”, “꼭 잘 키우겠다”며 현장 결재를 압박하면 지갑이 열린다.

근래 폐업한 아역 연예기획사 K사는 이런 방식으로 2017년 6월부터 11개월 간 최소 202명에게서 1억9860여만원을 모았다. 아이가 카메라테스트를 받으면 부모에게 ‘소속비 100만원 내면 한 달 교육은 무료’라 했다. 이들은 한 달 후엔 ‘교육을 더 받자’며 월 120만원 가량의 기획 비용을 제시한다. 현혹된 부모는 카드를 긁는다.

부모는 곧 자신이 속은 것을 깨닫는다.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걸 보고서다. ‘소속비’부터 모호하고 교육은 부실하다. “전속 계약금, 소속비를 요구하면 일단 의심하라”는 말은 업계 오랜 말이다. 모르는 부모는 속고 기획사는 오히려 “오디션에 합격하려면 전속 계약을 맺어야 한다”고 유도도 한다. K사엔 100만원을 내놓고 아무 지원을 받지 못한 아이만 43명이 넘는다.

부모를 현혹하는 첫 단계는 행사다. 맘까페에 올라오는 ‘키즈모델 선발대회’, ‘키즈잡지 촬영’, ‘키즈 패션쇼’ 등의 행사 홍보다. 적게는 수십명, 많게는 300여명까지 희망자가 접수되고 이게 곧 부모 연락처 DB가 된다. 전 K사 관계자 A씨는 “실체가 없다. 겉만 화려하지 돈을 끌어모으기 위해 만든 행사”라고 했다.

기획사는 가장 예쁜 아이 몇 명만 빼놓고 나머지 부모 모두에게 ‘부모님께만 전화드린다’며 연락한다. 부모들은 이후 사무실에서 카메라테스트에 속고 “무조건 오늘 현장 결재해야 한다”는 말에 또 속는다. 기획사가 이미 전화로 “아버지가 와야 한다”거나 “그렇지 않으면 어머니가 전권을 가지고 오셔라”고 알린 후다. 심한 업체는 카드론 명함까지 준비해 대출을 권한다.

▲ 얼마전 사기 등 혐의로 구속된 윤아무개 이사가 근무했던 I사 홈페이지 갈무리. 화면의 키즈그룹 ‘아이라바’ 팀의 부모 상당수가 사기 피해를 호소했다.
▲ 얼마전 사기 등 혐의로 구속된 윤아무개 이사가 근무했던 I사 홈페이지 갈무리. 화면의 키즈그룹 ‘아이라바’ 팀의 부모 상당수가 사기 피해를 호소했다.

묻지마 소속 계약→교육비 폭탄→제작비 차용까지

K사는 부실업체로 유명했다. 지난해 3월 6개월간 교육과 행사 활동을 약속하고 아이 14명을 모집해 2988만원을 벌었다. 1명당 적으면 100만원 많으면 359만원을 냈다. 이 키즈그룹은 한 달 후 끝났다. 댄스 강사에게 수업료도 제대로 주지 않았고 활동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부모들은 즉각 환불 요청을 했으나 지금까지 대다수가 돈을 받지 못했다.

피해 규모가 수천만원인 사례도 적지 않다. I사는 극단적 사례다. 2년간 15명으로부터 약 5억원을 챙겼다. 한 11살 아이 어머니는 3600여만 원을 주고 대부분 받지 못했다. 2000만원은 2년간 연예활동과 교육을 보장한다는 ‘전속 계약금’, 1680만원은 ‘1:1 교육비’였다. 1시간 23만원에 달한 개인 교습은 ‘프로모션으로 전액 환불할테니 선입금만 해달라’며 부탁한 것이다. 업체는 그때마다 드라마 주연급 캐스팅이나 이를 위한 철저한 교육을 약속했다. 모두 허위였다.

이런 업체의 공통점은 부모에게 돈까지 빌린단 것이다. B사 강아무개 대표는 잦은 차용으로 논란이다. “일주일 내 갚을게요” “수중에 10만원도 없습니다. 도와주세요”라며 빌리고 1년 넘게 갚지 않고 있다. 미디어오늘이 확인한 사례만 3명으로 각 250만원, 300만원, 1000만원 선이다. 이 업체에 피해를 호소하는 부모는 3명이 더 있다. 한 어머니는 K사 김아무개 전 이사에게 11차례 걸쳐 8000만원을 빌려주고 1500만원을 받지 못한 채 연락이 두절됐다.

▲ 케이아트 엔터테인먼트가 1년 가량 아역 지망생 부모들로부터 지급받은 총액. 일부는 환불됐다. 각종 대회를 열어 희망자를 받으면 연락처 등 개인정보가 데이터베이스화됐다.
▲ K사가 1년 가량 아역 지망생 부모들로부터 지급받은 총액. 일부는 환불됐다. 각종 대회를 열어 희망자를 받으면 연락처 등 개인정보가 데이터베이스화됐다.

“없는 돈 부모 돈으로, 그 돈은 또 다른 부모 돈으로”

“마이너스에서 시작하는 카드 돌려막기죠.” A씨는 기획업자들이 바닥난 금고를 부모들 돈으로 메꾸고, 이 돈은 또 다른 부모로부터 받아 메꾸는 악순환이라 지적했다. 전문성과 인맥 없이 무리하게 일을 벌이는 기획업자가 원인이라는 것이다. 부도덕한 업자는 이에 더해 ‘캐스팅 따놨다’거나 ‘영화 제작 준비 다 됐다’는 거짓말로 안심시켜 돈을 요구한다.

패션쇼 등 기획행사도 제대로 된 계획이 없을 때가 많다. “일단 시작하고 아니면 그만인 식”으로 추진되니 그 과정에서 비용은 써놓고 수익은 내지 못한다. 부모들에게 각종 약속을 하며 돈을 받아냈지만 약속도 지키지 못하고 자본도 잃는 경우다.

그럼에도 반복되는 배경엔 법망 사각지대가 있다. 부모들은 “업체가 아이를 방치했다”거나 “계약 당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며 사기를 주장하지만 죄를 입증하기 어렵다. 애초부터 자신을 완전히 속이려 했다는 의도(기망의 고의)를 밝혀야 한다. 대부분 기획사는 지망생 프로필 사진이라도 찍어두며 캐스팅 성사를 위한 노력도 구색을 갖춘다. 실제 아이를 방치한 기획사라 해도 법적으로 유리하다.

전속계약금이 터무니 없어도 계약이기 때문에 보호받는다. 양쪽이 합의한 계약은 내용 자체를 문제 삼기 힘들다. 한 어머니 B씨는 B사와 전속계약을 맺으며 3000만원을 냈다. “특정 오디션에 붙으면 필히 전속계약을 해야 한다”는 말에 맺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업체가 애초 약속과 다르고 나태하다고 여겨 계약 해지를 요구했다. 업체는 “노력을 다 했다. B씨 쪽이 되레 계약 의무를 위반한다”며 반박했다. B씨는 지난해 6월 업체를 사기 및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고소했으나 무혐의났다.


부실업자, 업체만 바꾸고 기획사업 계속
▲ 전속계약을 필수조건으로 거는 기획사 사례(왼쪽)와 기획업자에 돈을 빌려준 부모가 상환을 독촉하는 카카오톡 대화 내용.
▲ 전속계약을 필수조건으로 거는 기획사 사례(왼쪽)와 기획업자에 돈을 빌려준 부모가 상환을 독촉하는 카카오톡 대화 내용.
▲ 부모에게서 돈을 빌려 상환을 약속하는 기획업자.
▲ 부모에게서 돈을 빌려 상환을 약속하는 기획업자.


결국 손해배상이나 부당이득 반환 소송 등 민사소송이 대안으로 남지만 이 또한 쉽지 않다. 익명을 요구한 한 변호사는 “연예인이면 기획사가 인센티브로 유인해야 하니 계약금을 주는 식이지만 아역 지망생 경우 무명이니 활동비나 수익배분 형식은 다양해질 수 있다”며 “민사소송도 사기의 고의성과 피해 부당성을 입증해야 한다. 애초 계약을 하지 않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 말했다.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에도 마땅한 규제책은 없다. 이 법은 금전 사기를 방지하기 위해 부정한 방법으로 업체를 등록하거나 영업정지명령에도 영업을 계속했을 경우 업체 등록을 취소한다. I사 윤아무개 대표는 3개 업체를 운영하며 사기행각을 반복했으나 지인을 ‘대리사장’으로 앉혀 법망을 빠져나갔다. K사 김아무개 전 이사는 현재 또다른 기획사를 운영 중인데 그의 이름과 두 업체 모두 한국콘텐츠진흥원 ‘대중문화예술 종합정보시스템’에 등록돼있지 않다.

부모들이 기획업자 말에 속는 이유는 두 가지다. 관련 지식이 부족해 업체 말을 금방 수긍해버리고, “아이 꿈을 실현시켜 주겠단” 욕심도 있다. 돈을 빌려준 부모들은 “안 빌려주면 아이에게 덜 신경쓸까봐”, “돈이 없으면 드라마 제작이 안된다고 하니” 빌려줬다고 말했다. B사처럼 오디션 진행 도중 개입해 합격과 전속계약을 교환하는 업체도 있다.

“부모들 자기객관화가 부족하다”는 비판도 있다. 전 기획사 관계자 A씨는 “어린 아이가 연기·노래 등을 잘하면 얼마나 잘하겠느냐. 말도 안되는 설득에 돈을 버리는 부모들이 한둘이 아니”라며 “프로필 사진은 웬만한 스튜디오에서 5만 원만 줘도 찍을 수 있다. 부모들이 사리 판별을 잘 해야 업계도 자정작용이 생긴다”고 밝혔다. A씨는 부모들이 질 좋은 교육을 하는 학원을 찾아가거나 건전한 기획사나 제작사 오디션을 찾아야 한다 조언했다.

부실업체와 달리 건전하게 운영되는 중소업체도 적지 않다. 이들 업체는 한 달에 30만 원 이하 교육비만 받거나 받지 않고, 수익이 나면 일정 비율로 지망생과 배분한다. 부실업체 블랙리스트, 추천업체 화이트리스트를 만들자는 제안도 있지만 명예훼손·업무방해 소송으로 녹록치 않다. 실제 B사와 피해를 주장하는 부모들은 무고죄와 명예훼손죄로 서로를 고소했다.

사기 관행이 횡행하자 아역 연예기획사 ‘뜨는별엔터테인먼트’는 지난해 11월 5가지 사기 유형을 정리했다. ①잡지모델 선발대회 등을 열고 돈을 요구하는 대회 참가비 요구형 ②신생 제작사가 새 프로그램 오디션을 열고 돈을 요구하는 신생제작사 오디션 유형 ③연기학원 운영하지 않는 기획업자가 전속금을 요구하는 고액 에이전시 유형 ④아역배우 준비를 제안하며 부대 비용을 요구하는 배우 제안 유형 ⑤유명 잡지사나 무허가 아동잡지를 내면서 참여비를 요구하는 잡지모델 제안형 등이다. 

강아무개 대표와 김아무개 이사는 차용금에 대해 “차용금이 아니라 소속 배우 부모가 활동·제작에 필요한 비용을 지원하는 성격”이라며 “의사도 미리 물어봤고 합의 하에 전달된 지원금”이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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