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적폐청산이 쉽지 않다.

김명중 EBS 사장이 2013년 당시 김진혁 PD(현 한예종 교수)가 제작하던 반민특위 다큐 중단 건과 2015~2016년 박근혜 홍보영상(희망나눔 캠페인) 제작 등을 지난달 30일 EBS 감사에 특별감사 청구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EBS 노조는 반민특위 다큐 중단 책임이 있는 부사장 신임투표를 사측이 무시하고 돌연 특별감사를 청구했다며 반발했다. 신뢰가 깨진 상황에서 사측이 노조에 제안한 ‘진실 규명을 위한 위원회(진실위원회)’ 설치도 난항을 겪고 있다.

‘반민특위 다큐제작 중단’과 ‘박근혜 홍보영상’은 오래전 불거진 문제다. 촛불집회로 대통령을 바꿨지만 EBS에선 적폐청산 움직임이 없었다. 결국 EBS 사측이 이제 와서 다큐 중단과 박근혜 홍보영상을 조사하자고 나온 건 진짜 진상조사와 적폐청산을 위한 게 아니라 현 체제 유지를 위한 궁여지책이라는 게 EBS 주변의 평가다.

EBS를 둘러싼 논란은 한 두건이 아니다. 박환성 독립PD 사망 전 EBS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독립(외주)제작사를 상대로 한 ‘갑질’의 진상, 제작사가 만든 수학 캐릭터를 무단으로 사용했다는 주장, 아직 수면위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확인이 더 필요한 의혹들도 남아있다. 이미 제작사 대표 A씨가 지난해 1월부터 수차례 국민신문고에 EBS의 여러 문제점을 고발했다. 그럼에도 EBS가 지금까지 무사했던 이유는 관련 기관들이 EBS를 거의 조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EBS 로고
▲ EBS 로고

1차 책임기관은 방송통신위원회(위원장 이효성, 방통위)다. 한국교육방송공사법을 보면 EBS 임원은 방통위가 임명하는 사장, 감사와 사장이 임명하는 부사장 등 3명이다. EBS의 독립성과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사회를 두는데 이사 9명 역시 방통위가 임명한다. 하지만 방통위는 인사권만 휘두르고 관리·감독 책임은 내려놨다고 평할 만하다.

지난해 답변 복사·붙여넣기 한 방통위, 올해는 “조사하기 곤란해”

A씨가 지난 2월1일 국민신문고에 EBS의 갑질과 박근혜 홍보영상 등을 문제제기했다. 과거에 두 차례나 민원을 넣었는데 납득할 수 없는 결과가 나왔으니 재조사해달라는 요구였다. 그러자 지난 3월7일 방통위 사무처 운영지원과는 “EBS는 한국교육방송공사법에 따라 내부감사는 EBS 감사가 실시하고 외부 감사는 감사원법에 따라 감사원이 실시한다고 규정하고 있다”며 “이에 따라 문제제기한 사항은 방통위에서 조사하기 곤란하다”고 답했다.

A씨는 지난해 1월과 3월 두 차례 국민신문고에 EBS 관련 민원을 넣었다.

지난해 1월24일 박근혜 홍보영상(관영방송)을 제기했다. 다음달인 2월13일 방통위 사무처 방송기반국 편성평가정책과는 “귀하의 민원내용은 ‘방송사의 제작과정의 갑질에 대한 조사 요청’과 관련한 것으로 이해된다”며 “(2017년) 12월 관계부처와 외주제작시장 불공정 관행개선 종합대책을 발표해 불공정 거래관행 전반에 대해 5개부처 합동 실태조사를 실시할 계획이며 이번 사안도 실태조사 추진시 참고하겠다”고 답했다. ‘참고하겠다’는 미온적인 표현에 대해 A씨는 자신을 참고인으로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이후 답은 없었다.

A씨는 같은해 3월13일 부당한 단가 책정이나 작업지시 등 EBS의 갑질을 A4용지 약 19장에 걸쳐 작성해 민원을 넣었다. 구구절절 억울함을 호소한 시민에게 방통위가 한 일은 2월달에 했던 답을 그대로 복사해서 붙여 넣은 것이다. 서로 다른 민원이라 민원신청번호가 다른데 방통위는 두 달 전 답변을 붙여 넣으면서 두 달 전 민원신청번호까지 베껴 적었다.

▲ 왼쪽은 지난해 1월25일 민원에 대한 방통위 2월13일자 답변. 오른쪽은 지난해 3월15일 민원에 대한 방통위 4월17일자 답변. 처리기관 접수번호도 서로 다르다. 하지만 답변내용은 토씨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다. 심지어 민원신청번호(파란박스 표시)까지 똑같은데 해당 번호는 1월에 넣은 민원신청번호다. 4월 답변할 때 2월에 했던 답변을 그대로 복사해서 붙여넣은 것으로 확인됐다.
▲ 왼쪽은 지난해 1월25일 민원에 대한 방통위 2월13일자 답변. 오른쪽은 지난해 3월15일 민원에 대한 방통위 4월17일자 답변. 처리기관 접수번호도 서로 다르다. 하지만 답변내용은 토씨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다. 심지어 민원신청번호(파란박스 표시)까지 똑같은데 해당 번호는 1월에 넣은 민원신청번호다. 4월 답변할 때 2월에 했던 답변을 그대로 복사해서 붙여넣은 것으로 확인됐다.

A씨는 지난해 10월 방통위에 항의전화를 걸었다. 통화 녹취를 보면 방통위 담당자는 “내 실수”라며 답변을 그대로 붙여넣은 사실을 인정했다. 방통위 담당자는 “(1월과 3월)질의 내용이 같아서 그랬다”고 말했다. 하지만 A씨는 1월에 청와대 홍보영상을 문제제기했고, 3월에 EBS의 갑질을 문제 삼았다. A씨가 “EBS를 조사했느냐”고 묻자 담당자는 “EBS 통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답변을 받았다”며 “(해당) 답변이 부처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했다.

감사원 “이미 조사해…이후 제보는 회신없이 종결”

감사원(원장 최재형) 역시 EBS의 답변을 A씨에게 전하는 수준에 그쳤다.

한 예로 EBS가 A씨에게 ‘선금을 주지 않고 계약서없이 사업을 진행했다’는 주장에 대해 지난해 3월 감사원은 “제작여건상 절차 부담을 줄이고자 구두계약을 체결했다. 제작 소요 시간이 단기간이라 선금을 지급하지 않았다”는 EBS의 답변을 A씨에게 전했다.

감사원은 “향후 구두계약보다 서면계약을 체결하도록 계약서 관리 방식을 개선하고 제작비 지급절차 개선방안을 검토하겠다”는 EBS 답변도 전했다.

▲ 감사원은 EBS의 답변을 전한 뒤 앞으로는 동일 유사한 제보를 회신없이 종결하겠다고 했다.
▲ 감사원은 EBS의 답변을 전한 뒤 앞으로는 동일 유사한 제보를 회신없이 종결하겠다고 했다.

A씨가 올해 문제를 다시 제기하자 감사원은 지난 3월20일 A씨에게 “EBS 관련 제보 건은 감사원에서 이미 조사를 한 사항으로 지난해 3월 회신 내용을 참고하길 바란다”고 했다.

앞으로 해당 내용을 제보받지 않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감사원은 규정을 이유로 “동일·유사한 내용으로 3회 이상 제기된 감사제보는 회신 없이 종결하도록 돼 있다”며 “이후 제기되는 동일·유사한 내용의 감사제보는 회신 없이 종결한다”고 했다.

관련 정부기관의 미온적인 감시역할 조차 끝난 셈이다. 다시 공은 EBS 노사에게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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