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결성된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전노운협)는 87년 7~9월 노동자대투쟁 이후 터져 나오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전국적으로 묶어내는 역할을 했다. 전노운협은 1989년 2월 현대중공업 식칼테러, 1990년 4월 KBS 서기원 사장 퇴진투쟁 등 여러 업종의 노동자들 목소리를 한데 묶어 전국적 이슈로 만들었다. 1990년 출범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이 대부분 제조업 노동자로만 이뤄진 한계도 전노운협의 효과적인 지원 덕분에 극복할 수 있었다.

그 전노운협의 기관지 ‘노동운동’은 차명진 전 의원이 편집을 책임졌다. 기관지 ‘노동운동’은 1989년 10월 창간호부터 주류언론이 외면한 다양한 바닥 민심을 전했다. ‘노동운동’은 1989년 9월8일 MBC노조의 파업을 직접 취재해 “MBC 내부의 노사 권리다툼을 넘어 ‘방송민주화’를 위한 진통”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지식인들이 모여 만들었던 전노운협은 이내 안에서부터 분열됐다. 차명진 전 의원이 속한 김문수 그룹은 전노운협 안에서 합법적 진보정당인 ‘민중당’ 창당을 추진하면서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그룹과 대립했다. 노동운동을 통한 사회민주화를 꿈꿨던 이들은 전노운협을 끝내 분열시켰다.

▲ 차명진 전 자유한국당 의원. 사진=차명진 페이스북
▲ 차명진 전 자유한국당 의원. 사진=차명진 페이스북
차 전 의원은 1979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들어간 직후부터 운동권이 됐다. 2학년때 신군부에 의해 연행돼 강제징집됐고 복학한 뒤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당시 구로공단과 인천, 부천지역에서 영향력을 넓혀가던 김문수의 오른팔이 됐다. 김문수가 1985년 늦봄 구로동맹파업을 계기로 만든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에도 가입했다. 김문수가 1986년 5·3 인천사태로 구속되자 서노련은 심상정 의원이 이끌었다.

차 전 의원은 최고로 강한 노동자란 뜻의 ‘최강노’란 이름으로 서노련과 민중당 기관지에 시사만평도 그렸다.

감옥에서 나온 김문수가 1989년 만든 민중당은 1992년 총선에서 참패했다. 현실정치의 높은 벽 앞에 김문수와 차명진 같은 지식인들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구 소련이 페레스트로이카(개혁) 바람에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하면서 대안을 찾는답시고 여기저기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결국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고 김문수는 1996년 경기 부천·소사에서 신한국당으로 출마해 당선돼 그곳에서만 내리 3선을 기록한다. 혁명을 꿈꾸던 젊은이는 한때 자신들이 타도하려 했던 정당에 올라타 국회의원이 됐다.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한국 노동운동은 급격하게 성장했다. 곳곳에서 노조가 만들어졌다. 당시 바닥에 뿌리 내렸던 지식인 노동자들은 김문수나 차 전 의원 같은 이들을 향해 “그들은 높은 자리로 가려는 욕망 때문에 핑계거리를 찾았을 뿐 1987년 이후 노동운동은 거세게 성장하고 있었다”고 했다.

▲ 태극기집회에 참가한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사진=김문수 페이스북
▲ 태극기집회에 참가한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사진=김문수 페이스북
차 전 의원도 1996년부터 김문수 의원의 보좌관으로 함께했다. 차 전 의원은 2006년 김문수 의원이 경기도지사에 출마하려고 비운 지역구 국회의원 자리를 꿰찬 뒤 2008년 재선에도 성공했다. 국회의원에게 최대 고비는 재선인데, 이 재선만 넘어서면 탄탄대로다. 그런데 차 전 의원은 2012년, 2016년 총선에서 내리 고배를 마시고 종편 등 여러 방송을 기웃거리는 정치평론가가 됐다.

급기야 지난달 세월호 유가족에게 막말을 쏟아내 세간의 입방아에 올랐다. 서울대 정치학과 동기들이 언론사니 대학원 졸업 같이 번듯한 길로 진입할 1986년 5월3일 인천에서 불타는 경찰차 앞에서 백골단의 진입을 막기 위해 공중전화 부스를 쓰러뜨려 바리케이트를 쳤던 차명진은 30년이 지난 지금 욕망의 수렁에서 출구를 찾지 못해 헤매고 있다. 서글픈 한국현대사의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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