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 전 이야기다. 한 언론학자가 학생들에게 실험을 했다. 45분쯤인 한 지상파 메인뉴스를 다 보여준 직후에 빈 종이에 생각나는 뉴스를 적어보라고 했다. 90% 넘는 학생이 3개 이상을 적지 못했다.

그렇다. 우리 뉴스는 늘 화려한 화면과 요란한 문장을 사용하지만 수용자에겐 와 닿지 않는다. 당시만 해도 메인뉴스의 모든 리포트는 1분30초로 제한돼 있었다. 이 짧은 시간에 뭔가 보여줘야 해 기자들은 좋은 그림만 찾아다녔다.

그러나 ‘1분30초’는 기자들이 만들어 낸 허상이다. 1989년 5월14일 MBC가 보도한 ‘도봉구 신방학국등학교 최종순 교사의 특수교육 방식 고발’이란 기사는 한 꼭지가 무려 11분39초다.

▲ 뉴스 보도 자료사진. ⓒ gettyimagesbank
▲ 뉴스 보도 자료사진. ⓒ gettyimagesbank
1989년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결성된 해다. 이 기사는 보름 뒤 5월28일 결성될 전교조를 방해하기 위한 목적인 게 분명했다. 물론 기자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11분39초라는 기사의 분량만 봐도 파격적이다.

기사 도입부에 당시 손석희 앵커는 “어린이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가치관을 갑작스럽게 심어줄 때 거기에는 혼란이 따를 것이고 먼 훗날 그 어린이가 오도됐을 때 그 책임은 누가 져야될 지 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라며 해당 교사의 무리한 교육, 즉 이념 교육에 우려를 드러냈다.

당시 교육부(문교부)와 서울시교육청(서울시교육위)은 교원노조 결성을 집요하게 방해했다. 학부모를 동원해 의식화 교사를 고발하고, 교장과 교감을 동원하고, 고참 교사와 젊은 교사의 갈등을 유발하고, 노조결성 규탄 집회를 여는 등 온갖 방법을 다 사용했다.

당시 최 교사는 교실 뒤 게시판에 붙인 한반도 지도를 붉은색과 흰색으로 나누지 않고 모두 파란색으로 표시하고, 분단(모둠) 이름을 아이들이 직접 정하게 했다. 덕분에 말썽천재조, 핵폭탄과 유도탄조, 천방지축조 같은 색다른 이름이 나왔다. 아이들은 보물섬 만화를 보고 이런 분단 이름을 스스로 정했다. 최종순 교사는 이 기사 때문에 전교조 결성도 하기 전에 해고됐다.

30년 전인데도 필요하면 12분 가까운 파격적인 길이의 리포트를 쏟아냈던 지상파 뉴스는 지금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수상기로 뉴스를 보지 않는 젊은 세대를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지만 효과는 그리 크지 않다.

이번 고성 산불 보도를 보면서 지상파 뉴스가 30년 전의 파격조차 잊어버리고 낡은 습관에 사로 잡힌 듯한 인상을 받았다. 한결같이 불이 보이는 화려한 그림 앞에서 마이크를 잡으려는 형식만 고민할 뿐 내용면에선 우왕좌왕했다.

▲ 산불취재에 나선 기자들이 화염속에서 취재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 산불취재에 나선 기자들이 화염속에서 취재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부산에서 기자생활을 했기에 익숙한 장면이 있다. 태풍 올 때마다 남항 방파제 앞엔 비 맞고 서 있는 방송기자가 꼭 있었다. 몸도 가누기 힘든 강풍에 무방비로 노출돼 눈도 제대로 못뜬채 서 있는 가학적 모습의 방송기자들이 안쓰러웠다. 도대체 언제까지 태풍이 오면 너울성 파도가 넘실대는 위험천만한 방파제 끝에 기자들을 등 떠밀건지.

이렇게 위험을 감수하면 시청자에게 전할 유익한 정보라도 하나 더 얻어지는가. 오히려 시간만 낭비할 뿐인데도 재난만 일어나면 습관처럼 이런 그림을 반복한다. 도대체 누굴 위한 그림인가. 방송사의 높은 양반들에게 나 열심히 하고 있다고 눈도장 찍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아니다.

재난보도는 정보가 최우선이다. 이번처럼 광범위한 지역에서 불이 나면 현장기자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그냥 좋은 그림만 찾을 수밖에 없다. 이럴 바엔 지자체 상황실로 가 어디서 불이 났고 어느 방향으로 향하는지만 보여줘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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