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요즘 참 힘드시죠?”

2008년 10월13일 이명박 대통령의 쉰 목소리가 KBS 라디오 전파를 탔다. MB 정권 시절 방송 공정성 침해 사례로 꼽히는 ‘MB 라디오 주례 연설’이다. 20년 만에 부활한 대통령 주례 연설은 KBS PD들의 거센 반발에도 강행됐다. 2013년 2월18일 109회로 막을 내리기 전까지 논란이었다. 전국언론노조 KBS본부는 “MB 주례 연설은 1990년대 이후 KBS 방송 역사상 가장 수치스런 프로그램”이라고 비판했다.

MB 정권이 정연주 사장을 몰아낸 뒤 KBS 사장직에 오른 이병순 사장. 그는 2008년 10월13일 KBS 국정감사에서 “KBS 편성은 독자적으로 하고 있다. 청와대나 정부 지시나 압력은 없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과 달랐다. 

당시 MB 청와대 문건은 정권 차원의 KBS 편성 개입 정황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KBS진실과미래위원회(위원장 정필모·이하 진미위)가 지난 2일 채택·의결한 ‘대통령 라디오 주례연설에 대한 정부개입 문건 내용 조사’ 보고서는 진미위가 정보공개청구 등을 통해 입수한 2008년 10월13~16일자 청와대 문건을 바탕으로 KBS 주례 연설 편성에 청와대가 개입한 정황을 담았다.

▲ 지난해 3월 이명박 전 대통령이 뇌물수수 등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서 조사를 마치고 귀가하고 있다. 사진=사진공동취재단
▲ 지난해 3월 이명박 전 대통령이 뇌물수수 등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서 조사를 마치고 귀가하고 있다. 사진=사진공동취재단
“라디오 연설 활성화 방안 강구”

당시 KBS 라디오 책임자들은 “10월13일 방송분만 1회성으로 편성키로 했으며 오전 7~8시 사이 방송할 계획”이라고 밝혔으나 청와대 문건을 보면 라디오 연설은 이미 정례화가 결정된 상태였다. 

2008년 10월13일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작성한 문건 ‘대통령 라디오 연설 관련 반응’을 보면 ‘조치 고려사항’으로 “라디오 연설이 좀 더 활성화될 수 있도록 다양한 방안 강구”, “1주는 대통령 말씀, 1주는 대통령 말씀에 대한 국민 발언 등을 구성해 관심과 참여도를 높이는 방안 검토”라는 대목이 있다.

이 문건 속 “분량은 적절하지만 방송 시간대는 다소 조정 필요”라는 소제목 밑에 “8~10분 정도가 집중력 유지에 가장 좋다는 여론”, “8시 이전에는 출근·등교 준비 등으로 어수선한 시간이어서 8시 이후로 늦추는 것이 청취율 제고에 낫다는 반응” 등 각계 여론 동향을 살핀 정황이 있다.

2008년 10월13일 청와대 대변인실에서 작성한 문건 ‘위클리 리포트’(WEEKLY REPORT)를 보면 별표 표시(※)와 함께 “VIP, 오늘 라디오 연설과 관련, 청취자 패널 구축 운영 검토”라는 소제목이 쓰여 있고 그 밑에 “대국민 설득력이 지속 보완되는 라디오 정담이 될 수 있도록 할 필요”라고 적시돼 있다. 

당초 MBC도 MB 주례 연설 방송을 한다고 했으나 전국언론노조 MBC본부 반발로 무산됐다. SBS는 일찌감치 방송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문건에는 이들 방송사를 비판하는 내용도 담겼다. “일부 방송사들의 편협한 행태에 대한 불만도 제기”라는 소제목 밑에 “대통령의 첫 라디오 연설이라는 상징적 의미에도 불구,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국민의 알 권리를 침해했다며 비난”이라는 촌평이 첨부됐다.

이에 반해 “방송 3사에서는 방송 거부 및 야당의 반론권 보장 요구에 대해 BH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보다 매끄러운 운영을 건의”하고 있다는 대목과 이를 뒷받침하는 공영방송 관계자들의 조언(ex.MBC 관계자 “노조와 PD들이 항의하는 상황에서 BH에서 방송사들간 협의도 없이 자율을 명목으로 테이프를 주고 알아서 보도하라면 방송사만 난처”) 등을 고려하면 방송 편성과 운영권이 청와대에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 2008년 10월13일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작성한 문건 ‘대통령 라디오 연설 관련 반응’을 보면 ‘조치 고려사항’으로 “라디오 연설이 좀 더 활성화될 수 있도록 다양한 방안 강구”, “1주는 대통령 말씀, 1주는 대통령 말씀에 대한 국민 발언 등을 구성해 관심과 참여도를 높이는 방안 검토”라는 대목이 있다. 사진=KBS진미위 자료
▲ 2008년 10월13일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작성한 문건 ‘대통령 라디오 연설 관련 반응’을 보면 ‘조치 고려사항’으로 “라디오 연설이 좀 더 활성화될 수 있도록 다양한 방안 강구”, “1주는 대통령 말씀, 1주는 대통령 말씀에 대한 국민 발언 등을 구성해 관심과 참여도를 높이는 방안 검토”라는 대목이 있다. 사진=KBS진미위 자료
청와대와 KBS 경영진이 긴밀히 조율하고 있는 정황도 문건에 담겼다. 10월15일과 16일 청와대 정무수석실이 작성한 ‘국정감사 동향’에는 대통령 방송 연설과 같은 시간대·분량으로 정세균 민주당 대표의 반론권을 보장해달라는 민주당 입장이 담겼다.

청와대는 이에 “‘김진표 반론을 이미 허용했다’는 KBS 입장을 명백하게 밝힐 것과 ‘신중하고 합리적인 처신’ 당부 필요”를 주문했는데 KBS는 10월13일 오전 KBS 라디오 ‘안녕하십니까 민경욱입니다’에서 금융위기를 극복하자는 이명박 대통령의 첫 라디오 연설을 8분30여초 방송한 뒤 이어 김진표 민주당 최고위원 인터뷰를 반론 형태로 내보냈다.

진미위는 “(문건 속) ‘당부’의 대상이 누구인지는 문맥상 정확하지 않으나 10월13일 국감에서 김진표 최고위원에게 반론권을 줬다고 대답한 이병순 사장인 것으로 추정된다”며 “문건 내용으로 볼 때 당시 청와대는 야당 대표 연설이 대통령 연설과 대등하게 방송되는 방식에 부정적 입장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이런 청와대 입장이 주례 연설 방송 제작 방식 변경 무산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MB 라디오 연설, 연이은 구설

MB의 라디오 주례 연설은 ‘편파 방송’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2009년 2월9일 연설에서 용산참사에 “책임자 사퇴 여부는 그렇게 시급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진상 규명과 책임자 사퇴 여론을 일축했다.

외국 순방에서 돌아온 직후인 2009년 3월9일에는 “외국의 여야 협력이 부럽다”며 야당과 비판 여론을 ‘무조건 반대’로 몰아붙이는 인식을 드러내 질타를 받았다. 2011년 5월30일 방송에서는 유성기업 파업에 관해 “연봉 7000만원을 받는다는 근로자들이 불법 파업을 벌이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고 주장을 쏟는 등 공정성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선거 국면에 라디오 연설이 강행돼 논란이 일기도 했다. 2009년 4·29 재보선을 앞두고 4월6일과 20일 방송이 송출됐고, 2012년 4·11 총선 9일 전인 2일 대통령 라디오 주례 연설이 강행돼 선거 개입 논란도 제기됐다. 

진미위는 “KBS는 이에 대해 거의 조치를 취한 적이 없었다”며 “특히 심의가 라디오 주례 연설 시작 후 1년 가까이 이뤄지지 않았다. 간혹 심의한 경우에도 일체의 논평이나 지적 없이 대통령 발언을 나열만 했다”고 지적했다.

▲ 청와대와 KBS 경영진이 긴밀히 조율하고 있는 정황도 문건에 담겼다. 10월15일과 16일 청와대 정무수석실이 작성한 문건 ‘국정감사 동향’. 사진=KBS진미위 자료
▲ 청와대와 KBS 경영진이 긴밀히 조율하고 있는 정황도 문건에 담겼다. 10월15일과 16일 청와대 정무수석실이 작성한 문건 ‘국정감사 동향’. 사진=KBS진미위 자료

국가정보원이 개입한 의혹도 제기됐다. MB 주례 연설 방송저지 투쟁을 하던 한 KBS PD는 2009년 가을 ‘국정원 직원’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국정원 직원은 “대통령 주례 연설과 관련해 얘기할 게 있으니 만나자’고 제안했고, 이 PD는 “제 번호를 어떻게 알고 전화했느냐”, “당신을 만날 이유가 없다”며 거부했다. 진미위는 “국정원 직원이 전화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이 PD가 노조 중앙위원으로서 주례 연설 반대를 주도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반대 활동에 개입을 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진미위는 “노사 합의된 대통령 라디오 주례 연설 방송에 대한 반론권 보장 무산, 심의의 실질적 미이행, 선거 기간 중 방송 강행, 국정원 개입 의혹 등을 종합해 보면 대통령 라디오 주례 연설은 최초 편성부터 종료까지 KBS의 자율적이고 독립적 의사로 진행되지 않았다고 판단된다”며 “2008년 청와대 문건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하나의 단초”라고 설명했다.

청와대의 방송 개입은 방송 편성의 자유를 보장한 방송법을 위반한 행위이나 공소 시효는 만료된 상태다. 진미위는 재발 방지 차원에서 이번 조사 결과를 향후 직원 교육에 활용할 것과 방송법과 편성규약, 방송강령 등의 위반 소지가 제기된 프로그램에 대한 실질적 제어 장치 마련을 향후 편성규약 개정에 반영할 것 등을 양승동 KBS 사장에게 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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