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계와 다수 언론의 예상대로 헌법재판소가 11일 ‘낙태죄(형법 269조 1항, 270조 1항)’가 헌법에 합치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낙태(임신중단)가 이뤄지고 있음에도 이미 죽어있는 법을 없앨 경우 ‘사회혼란’이 벌어질 거라며 2년 가까이 처벌가능성을 열어뒀다. 주문만 보면 형사처벌이 여성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면서도 처벌을 가능하게 한 자기모순이다. 헌재가 법 경시 문화를 초래한 꼴이다. 헌재가 공을 국회로 넘겼으니 국회는 이제 형법 개정을 논의해야 한다.

사실 정치권에서 이 논의를 오래전에 했어야 했다. 찬반 근거를 이해하기 어렵지 않으며 불변의 신념을 믿는 종교계 등이 입장을 180도 바꿀 가능성도 거의 없었다. 전 세계 이슈로 방향이 어느 정도 결정 난 낙태죄 비범죄화를 국회는 헌재에 넘기며 회피했다. 지난해 10월 국회 비교섭단체대표 연설에서 이정미 정의당 대표가 낙태의 비범죄화를 주장했지만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은 헌재 결정을 핑계로 외면했다.

2004년 ‘행정수도 이전’이나 2014년 ‘통합진보당 해산’과 같이 마땅히 정치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사법에 떠넘겨온 전례들은 이제 관행이 됐다. 정치권은 헌법상 기본권, 국민의 생명과 삶의 질을 결정하는 문제까지 사법영역에 내줬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현재 결정을 비판만 할 순 없다. 본질적인 잘못은 사회 균열을 제대로 담아내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한 정치권에 있다.

이를 고려해 이번 결정을 다시 보면 이번 결정문은 사회 내 다양한 의견(헌불4, 단순위헌3, 합헌2)을 균형 있게 담으면서도 한발 진보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말 그대로 변화한 시대 분위기를 그대로 담은 ‘정치적 판단’이다.

이번 헌불 결정에 단순위헌 의견이 포함됐지만 단순위헌 의견은 그 자체로 헌불 의견에 대한 비판이다. 단순위헌 의견을 낸 재판관(김기영·이석태·이은애)들은 “헌법 질서유지를 위한 요청이 있더라도 그것이 극심한 사회 혼란을 야기해 기존의 인적·물적 자원으로는 수습하기 어려운 상황을 초래하는 것이 아닌 한, 당사자의 구제가 우선적으로 고려돼야 할 것”이라고 했다.

▲ 정의당 여성위원회가 1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날 오후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위헌 결정을 촉구했다. ⓒ 연합뉴스
▲ 정의당 여성위원회가 1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날 오후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위헌 결정을 촉구했다. ⓒ 연합뉴스

▲ 헌법재판소가 11일 낙태죄 처벌을 규정한 형법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 연합뉴스
▲ 헌법재판소가 11일 낙태죄 처벌을 규정한 형법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 연합뉴스

단순위헌 의견 재판관들은 자기낙태죄 조항(형법 269조 1항)이 헤어진 연인·남편 등의 복수나 분쟁에서 압박수단으로 악용된 점, 실제 자기낙태죄 조항으로 기소돼 처벌된 사례가 드문 점 등을 언급하며 “형벌조항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므로, 이들 조항이 폐기되더라도 극심한 법적 혼란이나 사회적 비용이 발생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태아의 생명을 훼손하는 여성의 선택권’이라는 대립구도를 깼다. 이들은 세계보건기구(WHO)의 의견을 참고해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보장된다고 하더라도, 임신한 여성의 낙태가 안전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해 생명과 신체에 대한 위험요소를 줄이는 것 또한 낙태 문제에서 실질적이고 중요한 과제”라며 “(수술)비용이 높을 경우 소득이 낮은 여성들이 낙태를 망설이다 적절한 시기를 놓치게 된다”고 했다.

태아의 생명권이 중요하다는 일각의 주장이 이번 결정문에 소수의견으로 들어오면서 이번 결정이 ‘정치적 판단’으로 기능했다. 낙태죄 합헌 의견을 낸 재판관은 조용호(박근혜 지명)·이종석(자유한국당 추천) 등 2명이다. 이들은 “지금 우리가 위헌·합헌 논의를 할 수 있는 것도 모두 모체로부터 낙태당하지 않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태아였다”며 합헌의견을 시작했다.

이들은 “사회적·경제적 사유에 의한 낙태의 허용은 결국 ‘편의’에 따른 생명박탈권을 창설하는 것”이라며 “임신한 여성은 ‘임신상태’라는 표지를 제거해 행복을 찾을 것이 아니라 태아를 살려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우리 세대가 상대적인 불편요소를 제거하는 시류·사조(思潮)에 편승해 낙태를 합법화한다면 훗날 우리조차 다음 세대의 불편요소로 전락해 안락사, 고려장 등의 이름으로 제거대상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임신중단 비범죄화에 찬성하는 이들은 ‘고려장’까지 등장한 이 합헌의견을 보고 웃어넘길지 모르지만 이는 앞으로 설득하고 싸워야 할 엄연한 실체다. 낙태가 죄든 아니든 임신중절수술은 신체와 생명의 문제다. 국민건강보험 예산을 얼마나 배정하고 어떤 의료진이 수술을 담당할지 함께 결정해야 한다. 헌재 결정으로 어쩔 수 없이 임신중단을 범죄의 영역에서 건져 올렸지만 계속 임신중단을 죄악시하며 예산 투입 등에 반대할 세력이 존재한다. 법 개정 시한인 2020년 말 이후에도 나타날 수 있는 논리다.

합헌의견 재판관들 역시 임신중단 비범죄화 이후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 과제를 던졌다. 이들은 ‘초기 페미니스트들의 의견’이라며 “아이를 양육할 의무나 생물학적 아버지로서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남성, 사회적 편견이나 경제적 어려움 등을 염려하는 임신한 여성의 가족, 친구의 낙태의 권유나 교사(敎唆)는 현재 드러내놓고 하기 어려운 요구 또는 범죄인데, 낙태가 선택의 문제가 된다면 그러한 요구나 압박은 보다 거리낌 없이 행해질 것이고, 그로 인한 불이익을 감내해야 하는 사람은 모두 임신한 여성”이라고 결정문에 적었다.

이는 낙태죄 유지의 근거가 아니라 낙태죄 폐지의 전제조건이어야 한다. 남성이 임신에 책임지지 않는 사회에서 ‘원치 않는 임신’은 젠더폭력(혹은 젠더불평등)이다. 임신중절수술은 이 젠더폭력의 결과를 치료하는 일이다. 낙태죄 폐지는 그 후유증을 조금 줄이는 수단에 불과하다. 낙태죄 폐지는 조금 더 피임의 방식과 필요성을 널리 공유하는 계기로 발전해야 하고, 남성도 임신·출산·육아를 책임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출발이다.

▲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이 11일 낙태죄 위헌여부 결정이 이뤄지는 헌법재판소 앞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참가자가 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이 11일 낙태죄 위헌여부 결정이 이뤄지는 헌법재판소 앞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참가자가 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낙태죄 폐지 이슈의 핵심은 여성의 몸을 누가 결정할 것인가의 문제다. 그간 여성의 몸은 전쟁터와 같았다. 승자가 그 영토와 전리품을 차지했듯 남성중심의 권력이 여성의 몸을 결정해왔다. 박정희 정권 시절 대한가족계획협회의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인구정책 표어가 나온 1973년은 임신중단의 범위를 규정한 모자보건법을 제정한 연도다. 일본 우생보호법의 영향을 받은 이 법은 제정당시 강제불임수술 조항까지 담았다.

낙태죄 폐지는 시설에 가둔 장애인의 재생산권을 논의할 조건을 만든 일이기도 하다. 낙태죄를 폐지해도 여전히 생명엔 등급이 있다. 성매매 여성, 어린 미혼여성, 저소득 여성이 낳은 생명을 반기지 않는 한국사회에서 40여년간 해외입양(아동수출)은 전 세계 1위였다.

임신중단을 죄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태아생명을 빌미로 ‘여성의 선택권’을 외면해왔다. 그들은 수용시설에 갇혀 강제로 불임·임신중절수술을 받아 ‘태아의 생명’을 선택하지 못한 한센인·장애인 등을 보듬을 방법은 있는 걸까. 단순위헌 의견 재판관들 말처럼 임신 여성의 신체적·사회적 보호가 있을 때 비로소 태아의 생명도 보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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