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은 아직 이름을 찾지 못하고 있다. 누구는 ‘제주 4·3 (폭동)사태’로 부르고 누군 ‘4·3 민중항쟁’으로 부른다. 제주4·3 특별법은 4·3을 ‘1947년 3월1일부터 1948년 4월3일 발생한 소요 사태와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정의한다. 다수가 몰랐던 국가의 민간인 학살이다. 그나마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제주도민에게 직접 사과하고 박근혜 정부가 국가기념일로 지정해 조금씩 알려졌다.

4·3 진압을 거부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더 알려지지 않았다. 공식 이름이 없을 뿐 아니라 희생자 수 통계조차 없다. 부당한 명령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이들이 ‘빨갱이’로 몰렸는데 역사학계에선 이때부터 ‘빨갱이’라는 낙인이 생겼다고 본다. 61년이 지나 희생자 위령비를 세웠지만 비석엔 아무 내용이 없다. 이 비극은 제주 진압이 한창이던 1948년 10월15일 육군 총사령부가 전남 여수에 주둔하던 육군 제14연대에 제주 출동 명령을 내리면서 벌어졌다.

▲ 빨갱이란 말은 1948년 4.3 진압을 거부한 군인들 사건 이후 '정권 눈밖에 난 이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빨갱이라는 용어 자체는 일제강점기에도 사용했지만 이땐 실제 좌익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48년 이후엔 소위 빨갱이가 아닌 이들까지 빨갱이로 모는 일이 벌어졌다.
▲ 빨갱이란 말은 1948년 4.3 진압을 거부한 군인들 사건 이후 '정권 눈밖에 난 이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빨갱이라는 용어 자체는 일제강점기에도 사용했지만 이땐 실제 좌익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48년 이후엔 소위 빨갱이가 아닌 이들까지 빨갱이로 모는 일이 벌어졌다.

동족상잔을 거부한 ‘빨갱이’

14연대 군인 2000여명은 19일 밤 제주로 출병하는 대신 여수일대 경찰을 제압했다. ‘제주도출동거부병사위원회’란 이름의 군인들 성명을 보면 동족상잔 결사반대·미군 즉시 철퇴·분단 비판 등을 주장했다. 분단을 기정사실화한 미군정-이승만정권이 친일경찰로 권력을 휘둘러 당시 군과 경찰의 갈등이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해방 후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동족상잔’을 지시하자 한꺼번에 폭발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언론을 완전히 통제했다. 1948년 8월15일 정부수립 후 정부를 모략하는 기사·공산당과 이북 북괴정권을 인정하는 기사 등을 금지한다는 ‘언론에 대한 7개 조항 지침’을 제정했다. 분단과 좌우대립을 빌미로 만든 ‘보도지침’이다. 경향신문은 10월22일 “관계당국의 (기사)게재 보류의 시달로 인해 일절 함구돼 오던 바 21일 드디어 보류가 해금되는 동시에 이범석 국무총리(국방장관)가 진상을 발표했다”며 3일이나 지나 보도한 이유를 밝혔다.

▲ 1948년 10월22일 경향신문 1면. 빨간박스는 '반란'
▲ 1948년 10월22일 경향신문 1면. 빨간박스는 '반란'

언론은 이승만 정권 시각을 담아 ‘반란’으로 규정했다. 22일 동아일보는 “일부육군부대 반란소요 공산계열과 극우분자도 책동”, 경향신문은 “응시하자! 민족골육상잔의 이 참극을, 여수국군 일부 반란야기” 등의 기사에서 소식을 전했다. 이는 이날 이범석 총리가 기자회견에서 “공산계열과 극우 폭도들의 반란”으로 규정한대로다. 여기서 ‘극우’는 김구를 가리키는데 김구는 이를 부인하는 입장을 냈고, 김구 개입의 근거도 나오지 않았다.

정부는 싸움이 길어지자 ‘반란’주동자를 오동기(광복군 출신, 김구 노선)-송욱 여수여중 교장(민족주의 우파)-김지회 중위-지창수 상사 등으로 바꿨다. 사건의 성격도 ‘군의 정당한 항명’이 아닌 ‘민간의 반란’으로,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의 지령을 받은 모략’으로 변해갔다. 언론은 이를 견제하지 않았고 평화일보와 같은 극우언론은 오히려 이를 부추겼다.

한 예로 평화일보는 10월30일 ‘순천반란지구 인민재판에 국회의원 황두연이 배석판사로 활약’했다는 기사를 냈다. 황 의원은 구타를 당하며 취조까지 받았으나 해당 기사는 오보였다. 기사를 지시한 양우정 평화일보 사장은 이승만과 가까운 인사였다.

‘빨갱이’면 죄 없는 국회의원을 때리거나 재판 없이 민간인을 죽여도 됐다. 언론은 ‘그래도 괜찮은’ 분위기를 조성했다. “사형 12명에 무기도 9명”(48년 11월16일 경향신문), “사형 또 102명”(11월18일 경향신문) 등 학살이 이어졌고 심지어 “반란 중학생 등 제2차 89명 사형”(11월2일 동아일보)에서 보듯 학생들을 “반란폭도”라며 총살했다.

정부가 ‘여순반란’으로 이 사건을 몰아간 1948년 10월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패전국인 일본을 대신해 남북으로 찢겨 남한만의 정부를 세운지 두 달, 4·3과 여수의 사건은 미국 입장에서는 이승만 정부를 유지할지를 판단할 시금석이었다. 한편 국내에선 분단에 대한 불만이 커졌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10월23일 구성하면서 친일파 청산 요구가 거셌다. 이승만은 조선총독부-미군정을 계승하는 대한민국을 선택했다.

▲ 여순항쟁 당시 정부반군 동조자로 의심받아 진압군에 구금된 어린 학생들. 사진=칼 마이던스
▲ 여순항쟁 당시 정부반군 동조자로 의심받아 진압군에 구금된 어린 학생들. 사진=칼 마이던스

이승만은 ‘여순반란’을 계기로 국가보안법을 강행했다. 그는 11월5일 “남녀아동까지 일일이 조사해 불순불자는 다 제거하고 반역적 사상이 만연되지 못하게 하리니 앞으로 어떠한 법령이 발포되더라도 전 민중이 절대복종”해야 한다고 했다. 이날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악독극악한 잔인행동의 하수자 중에 남녀중등학도가 다수”라며 국가보안법 제정에 힘을 보탰다. 조선일보가 11월14일 “국가보안법을 배격함”이란 사설에서 “광범하게 정치범·사상범을 만들어낸다”고 비판했지만 결국 12월1일 국보법이 탄생했다.

박정희와 여순사건

14연대의 행동을 남로당 지령을 받은 반란으로 보긴 어렵다. 14연대는 여수·순천에서 보성벌교(서쪽), 광양(동쪽) 등 사방으로 뻗어갔는데 반란이었다면 수도를 향하고, 남로당이 이를 계획했다면 수도권에서 했어야 한다. ‘반란’이란 딱지를 뗀 건 박정희였다. 남로당 군사총책으로 있던 박정희는 여순사건에 연루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군 내 남로당 명단을 넘기고 풀려난 박정희를 ‘빨갱이’라고 공격한 건 1963년 대선 당시 윤보선 후보 측이었다.

▲ 1963년 10월5일 동아일보 1면 박정희 후보가 낸 광고. 박정희는 윤보선 후보를 "시커먼 새우(자신)를 매카시즘이라는 후라이판에 달달 볶아 새빨간 빨갱이로 만들려는 수법을 즐기고 있다"고 비판하며 "차제에 한국적 매카시즘 신봉자를 사회에서 일소시키기 위해 분연히 궐기해 과감히 투쟁하자"고 했다.
▲ 1963년 10월5일 동아일보 1면 박정희 후보가 낸 광고. 박정희는 윤보선 후보를 "시커먼 새우(자신)를 매카시즘이라는 후라이판에 달달 볶아 새빨간 빨갱이로 만들려는 수법을 즐기고 있다"고 비판하며 "차제에 한국적 매카시즘 신봉자를 사회에서 일소시키기 위해 분연히 궐기해 과감히 투쟁하자"고 했다.

박정희 후보(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는 신원조사와 연좌제 폐지, 정치사상범 사면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 선거는 역대 최저표차였던 선거로 박정희는 윤보선을 15만표 차로 이겼는데 호남에서만 35만표 차로 이겼다. 여순사건 이후 빨갱이로 차별받던 호남인들이 박정희에 동질감을 느낀 것이다. 박정희는 집권 후 자신이 무기징역을 받았다는 내용의 과거 기사를 도서관 등에서 다 없애도록 지시했고, 여순반란사건을 여순사건으로 수정했다. 하지만 집권 이후 ‘반공’을 내걸며 호남 차별과 빨갱이 낙인을 버리지 않았다. 박정희만 빠져나온 셈이다.

여순사건을 ‘반란’으로 되돌린 건 2001년이었다. 월간조선은 그해 10월호에서 여순사건을 다룬 영화 ‘애기섬’을 평하며 여순반란사건으로 적었다. 이영일 전 여수지역사회연구소장은 당시 “국정교과서에도 ‘여수순천 10·19사건’으로 기록됐는데 월간조선이 ‘여순반란사건’으로 만들었다”며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 한다”고 개탄했다. 여순연구자인 주철희 박사는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는 저서에서 잘못된 명령에 저항해 출동을 거부한 정의로운 군인들이니 ‘반란’이 아니라 ‘여순항쟁’으로 부르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국가폭력, 국가의 방해

지난달 21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내란 및 국권문란죄 혐의로 사형당한 장환봉씨 등의 3인의 유족(장경자씨 등)이 제기한 재심신청을 8년 만에 받아들였다. 유족들은 2011년 10월 광주고등법원에 재심을 신청했고 2013년 1심 재판부는 재심신청이 타당하다고 했다. 하지만 검찰은 “불법 연행 구금으로 단정하기 어렵다”며 항고했다. 2015년 2심 재판부도 유족 손을 들어줬지만 검찰은 재항고했다. 4년이나 방치하던 대법원은 사법농단의 실체가 어느 정도 드러난 이후 재심을 확정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검찰이나 대법원만 문제는 아니다. 2009년 법무부 통계를 보면 1948년 정부수립 이후 마지막 사형을 집행한 1997년까지 사형당한 사람 수는 919명이다. 이 중 여순항쟁 군법회의 사형선고만 691명이다. 

하지만 해방 이후 한국전쟁 전까지 이미 10만명 넘게 목숨을 잃었다. 여순항쟁 희생자 등 ‘빨갱이’는 국민취급도 하지 않으며 통계에서 제외했다. ‘진실화해를 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도 희생자 규모를 추산하지 않았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추산으로 여순항쟁 희생자는 1만명이 넘는다.

▲ 희생자 이름을 채우지 못한 위령비. 원래 넣으려던 문구는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시 신월리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군인들을 중심으로 발발하여 여수와 순천을 점령하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여수를 중심으로 한 전남 동부지역 일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학살된' 비극적인 사건이다. 분단과 갈등, 혼란의 시대에 억울하게 희생된 여순사건 영령들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그리고 영면을 기리는 마음을 담아 위령비를 세운다.”이다. 사진=노컷뉴스
▲ 희생자 이름을 채우지 못한 위령비. 원래 넣으려던 문구는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시 신월리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군인들을 중심으로 발발하여 여수와 순천을 점령하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여수를 중심으로 한 전남 동부지역 일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학살된' 비극적인 사건이다. 분단과 갈등, 혼란의 시대에 억울하게 희생된 여순사건 영령들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그리고 영면을 기리는 마음을 담아 위령비를 세운다.”이다. 사진=노컷뉴스

여수시 역시 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무려 61년만인 2009년 여수에 희생자 위령비를 세웠다. 위령비에는 항쟁날짜인 ‘1948년 10월19일’과 위령비를 세운 ‘2009년 10월19일’ 이외엔 “……”(말줄임표)만 새겼다. ‘학살’을 주장한 유족 측과 이에 동의하지 않은 여수시의 의견이 갈려서다. 한국정부와 사회가 진상규명을 외면한 채 60년을 흘려보내 벌어진 참극이다. 여수시는 지난해 9월 한 오페라에 ‘여순항쟁’이란 표현을 사용하지 못하게 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

8년 전 재심을 청구한 유족 3인 중 2명(고 신희중씨, 고 이기화씨)는 세상을 떠났다. 주철희 박사는 지난달 24일 여수신문 기고에서 “재심개시 결정은 특정 단체나 지방자치단체·유족회·정치권·언론 등의 도움·협조·지원도 없이 오로지 유족 3인의 힘든 투쟁의 결과물”이라며 “이제라도 유족 3인의 개인 일로 치부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16대 국회부터 발의했던 ‘여순사건 특별법’은 20대 국회(정인화 민주평화당 의원 대표발의)에서도 계류 중이다.

[관련기사 : 한국 언론의 불행한 출발은 제주 4·3 보도였다]

[관련기사 : 진실화해위 "군·경, 순천에서만 439명 집단학살" 규명]

※ 참고문헌

정지환, ‘여순사건 왜곡보도의 과거와 현재’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여수 14연대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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