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7월1일 KBS 드라마국 FD 김성섭씨가 서른 나이로 숨졌다. 2TV 일요드라마 ‘언제나 두근두근’ 촬영 현장에서 일하다 감전됐다. 분수대 수압을 조절하는 밀폐된 조작실에 홀로 있던 그는 지시에 따라 스위치를 조작하다 사고가 났다.

조명스태프 A씨는 10여년 전 한 KBS 대하드라마 현장을 잊을 수 없다. 여름에 눈 내린 겨울을 연출하려고 바닥에 소금을 수북이 깔았다. 소금은 전도체다. 그날 모든 조명스태프가 통증을 견디며 일했다. 나무 막대나 돌로 장비를 잡아도 몸에 전기가 통했다. A씨는 “지금은 달라졌지만 현장 안전에 얼마나 관심이 없었는지를 보여주는 과거 단면”이라 했다.

이 사건들은 반면교사가 됐을까. 감전은 17년이 지난 지금도 조명스태프의 일상이다. 생명을 위협하면 ‘사고’가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따끔거리는 통증만 참고 넘기면 된다. 낡은 장비, 비올 때 야외 촬영, 해변 촬영 등 항상 위험에 노출돼있지만 보호장비는 고무장갑이 전부다. 사고가 반복된 20년 간 변함이 없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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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정도는 아니니까.” ‘현장이 왜 변하지 않느냐’는 말에 조명스태프 A·B씨가 답했다. “220V가 몸에 흐른다고 죽진 않으니 그때그때 대처만 잘하면 된다”고 넘긴다는 것이다. 혼란스러운 촬영 현장에서 안전을 챙길 여유가 없고 하루 2~3시간만 자며 일하느라 다른 데 신경 쓸 여력도 없다. 그러나 현장 안전 관리를 전담하는 책임자는 없다. 그러다 2012년 한 SBS 수목드라마 조명스태프가 촬영 중 실핏줄까지 터질 정도로 감전이 돼 응급실에 실려갔다.

스태프들은 넘어지거나 떨어져 다치고 떨어진 물건에 맞아서도 다친다. 대부분 안전 설비가 없거나 급한 촬영 속도에 맞추다 생긴다. 10년차 이상 조명스태프 대부분 떨어진 장비에 맞아 본 적이 있다. 조명스태프 C씨는 천장에서 떨어진 조명에 맞아 현장에서 잠시 의식을 잃었고 깬 직후 촬영에 복귀했다. 2014년 가을, 이승철·윤종신 심사위원이 ‘슈퍼스타K6’ 심사를 보는 바로 맞은 편에선 한 촬영감독이 2층 높이 비계를 오르다 그대로 굴러떨어져 오른쪽 오금이 20cm 이상 찢어졌다. 현장에 사다리가 없어 장비함을 대고 오르다 생긴 사고다.

뼈에 금이 가거나 인대가 늘어나는 건 “연례행사”로 취급된다. 장시간 촬영 관행이 사고를 부추긴다. 15년 차 조명스태프 D씨는 얼마 전 손목에 금이 갔다. 촬영 종료 후 급하게 돌아가는 길에 넘어졌다. 원래 일몰 전 촬영을 끝내고 배를 타야 했으나 일몰 시간을 넘겼고 불빛 하나 없는 곳에서 배를 타려다 사고가 났다. 이들은 부족한 수면 때문에 졸거나 촬영시간을 맞추려 위험한 지름길을 가다 손목·발목을 접지르기 일쑤다.

▲ 지난 3월6일 KBS 2TV 드라마 '동네변호사 조들호2' 현장에서 차량사고가 나 스태프 5명이 부상을 당했다. 사진은 사고 당시 모습.
▲ 지난 3월6일 KBS 2TV 드라마 '동네변호사 조들호2' 현장에서 차량사고가 나 스태프 5명이 부상을 당했다. 사진은 사고 당시 모습.

사고는 잦지만 병원은 제때 가지 못한다. 스태프 한 명이 빠지면 다른 팀원의 일이 늘어 책임감 때문에 촬영현장을 지킨다. 발목을 절뚝이면서 일을 하다가 쉬는 날 맞춰 병원을 간다. 건강에 신경 쓰지 못하면서 3~6개월 간 연속 20시간 장시간 노동을 하면 몸이 성하기 힘들다. 연차가 오래된 촬영·조명스태프들은 대개 허리디스크 질환을 갖고 있다.

십수년차 촬영감독 E씨는 지난해 초 허리뼈 3·4번 디스크가 터져 7개월을 쉬었다. 5개월 치 드라마 촬영을 끝낸 직후였다. E씨는 허리와 오른쪽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침대에서 일어나질 못했고 그때서야 병원을 갔다. 촬영 때도 통증이 있었으나 ‘내가 너무 무리했나’ ‘열심히 했나’ 생각하고 넘겼다. 드라마가 끝났으니 치료비를 요구할 데도 없었다. 치료부터 재활까지 모두 사비로 해결했다.

최근엔 사고를 당하면 병원비를 지원받을 수 있다. 방송스태프노조, 한빛노동미디어인권센터 등의 단체가 처우개선을 주장하면서 상해보험에 가입하는 제작사들이 늘고 있다. 그러나 치료비만 지원 받는다. 고정 수입 없이 이달 일한 급여를 다음 달에 받는 이들은 쉰 만큼 생활비가 준다. A씨는 “스태프에게 사고는 곧 다음 달 생활비는 없다는 뜻”이라고 했다.

현장에서 ‘생명에 지장이 가는 사고냐, 아니냐’ 구분이 나오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큰 사고가 나야 촬영현장이 위험한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고 제작사·방송사가 피해보상에 조금 더 노력한다”는 것이다. B씨는 “가위로 손가락 살을 잘라 7~8바늘 꿰맨 사고도 스태프에겐 아주 경미한 사고”라 했다.

▲ 2017년 12월 tvN 드라마 '화유기' 촬영세트장에서 한 스태프가 추락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됐다. 사진은 그가 올라간 천장을 지탱하고 있던 나무가 부러진 모습. 사진제공=MBC아트.
▲ 2017년 12월 tvN 드라마 '화유기' 촬영세트장에서 한 스태프가 추락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됐다. 사진은 그가 올라간 천장을 지탱하고 있던 나무가 부러진 모습. 사진제공=MBC아트.

‘산재보험 가입’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산재보험 가입자는 3일 이내 치유될 수 없는 업무상 부상이나 질병에 걸리면 치유될 때까지 요양급여를 받을 수 있다. 특히 허리디스크 질환 등 만성질환을 산업재해로 인정받을 길도 생긴다. 방송스태프들은 지난해 9월 고용노동부 특별근로감독 결과 노동자성을 인정받아 산재보험 가입을 주장할 제도적 근거도 생겼다.

보험 가입까지 가는 길은 아직 멀다. 현장에선 ‘표준근로계약’ 체결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스태프들은 우선 과제가 ‘장시간 노동 철폐’라 입을 모은다. 장시간 촬영을 해결하지 않고선 어떤 현장도 위험하다는 지적이다. C씨는 “옆에 있는 최고급 안전장비가 잠을 못 자 몽롱한 의식이나 누적된 피로를 해결해주진 않는다”고 했다.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는 ‘12시간 근무와 12시간 휴식’을 주장한다. 표준근로계약 및 노동시간 단축을 우선 해결한 후 다른 근로기준법 준수문제도 하나씩 풀어갈 예정이다.

영화 촬영 현장은 드라마 현장보다 안전에 대한 경각심이 높다. C씨는 2017년 개봉한 영화 ‘악녀’의 한 촬영스태프 얘기를 들었다. 현장엔 위험한 액션씬을 찍을 때마다 구급차량이 대기했다. 사고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는데 돈만 낭비한다’는 볼멘소리가 나왔다. 그러다 촬영 중 액션팀이 오토바이 사고를 당했고 피해자들은 즉시 구급차를 타고 후송됐다. 제작사 관계자는 제작진에게 ‘이것 하나로 구급차 비용이 아깝지 않다’고 했다.

최정기 언론노조 정책실장은 “산재는 제작사·방송사가 실정법만 잘 지켜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산업안전보건법 23조·29조는 사업주(방송사)와 도급사업주(제작사)의 안전조치 의무를 두고 15조는 안전관리자를 의무적으로 두게 한다. 법에 따르면 세트 시설 점검, 전기선 관리부터 차량이용 촬영 등 위험현장의 안전 대책 수립 등이 의무다. 

최 실장은 “방송사엔 지금도 안전관리자가 있지만 많은 제작 현장을 꼼꼼히 관리할 수준이 아니다. 방송사·제작사는 형식적 지정말고 산업안전 담당자를 정확히 정하고 충분한 인력을 배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최 실장은 또한 비용부담 지적에 대해 “2017년 스태프 하반신 마비 추락사고가 있었던 드라마 ‘화유기’ 경우 제작사가 컨설팅을 받고 현장을 전면 개선했는데 당시 제작사 측이 ‘큰 비용이 들지 않더라’고 직접 밝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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