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탄압으로 퇴색한 미얀마의 민주화
언론탄압으로 퇴색한 미얀마의 민주화
[아세안의 자유언론을 찾아서 04]

동남아시아는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근접하고 식민지의 역사를 겪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최근 신남방정책을 통해 한국의 새로운 경제적 동반자로 부상하고 있다. 그러나 동남아 국가들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많지 않다. 한국 국민에게 이들 나라들은 아직까지 상대적으로 가기 쉬운 해외여행지 정도로 인식되고 관광정보만 공유되는 실정이다. 이에 자유언론실천재단과 미디어오늘은 그동안 우리가 잘 몰랐던 아세안(ASEAN) 이웃국가들의 언론 상황과 탄압 실태, 진실 보도와 자유언론 수호를 위한 현지 언론인들의 활동을 취재한 기록을 5회에 걸쳐 연재한다. 이 연재의 내용은 자유언론실천재단에서 기획하고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2018년 12월에 발간한 책 ‘우리는 말하고 싶다 : 현장 르포, 분투하는 아시아의 자유언론(박성현·김춘효 지음, 이루 펴냄)’을 토대로 요약, 보완한 것이다. - 편집자 주

# 글 싣는 순서

01) 낯선 이웃 아세안, 분투하는 자유언론
02) 진실 보도에 목숨을 걸다, 필리핀 언론인의 현실
03) 태동하는 언론의 자유, 베트남의 시민언론
04) 언론탄압으로 퇴색한 미얀마의 민주화
05) 새 시대의 길목에 서다, 말레이시아의 독립언론


1886년 이래 영국의 식민지였던 버마(1989년 미얀마로 개칭)는 1942~1945년 사이 일본의 통치 하에 놓였다가 일본의 패망과 함께 다시 영국의 소유가 된다. 1948년 1월4일 마침내 독립국 버마연방이 탄생하지만, 1962년 네 윈의 쿠데타로 군부가 정권을 잡으면서 버마식 사회주의를 표방한 독재정치가 계속되었고 1988년 8월8일 마침내 ‘8888 항쟁’이 일어난다. 이 민주화운동 당시 군부의 탄압을 피해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망명하거나 국경지대로 도피했다. 세계학생운동사의 한 획을 그은 전(全)버마학생민주전선(ABSDF)도 이때 만들어져 수십 년간 무장투쟁을 지속하게 되었고, 국내외 민주화세력의 정보매체가 된 망명언론들이 생겨나 해외에서 버마의 정치·사회 상황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66(d)’로 대표되는 사법적 언론탄압

2012년 4월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아웅산 수찌와 그녀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압승을 거두고 2015년 11월 총선에서 승리해 정권을 이양 받으면서 미얀마에도 마침내 민주화가 찾아오는 듯 보였다. 오랜 세월 민주화를 향한 열망으로 해외에서 활동하던 3대 망명언론 ‘버마 민주의 소리(DVB)’(노르웨이), ‘이라와디’(태국), ‘미지마’(인도)도 2012년~2013년에 걸쳐 미얀마로 돌아왔다. 그러나 현재의 언론탄압 모습은 수십 년간 미얀마 국민들의 투쟁을 통해 힘겹게 얻어낸 민주화의 성과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기자가 온라인, 웹사이트, 페이스북에 취재한 글을―특히 그들과 관련된 글을―올려 군과 정부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전자통신법 66(d)에 의해 피소되고 즉시 투옥된다. 이 법은 언론인에게 직결되는 매우 중요한 법이다. 이와 관련해 민주적으로 선출된 현 정부하에서 더 많은 사례가 나오고 있다. 전 정부에서는 5년 동안 11건, 현 정부는 2년 내에 113건이 발생했다. 전 정부는 군부의 (민간)정부였다. 2015년 선거 이후 현 정부는 아웅산 수찌가 지도하는 정부라 더 민주적일 것이라 기대해 국민의 지지를 받았는데, 실제로는 언론인들에게 더 위협적이다. 많은 언론인들이 이 법의 폐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탄 윈 투, ‘버마 민주의 소리’ 시사국장 겸 기획편집인)

▲ 인터뷰 중인 ‘버마 민주의 소리’ 언론인들이 서로 대화하고 있다. 왼쪽부터 킨 탄, 탄 윈 투, 에 나잉 기자. 사진=필자 제공
▲ 인터뷰 중인 ‘버마 민주의 소리’ 언론인들이 서로 대화하고 있다. 왼쪽부터 킨 탄, 탄 윈 투, 에 나잉 기자. 사진=필자 제공
미얀마는 2012년 이래 사전검열이 폐지되고 페이스북을 중심으로 소셜미디어가 대중화되었다. 이와 동시에 사이버폭력과 ‘혐오발언’도 많이 양산되어 무슬림과 불교 신자 간의 분란이 심해지자, 전 정부는 전자통신법 66(d)(2013년 제정, 2017년 개정)를 만들어 불교극단주의자 단체인 ‘마바타’를 2017년에 해체시키게 된다. 덕분에 페이스북상의 혐오발언은 많이 줄었지만, 이 법으로 인해 표현의 자유를 억압당하고 종종 명예훼손으로 처벌받는 사례가 많아졌다. “문제는 군부가 이 법을 악용해 군에 비판적인 글을 쓴 사람에게 적용한다는 것이다. 이제 많은 언론인들은 자기가 쓰는 글이 혹시 군부에 반대되는 것은 아닌지 자꾸 생각하게 된다. 자기검열을 하는 것이다.”(탄 윈 투)

전자통신법의 스웨 윈, 공직기밀법의 로이터통신 기자들

사법적 언론탄압의 희생자들 중 한 명인 탐사저널 온라인뉴스 ‘미얀마 나우’(Myanmar Now)의 편집장 스웨 윈은 1998년 스무 살 대학생 시절 ‘체제전복적인’ 팸플릿을 배포한 혐의로 21년형을 선고받고 2005년 사면될 때까지 7년간 복역한 인물이기도 하다. 2017년 3월 전자통신법의 66(d) 조항 위반 혐의로 피소를 당해 지금까지 재판 중인 그의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2017년 1월 아웅산 수찌의 법률고문이자 민주주의민족동맹의 무슬림 변호사인 코 니가 양곤국제공항에서 암살되었고 ‘미얀마 나우’는 이에 대한 탐사특집기사를 발행한다. 그 기사는 극단적 민족주의자 승려 아신 위라투가 코 니의 살인 혐의자들을 지지한 것은 불교의 교리를 위반한 것이라고 말한 한 고승의 말을 인용했다. 스웨 윈은 이 기사를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위라투의 지지자이자 ‘마바타’의 멤버인 초 묘 슈웨가 66(d)를 이용해 그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것이다.

2017년 7월30일 체포되었다가 보석으로 풀려난 스웨 윈은 그때부터 현재까지 매 10일 내지 2주마다 양곤에서 재판이 열리는 만달레이 법원까지 왕복 1200 킬로미터 이상을 이동해야 해 시간과 경비상 큰 타격을 받고 있다. 그를 고소한 원고는 2018년 8월에 다른 사건으로 자진 체포·구속되어 재판을 계속 지연시키고 위라투 역시 두 번 소환되었지만 응하지 않았다. 반면, 스웨 윈은 지난 2년 동안 55회의 법원 심리를 받으면서 단지 다음 번 재판 날짜가 언제라는 얘기를 듣기 위해 먼 길을 달려가야 했다. 그를 만난 2018년 7월26일 당시 32회의 법정 출두를 한 상태였으니, 그 이후 지금까지 23회를 더 만달레이로 달려가야 했다는 얘기이다. 그렇다면, 그가 재판에 빠질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터뷰 당시 그가 한 말은 이러하다.

▲ ‘미얀마 나우’ 편집장 스웨 윈. 전자통신법 66(d) 위반 혐의로 2017년부터 현재까지 재판 중인 그는 학생 시절 민주화운동으로 7년간 복역했다. 사진=필자 제공
▲ ‘미얀마 나우’ 편집장 스웨 윈. 전자통신법 66(d) 위반 혐의로 2017년부터 현재까지 재판 중인 그는 학생 시절 민주화운동으로 7년간 복역했다. 사진=필자 제공
“2명의 변호사와 함께 가는데, 비행기를 탔다가 연착해 법정에 늦게 도착하게 되면 그들이 그것을 구실로 보석을 취하하고 감옥에 보낼 것이기 때문에 나는 오전 10시 정각에 도착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개인택시를 타고 가는데 가는 데만 10~12시간이 걸린다. (…중략…) 미얀마의 사법부는 독립적이지 않다. 판사는 특히 예민한 이슈, 정치적 성질의 이슈를 두려워한다. 외부의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직업을 잃거나 외딴곳으로 전직되거나 진급을 못 하게 된다. (…중략…) 버마의 언론자유를 방해하는 요소는 빈약한 ‘법의 지배’(법치)이다. 특히 군부에 의해 만들어진 헌법이 문제다. 헌법상으로 모든 행정조직들―경찰력을 포함해―이 군부의 통제하에 있다. 미얀마의 언론인들은 군이 관련되면 보도하지 않는다.”(스웨 윈, ‘미얀마 나우’ 편집장)

2019년 3월15일 미얀마 국내외 77개의 시민사회단체가 스웨 윈 사건 2주년을 맞아 그에 대한 소송 취하와 명예훼손을 처벌 대상에서 제외시킬 것을 미얀마 당국에 요구하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에 의하면, 전자통신법 66(d) 조항이 제정된 이래 이 법에 의해 현재까지 제기된 소송은 모두 173건이다.

한편,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고 공분과 비판을 불러일으킨 로이터통신의 두 기자, 와 론과 초 소 우 사건은 영국식민지 시절인 1923년에 제정된 공직기밀법에 근거한 것이다. 로힝야 취재를 해오던 이 두 기자는 2017년 12월12일 양곤의 한 식당에서 경찰관들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 나가 경찰관이 건네준 문서를 받았다. 식당을 떠난 그들은 문서를 소지한 상태에서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국가의 안전과 이익을 손상시킬 의도로 뉴스를 수집’했다는 혐의를 쓰고 공직기밀법에 의해 구금당하게 된다.

▲ ‘미지마’의 영어 시사주간지에 실린 로이터의 두 기자 관련 기사. 미지마는 TV방송과 버마어 일간지도 발행하고 있다. 사진=필자 제공
▲ ‘미지마’의 영어 시사주간지에 실린 로이터의 두 기자 관련 기사. 미지마는 TV방송과 버마어 일간지도 발행하고 있다. 사진=필자 제공
와 론과 초 소 우 기자가 경찰관으로부터 전해 받은 문서는 로힝야 무슬림에 대응할 라카인주의 보안작전에 관한 것이라고 보도되었지만 정확한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다. 기자들은 경찰관이 그들에게 묻지도 않고 문서를 주었다고 법정에서 증언했고, 문서를 넘긴 뒤 체포된 경찰관 모 얀 나잉은 그것이 미얀마 경찰청장의 지시로 이뤄진 함정수사였다고 말했다. 로이터는 두 기자가 미결 구금상태이던 2018년 2월, 그들이 취재한 기사 초고를 편집해 그들의 이름으로 발행했다. 그것은 마웅도(Maungdaw) 지역의 인딘(Inn Din) 마을에서 미얀마군과 불교신자 마을주민 2명이 로힝야 무슬림 10명을 살해한 일에 관한 것이다. 국제사회로부터의 많은 비판과 인권·언론단체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두 기자는 끝내 2018년 9월3일 7년형을 선고받았고 현재 복역 중이다.

로힝야 사태를 바라보는 미얀마 내의 시선

스웨 윈과 다른 여러 언론인들이 인터뷰에서 언급한 것처럼, 미얀마 군부는 2008년 새로운 헌법을 통해 이미 자신에게 합법적인 권력을 부여해 놓았다. 이 헌법에 따르면, 의회 전 의석의 25%를 군부가 지명하고 내각의 주요 3부처인 국방부, 내무부, 국경부의 장관을 군의 총사령관이 임명하게 되어 있다. “군부와 정부, 고위권력자 아웅산 수찌와 관련된 이슈를 다룬다면 곤경에 처할 것”이라는 게 시사월간지 ‘모쿤’(‘기록’, ‘연대기’의 뜻)의 편집장 자야 흘라잉의 말이다.

▲ ‘아라칸 로힝야 구원군’(ARSA)을 취재해 실은 잡지 ‘모쿤’ 51호의 표지(2017년 11월호). 사진=필자 제공
▲ ‘아라칸 로힝야 구원군’(ARSA)을 취재해 실은 잡지 ‘모쿤’ 51호의 표지(2017년 11월호). 사진=필자 제공
70만명의 난민을 양산한 라카인주의 로힝야 학살에는 미얀마 보안군과 로힝야 무장단체 ‘아라칸 로힝야 구원군’(ARSA) 사이의 충돌, 미얀마 내 소수민족인 불교도 라카인족과 무슬림 로힝야인들의 갈등이 내재되어 있지만, 이는 단지 종교·인종적 갈등이 아니라 배후에 군부의 정치 전략이 숨어 있다(물론 영국이 남기고 간 식민지 유산으로서의 역사적 갈등도 존재한다). 아라칸(라카인의 옛 이름)의 무슬림들은 네 윈 군사정부에 의해 박해를 받기 시작했고 ‘88항쟁’ 이후 ‘1982년 시민권법’이 적용되면서 신분증 교체 과정 중에 시민권을 잃게 된다. 오랫동안 부당한 대우를 받아온 이들은 2010년 총선에서 시민권을 주겠다는 약속을 믿고 군사정권의 핵심인 ‘국가평화발전위원회’ 의장 탄 슈웨의 통합단결발전당(USDP)에 투표하기도 했다. 시민권을 위해 국가평화발전위원회와 거래를 한 무슬림들은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용만 당하고 끝나게 된다.

그렇다면 미얀마 언론인들은 로힝야 학살을 어떻게 바라볼까? “문제는 언론인인 우리가 그곳에 가도록 허가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가서 취재를 할 수가 없는데 국제 언론이 어떻게 정보를 얻을 수 있겠는가?” 에 나잉 ‘버마 민주의 소리’ 선임방송기자의 말이다. 로힝야 취재는 방글라데시 지역에서만 가능하고 미얀마 지역에서는 군부가 언론사들을 단체로 조직해 보내줄 때만 가능한 실정이다. ‘이라와디’ 영문판 총책임자인 초 즈와 모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는 고등학생 시절 88항쟁에 참여한 후 1991년 정치잡지를 발행하다가 체포되어 군법정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8년간 복역한 인물로, ‘이라와디’ 설립자의 동생이기도 하다.

“라카인주의 무슬림 거의 70만명이 방글라데시로 도피해 난민캠프에 있는 것이 큰 문제라는 것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이는 미얀마 보안군에 의한 인권 위반임이 명백하다. (…중략…) 우리는 처음에 그곳에 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기 때문에 사태의 맥락을 다루려고 애썼다. 하지만 군과 정부가 거기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이상, 정보를 얻고 그 정보를 확인하는 것이 버마 안에서는 어렵다. (…중략…) 우리는 언론인으로서 할 수 있는 한 많은 이야기를 취재하려 하지만 한쪽의 편을 들지 않는다. 양쪽의 입장에서 많은 사례들, 인권 위반의 사례들을 다루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로힝야인들이 어떻게 박해받았는지, 어떻게 나라를 떠나도록 강요받았는지, 또한 동시에 불교도와 힌두교도들이 언제 이슬람 무장단체들에 살해되었는지, 어떻게 미얀마 정부가 이 이슈를 다루는지를 보도한다. 동시에, 로힝야 이슈가 단지 즉각적인 이슈가 아니라는 것, 그것의 맥락을 국제사회에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수십년, 수세기에 걸쳐 온 것이다.”(초 즈와 모, ‘이라와디’ 영문판 선임편집자)

▲ 2017년 6월26일 타앙민족해방군(TNLA)이 주최한 ‘세계 마약 퇴치의 날’ 취재 당시 기념촬영을 한 ‘버마 민주의 소리’의 에 나잉 기자(가운데)와 파이 폰 아웅 기자(맨 왼쪽). 이들은 그날 불법결사법 혐의로 미얀마군에 의해 체포되어 5주 후에 석방되었는데, 불법결사법 역시 영국식민지 시절인 1908년에 제정된 법이다. 사진 제공=에 나잉 기자
▲ 2017년 6월26일 타앙민족해방군(TNLA)이 주최한 ‘세계 마약 퇴치의 날’ 취재 당시 기념촬영을 한 ‘버마 민주의 소리’의 에 나잉 기자(가운데)와 파이 폰 아웅 기자(맨 왼쪽). 이들은 그날 불법결사법 혐의로 미얀마군에 의해 체포되어 5주 후에 석방되었는데, 불법결사법 역시 영국식민지 시절인 1908년에 제정된 법이다. 사진 제공=에 나잉 기자
▲ 미얀마의 소수민족 문제를 상기시키는 ‘이라와디’ 사무실. 사진=필자 제공
▲ 미얀마의 소수민족 문제를 상기시키는 ‘이라와디’ 사무실. 사진=필자 제공
보도의 한계가 있는 언론인들이 로힝야 사태에 대해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반면, 활동가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군부의 의도와 아웅산 수찌의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전(全)버마학생민주전선 출신으로 전(前)정치범협회의 창립 멤버인 테 우 씨의 생각을 들어보자. “현재 미얀마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상황들, 분쟁과 사건들은 군부에 의해 잘 계획된 수순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모든 분쟁을 서로 잘 연결시켰다. 라카인주뿐만 아니라 카친주, 북부 샨주에서 발생하는 분쟁들은 군부가 주도하는 것이다. 군부가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들기 위해 잘 짜놓은 계획이다. 아웅산 수찌는 라카인 분쟁, 이 상황과 관련해 무엇인가 대답을 해야 한다.”

▲ 인터뷰 중인 인권운동가 테 우. 그는 전(全)버마학생민주전선 출신으로 15년간 복역했다. 사진=필자 제공
▲ 인터뷰 중인 인권운동가 테 우. 그는 전(全)버마학생민주전선 출신으로 15년간 복역했다. 사진=필자 제공
▲ 정치범지원협회(AAPP) 박물관의 정치범들 사진. 사진=필자 제공
▲ 정치범지원협회(AAPP) 박물관의 정치범들 사진. 사진=필자 제공
그는 군부가 나라 안에서 자신의 이미지와 역할을 높이기 위해 갈등과 분쟁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비판하고 국가자문이면서도 침묵으로 일관하는 아웅산 수찌에 대해 실망을 감추지 않았지만, 시민사회단체와 같은 민주화세력들이 아직 그녀에게 연합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고 말했다. 로힝야 사태에 대한 시선은 조금씩 달리 표현되어도, 언론탄압이 심해지는 현 상황 속에서 언론인들도 활동가들도 공통되게 우려하는 것은 힘들게 쟁취한 민주주의의 퇴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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