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송 기자는 1947년 조선통신 기자를 시작으로 국제신문 자유신문 조선일보를 거쳐 전남일보 논설고문을 역임했다. 조 기자는 해방 정국에 반민특위 재판과 제주 4·3항쟁을 취재했다. 젊어서 그는 고바야시 다키지의 ‘게공선’과 ‘1928년 3월15일’ 같은 민중소설을 탐독하는 왼쪽으로 한참 기운 기자였다. 조 기자는 송진우와 여운형, 김구 암살 현장을 취재했던 날쌘 사회부 기자였다. 조 기자가 쓴 김구 장례식 기사는 많은 사람의 마음을 흔들었다.
박진경 연대장 암살을 지휘한 문상길 중위가 체포되자 일장기 말소사건 때 동아일보 편집국장이었던 언론인 설의식과 이은상 시인, 채만식 소설가 등이 구명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육사 3기생 문상길은 1948년 9월23일 총살형으로 죽었다. 조 기자는 총살 현장에 나가 “미국인의 지배 아래 미군의 지휘 아래 민족을 학살하는…”까지 말한 문상길의 유언을 기사에 담았다. 이 기사 때문에 조선통신사는 문을 닫았다.
국제신문으로 옮긴 조 기자는 1949년 6월6일 이승만 정부의 경찰이 반민특위에 난입해 조사관들에게 발길질하면서 서류를 찢고 난동 부리는 걸 목격했다. 조 기자는 이 장면을 “이렇게 반민특위는 6개월만에 끝났다. 이날 경찰 쿠데타를 지휘해 반민특위를 방해했던 사람은 당시 내무차관 장경근이었다”고 기록했다.
열혈기자였던 조덕송은 결국 필화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갇혔고, 거기서 한국전쟁을 맞았다. 북한군이 서울을 장악한 뒤 형무소에서 나와 해방일보에 근무했으나 서울 수복 후 언론계에 복귀했다. 감옥을 나온 그는 정국은 간첩사건에 연루돼 또다시 옥살이를 해야 했다.
조 기자는 70년대초 잠시 열렸던 남북대화 국면엔 적십자회담 자문위원으로 5번이나 북한을 방문해 취재했다. 조 기자는 1970년대 후반 기자 생활 30년이 돼서야 겨우 서울 답십리에 10평짜리 집을 마련했다.
공화국의 잘못 끼워진 첫 단추는 오래토록 역사를 그릇된 길로 인도하고 있다. 4·3의 진실을 감추었으니 5·18도 덮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전두환씨가 광주 법정에 출두하는 모습을 보면서 새삼 바른 눈을 가진 언론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