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 간부들의 여군 강간·강제추행 사건과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위력에 의한 간음·강제추행 사건이 2018년 여성인권 ‘걸림돌’로 선정됐다.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전성협)는 안희정 1심 판결을 가리켜 “위력이 작용하는 방식을 잘못 해석한 판결이고, 언론도 선정성을 부각하는 등 보도 태도에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전성협은 22일 서울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 국제회의장에서 지난해 성폭력 수사·재판 과정을 두고 여성인권 보장을 위한 ‘디딤돌’과 ‘걸림돌’을 발표했다. 전성협은 디딤돌에 7건을, 걸림돌에 3건을 선정해 시상식을 열었다.

▲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는 22일 서울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 국제회의장에서 지난해 성폭력 수사·재판 과정을 두고 여성인권 보장 ‘디딤돌’과 ‘걸림돌’을 발표했다. 디딤돌 수상자가 무대에서 상을 받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는 22일 서울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 국제회의장에서 지난해 성폭력 수사·재판 과정을 두고 여성인권 보장 ‘디딤돌’과 ‘걸림돌’을 발표했다. 디딤돌 수상자가 무대에서 상을 받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걸림돌에 선정된 수사·재판 건은 모두 가해자와 피해자가 위력 관계에서 벌어진 ‘성폭력’이었다. 이 가운데 ‘해군 간부 2명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강간‧강제추행’과 ‘차기유력 대선후보이자 도지사의 위력에 의한 간음‧강제추행’은 재판 진행 과정 혹은 선고 결과가 언론에 집중 보도됐다.

고등군사법원 특별부(재판장·법원장 홍창식, 군판사 신동욱·최정윤)는 지난해 11월 부하 군인에게 반복해서 성폭력을 가한 해군 간부 2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두 간부는 1심에서 각각 징역 10년(박아무개 소령)과 징역 8년(김아무개 대령)을 선고받았으나 2심은 이를 정면으로 뒤집었다.

전성협은 “2심 재판부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기억이 일치하지 않는다며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하고 가해자의 일방적 주장을 인용했다. 직장 내 권력관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피해자가 실제로 거부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며 무죄 근거로 삼았다”고 평가했다. 또한 “2심은 ‘티타임을 갖자는 상사 말에 동의하면 성관계가 있으리라고 알았음직하다’는 악명 높은 망언을 남겼다”고 지적했다.

▲ 녹색당과 군인권센터,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15개 여성‧성소수자·군인권단체가 지난해 11월26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부 앞에서 '해군간부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 사건 무죄판결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김예리 기자
▲ 녹색당과 군인권센터,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15개 여성‧성소수자·군인권단체가 지난해 11월26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부 앞에서 '해군간부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 사건 무죄판결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김예리 기자

▲ 지난해 7월13일 오전 수행비서 성폭력 의혹으로 재판 중인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린 5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등 회원들이 ‘증인 역고소’에 항의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연합뉴스
▲ 지난해 7월13일 오전 수행비서 성폭력 의혹으로 재판 중인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린 5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등 회원들이 ‘증인 역고소’에 항의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연합뉴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위력에 의한 성폭행도 1심 재판부가 위력을 고려하지 않고 무죄를 선고했다는 점에서 걸림돌로 뽑혔다. 서울서부지방법원 제11형사부(재판장 조병구, 판사 정윤택·황용남)의 ‘위력이 존재하나 행사하진 않았다’는 판시 논리가 부조리했다는 것.

전성협은 재판부가 언론에 의한 2차 피해를 야기한 점도 지적했다. 전성협은 “피고(안희정 전 지사) 측 증인을 공개 신문해 피고인이 피해자를 비난하는 과정이 언론에 퍼졌다. 재판부는 이를 예견할 수 있었음에도 어떤 보호조치도 하지 않았고, 이는 언론의 극심한 2차 가해로 이어졌다”고 밝혔다. 배복주 전성협 공동대표는 “2심 재판부는 이와 달리 재판을 대부분 비공개 진행했고, 그 결과 언론 보도와 2차 가해도 덜하다”고 했다. 

고등군사법원은 해군 간부 2명의 성폭력을 놓고 ‘위력에 의한 성폭력은 될 수 있으나 강간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무죄로 판단했다. 서부지법은 안희정 성폭력에서 ‘위력을 행사했다는 인과관계를 입증하지 못했다’며 무죄로 판단했다. 배복주 공동대표는 “두 사건 모두 재판부가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 위력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성폭력에 대한 법률 개념을 유연하게 적용하지 않아 무죄가 나왔다”고 비판했다. 

▲ 지난해 3월8일 여성노동자대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미투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 지난해 3월8일 여성노동자대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미투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배 대표는 “피해자는 언론 보도뿐 아니라 댓글을 보고 2차 피해를 심하게 겪는다. 안희정 사건의 경우 언론이 2차 가해 댓글을 유도했다. 많은 사람들이 피고인 측의 발언을 담은 선정적인 기사 제목을 보고, 기사 내용은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렇게 발휘한 상상력과 가부장적 통념이 합쳐져 사실을 왜곡하는 댓글여론이 만들어졌다”고 지적했다. 

이날 디딤돌 상은 성폭력에서 위력의 역할을 정확하게 해석하거나, 수사‧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의 2차 피해 방지에 힘쓴 재판부와 수사팀이 받았다. 이윤택 전 연희거리단패 예술감독의 성폭력 사건을 담당한 서울중앙지방법원 30형사부(재판장 황병헌)도 디딤돌에 선정됐다. 전성협은 “재판부는 피해자가 순응적 태도를 보였다고 성폭력 행위를 받아들인 것으로 볼 수 없다며 권력관계 맥락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이날 디딤돌 상을 받은 동두천경찰서 여성청소년과 정구록 계장은 수사 과정에서 언론 대응과 관련해 “성폭력 사건은 일반 폭력과 달라 정보를 함부로 알리지 않는다. 동두천도 마찬가지이지만, 지역에서 피해자는 낙인 찍히기 쉽다. 아주 작은 정보만 알려도 한 다리만 건너면 ‘아 걔?’가 돼 버린다”며 신중함을 당부했다. 아래는 선정 내역. 

디딤돌 수사·재판=△인천 시의원에 의한 성추행 사건(인천지방검찰청) △SNS를 통해 알게 된 가해자에 의한 특수강간 사건(동두천경찰서) △군수에 의한 상습성추행 사건(전남지방경찰청) △이웃주민에 의한 발달장애인 유사강간 사건(부산고등법원 제1형사부) △학교총장에 의한 직원 성추행 사건(수원지방법원 평택지원) △지인에 의한 준강간사건 2심 사건(서울고등법원 제8형사부) △유명 연극 연출가에 의한 강간치상, 강제추행치상, 상습강제추행 사건(서울중앙지방법원 제30형사부).

걸림돌 수사·재판=△해군 간부 2명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강간 및 강제추행 사건(고등군사법원) △교사에 의한 학생 강간 및 불법촬영에 의한 협박피해 무고건(서울남부지방검찰청) △차기유력 대선후보 도지사의 위력에 의한 간음 및 강제추행(서울서부지방법원 제11형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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