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장깨기’라는 말이 있다.

최근 인터넷 상에서 맛집을 찾아다닐 때도 이 말을 쓰면서 ‘성지순례’와 비슷한 말로 의미가 확장됐지만, 원래 이 말은 무술도장을 찾아 그 도장의 관장을 이기는 일을 일컫는다. 1970~80년대 유행했던 홍콩 무술영화에 이런 장면이 많았다. 무술 세계에서 실제로도 이런 일이 많았다. 맨손으로 소를 때려잡은 걸로 유명한 최영의(최배달)의 ‘도장깨기’는 지금도 종종 회자된다.

21일자 한겨레신문 1면 하단 광고를 보고 문뜩 ‘도장깨기’가 떠올랐다. 한 찬핵 단체가 낸 이 광고는 그간 찬핵 단체가 계속 주장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단체 창립대회 날짜와 장소를 안내하면서 몇몇 탈핵인사들을 초대한다고 밝혔다. 광고에도 실명을 거론하며 자신들 주장에 입장을 묻고 토론회 참석을 요청하고 있다. 마치 공개결투를 청하는 것처럼 말이다.

▲ 지난 1월21일 한겨레 1면에 실린 광고
▲ 지난 1월21일 한겨레 1면에 실린 광고
정말 탈핵인사들에게 초청장을 보내고 싶었다면 굳이 일간신문에 광고까지 할 필요는 없다. 원래 ‘공개 결투장’은 실제 결투를 청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얼마든지 이긴다는 자신감을 보이는 ‘내부적인 목적’이 더 중요하다. 더구나 탈핵기사를 계속 내는 ‘한겨레신문’ 1면에 이런 광고를 내는 ‘본진 타격(!)’의 의미도 컸다.

이 광고가 다룬 ‘탈원전 정책 때문에 미세먼지가 많아졌다’는 주장은 이미 수많은 언론이 팩트 체크 기사로 ‘거짓’임이라고 밝혀져 다시 언급할 생각은 없다. 사실과 과학으로 말하자며 ‘헛소리’, ‘방사선 공포를 퍼뜨리려고 동분서주하는’, ‘거짓과 미신’ 같은 감정적이거나 선동성 문구가 들어간 것도 당황스럽지만, 더 안타까운 것은 찬핵 진영이 바라보는 탈핵 정책에 대한 시각이다.

아직도 찬핵 진영은 왜 ‘탈핵’이란 말이 나왔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대표적 예가 광고에 실린 “대통령님은 도대체 어디서 누구에게 무슨 보고를 들었기에” 같은 문구다. 그동안 찬핵 진영은 대중 연설로 대통령이 어디서 이상한 말을 듣고 혹은 영화 한 편 보고 탈핵정책을 시작했다는 식으로 설명해왔다. 현 상황을 이렇게 분석한다는 사실에 놀랍다. 정말 그랬다면 최순실 국정농단사태에 버금가는 큰 사건이었을 것이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한수원 비리, 경주-포항 지진 등 국민이 핵발전에 의혹과 우려를 가질 때, 찬핵 진영이 얼마나 귀를 닫고 있었는지 여기서 잘 드러난다.

이 같은 시각은 몇몇 탈핵인사들을 제압(!)하면 된다는 식의 접근으로 이어지곤 한다. 찬핵 진영은 일부 탈핵인사를 고소하거나 언론 지면에서 집중 공격하는 방식을 채택해왔다. 이번 광고에서 몇몇 탈핵 인사들 실명을 거론한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이들 때문에 국민이나 대통령이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위 ‘선량한 국민 선동하는 운동권’이나 ‘착한 우리 아이 망치는 선배’만 없으면 문제는 해결된다는 1980년대식 접근법이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문제가 있기에 운동이 확산되는 것이다. 한국 탈핵운동은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급속히 확대됐다. 과거 핵발전소 지역주민과 환경단체가 주축이던 것이 이제는 종교계, 생협, 노동계, 교사와 교수, 법률가, 의사 등 다양한 사회단체와 직종으로 퍼졌다. 이렇게 된 것은 핵발전이 지닌 위험성과 미래세대에 책임을 자각해서다. 다양한 탈핵운동 연대체가 있지만, 어느 누구도 한국탈핵운동 전체를 포괄한다고 자임하기 힘든 상황이 됐다. 그 정도로 탈핵운동은 넓게 확산됐다. 무슨 운동이나 마찬가지지만, 사회운동은 한 두 사람의 영웅이 만든 것이 아니다. 이름을 다 알기 힘든 많은 이들이 정성과 노력을 쏟아 부어 만들어 온 것이 우리나라 탈핵운동이다.

▲ 2014년 8월30일 촬영된 우리나라가 최초로 수출한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 1호기의 건설현장. ⓒ 연합뉴스
▲ 2014년 8월30일 촬영된 우리나라가 최초로 수출한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 1호기의 건설현장. ⓒ 연합뉴스
찬핵 진영의 철지난 ‘도장깨기’나 ‘공개 결투장’식 접근은 우리나라 에너지정책 변화는 물론 핵산업계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에너지 정책 변화가 아니더라도 국제 핵산업계는 최근 큰 난관에 부딪혀 있다. 프랑스의 대표적 핵기업 아레바는 이미 큰 구조조정을 겪으며 회사가 쪼개졌고, 도시바, 히타치, 미쓰비시 등을 앞세워 핵발전소 수출에 나서던 일본 아베정부의 계획은 모두 무너졌다. 재원과 기술이 부족한 우리나라는 메이저 시장인 중국에는 발도 못 붙이고, 마이너 시장에서 기존 선진국과 출혈 경쟁을 계속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우리의 대책은 너무나 미흡하다. ‘핵발전소 1기 수출이면 50억 달러, 중형차 25만대’ 같은 이야기가 고장 난 레코드처럼 벌써 10년째 정치권에서 반복되는 현실부터 바로 잡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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