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오늘은 2018년을 마감하며 배우 반민정에 주목했다. 반민정은 영화촬영현장에서 강제추행을 당했고 올해 대법원은 가해자의 유죄를 확정했다. 반민정에게 악의적인 가짜뉴스를 퍼뜨렸던 또 다른 가해자는 감옥에 갇혔다. 반민정은 영화 촬영현장에서의 성적자기결정권을 인정한 최초의 판례를 이끌어냈고, ‘기자’란 탈을 쓰고 허위사실을 유포한 이들이 엄벌에 처해질 수 있다는 중요한 판례를 남겼다. 그가 이 같은 법정승리를 이끌어내기까지 1300일에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다.

반민정은 모든 것이 무너졌던 날을 버텨냈고 긴 법정싸움을 버텨내고 버텨냈다. 그렇게 그의 ‘미투’는 승리했다. 그러나 지금도 가해자의 유튜브 방송에서 쏟아지는 주장을 그대로 받아 적으며 진실을 왜곡하는 언론이 있다. 여전히 가해자의 일방적인 주장이 언론을 통해 확산되는 상황에서 사건은 끝날 수 없다. 이를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미디어오늘은 배우 조덕제(본명 조득제)의 강제추행을 인정한 서울고등법원 판결문과 강제추행 당시 사건 영상분석보고서, 증인 신문 등을 바탕으로 이 사건을 재구성했다. 또한 반민정에 대한 허위정보를 유포했던 코리아데일리 이재포와 김○○과 관련한 서울남부지법 판결문 등을 바탕으로 반민정이 가짜뉴스의 피해자로 겪었던 비현실적 경험들을 정리했다. 언론은 이 사건에서 주요한 ‘가해자’다.

▲ 배우 반민정. ⓒ반민정 제공
▲ 배우 반민정. ⓒ반민정 제공
① 그날

2015년 4월16일. ‘그날’은 모든 것이 무너졌던 날이었다.

그날 이후 반민정은 TV를 보다 조덕제가 나오는 광고를 보고 구토를 했다.

2015년 4월9일부터 영화 ‘사랑은 없다’ 촬영에 나섰다. 4월16일 오후 11시30분 경, 한 오피스텔에서 이 영화의 13번째 장면을 촬영했다. 시나리오는 이러했다. “기승이 은정의 바지를 찢어 내린다. 은정의 몸 구석구석에 오래된 멍들이 독버섯처럼 배어있다. 은정을 돌려 벽에 붙이고는 뒤에서 하이에나 같은 신음을 한다.” 그러나 현장에서 감독 지시에 따라 바지를 찢는 부분은 상의를 찢는 것으로 변경됐다. 두 사람 모두 이를 알고 있었다.

이 장면은 피해자가 상습적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피해자를 벽으로 밀어붙이는 부분까지는 허리 이상에 앵글을 맞추다가 피해자의 상의를 뒤로 젖혀 피해자의 등 부위가 드러나면서부터는 가슴 이상으로 앵글을 맞추면서 피해자의 등 부위에 미리 설정한 멍 분장이 보이도록 화면을 잡을 예정이었다. 그 외의 폭력이나 신체적 노출 및 직접적인 성행위는 합의되지 않았다.

이날 감독은 가해자를 향해 “옷을 확 찢어버리는 거야. 그 다음부터는 마음대로 하시라니까. 미친놈처럼. 굉장히 처절하게. 이거는 에로가 아니잖아. 죽기보다 싫은. 강간당하는 기분이거든. 그렇게 만들어 주셔야 돼요. 얼굴 위주로”라는 취지로 연기를 주문했다. 감독은 “마음대로 하시라고요. 한 따까리 해야죠. 굉장히 중요한 씬이에요. 사육하는 느낌이 들어야 돼”라고 했다. 감독과 가해자와의 대화 현장에 반민정은 없었다. 물론 이 같은 지시과정에서도 가슴을 만지고, 바지 속으로 손을 넣으라는 지시는 없었다.

촬영이 시작됐다. 피해자의 상의 티셔츠 뒷부분을 절반 이상 찢어 등 부위를 대부분 노출시킨 후 피해자의 뒤쪽에서 오른손을 피해자의 오른쪽 겨드랑이 아래로 집어넣어 피해자의 가슴 부위를 만지고, 계속해서 브래지어 뒤 끈까지 완전히 끊어내 가슴 부위를 일부 노출 시킨 뒤 가슴 부위를 여러 차례 만졌다. 브래지어를 찢는 건 대본에 없었다. 동시에 여러 차례 피해자 바지의 앞쪽으로 손을 집어넣어 추행했다. 바지는 고무줄밴드로 되어 있었다. 바지를 내리지 못하게 잡고 있어야 했다.

배우가 마음대로 촬영을 중단할 수 없었다. 감독의 컷 지시가 간절했다.

▲ MBC '당신이 믿었던 페이크'의 한 장면. 영화 '사랑은 없다'의 촬영 장면 중 문제의 13번 장면. ⓒMBC
▲ MBC '당신이 믿었던 페이크'의 한 장면. 영화 '사랑은 없다'의 촬영 장면 중 문제의 13번 장면. ⓒMBC
의상팀과 분장팀이 ‘컷’ 사인 후 바로 다가와 경악하며 옷을 덮어 상의를 가렸다. 상처를 치료했다. 콘티 대본이나 시나리오에는 브래지어를 찢는다는 지시가 없었다. 이 행위는 촬영 전 고지되지 않은 것이었다. 당연히 의상팀은 여벌의 속옷을 준비하지 않았다. 반민정은 속옷이 없어 다음 장면 촬영도 할 수 없었다. 바지의 버클(똑딱이 단추)은 풀려 있었다. 반민정은 촬영 직후 방으로 들어가 울었다.

반민정은 그 후 방으로 들어온 장훈 감독에게 모든 성추행 사실을 말하고 항의했다. 조덕제의 사과를 요구했다. 감독은 조덕제를 불러 경위를 묻고 사과하라고 했다. 조덕제는 연기에 몰입했던 것 같다고 해명했다. 이후 조덕제는 문자로 사과했으며 동시에 영화 자진하차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반민정은 그것으로 정리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후 조덕제는 하차를 번복했고 결국 사건 일주일 뒤, 두 사람이 만났다. 

반민정은 조덕제에게 따졌다. 브래지어를 찢고, 가슴을 만지고, 팬티 안으로 세 번이나 손을 넣은 이유에 대해. 조덕제는 “내가 사과할 거는 충분히 사과하고 잘못한 거에 대해서는 내가 대가를 치러야겠지”라는 취지로 말했고, 반민정 앞에서 무릎 꿇고 사과했다. 당시 장면에서 반민정의 바지를 내리는 것이 필요하지 않았고 감독이 이를 요구하지도 않았지만 조덕제는 바지를 내리려고 했음을 인정했다. 그는 연기였다는 걸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반민정은 더 이상 조덕제와 영화를 찍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조덕제는 곧 “너가 만지지 말라고 했냐. 브래지어 찢지 말라했냐”며 따지기 시작했다. 성폭행을 당한 사람에게 성폭행을 한 후 ‘너가 성폭행 하지 말라고 했냐’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반민정은 조덕제의 하차를 요구했다.

반민정은 조덕제를 강제추행으로 신고했다. 자신의 억울함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자 조덕제는 명예훼손과 무고를 주장하며 반민정을 형사 고소했고 민사 소송까지 제기했다. 조덕제는 그해 7월 “반민정은 추행당한 사실이 없음에도 내가 불순한 의도를 갖고 강체 추행했다는 허위사실을 유포해 명예를 훼손했다”며 인천지검 부천지청에 고소장을 냈다. 긴 법정 싸움이 시작됐다.

② 검찰조사

2015년 12월15일 인천지검 부천지청. 검찰 측 조사.

‘촬영을 빙자한 추행이 몇 분간 계속되었는데, 어째서 중간에 직접 촬영을 중단시키고 상대방에게 항의하지 않았나요.’

반민정이 답했다.

“성추행을 당한 여성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 당시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한지요? … 이와 같은 질문을 받을 때는 정말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미칠 것 같습니다. 사건 당시에는 너무 큰 충격과 수치심과 두려움 등에 정신이 없었고 당장 그 자리를 피하자, 저항을 한다라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여러 번 그 상황을 벗어나려고 저항했으나 제압을 당했습니다.”

“장훈 감독은 10여분 안에 촬영을 마치고 촬영 장소를 비워줘야 한다고 계속 강조를 해서 배우와 스텝들은 심리적 부담을 갖고 있었습니다. 새벽에 다음 장면 촬영도 있었기 때문에 모든 스텝과 배우들이 촉박한 시간 안에 촬영을 마쳐야 하는 부담감을 안고 촬영했습니다. 사고 장면은 전체 롱 테이크로 촬영해 중간에 끊고 다시 재촬영을 요구하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배우로서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용기를 내 그 전까지 촬영한 장면을 살릴 수 있도록 카메라 앵글 밖으로 빠져나가거나 연기를 하지 않은 채 저항을 하는 등 감독의 컷 지시를 유도했습니다.”

‘실제로는 상대방이 가슴을 만지고 아래에 손을 넣었지만, 촬영 종료 직후 첫 멘트가 “이씨…브래지어까지 찢었어…”였던 이유는.’

반민정이 답했다.

“브래지어까지 찢었어-라는 건 수위가 약한 표현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정황들을 충분히 내포한 말이라 생각됩니다. 브래지어를 찢는 것 또한 성추행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저는 상의와 브래지어가 찢겨져 상체가 알몸으로 노출된 상태였습니다. 겨우 가슴부분을 가리고 있었고, 성추행을 당한 정신적인 충격과 공포 때문에 무서웠습니다. 많은 스텝들 앞에서 수치심이 치밀어 오른 상태였습니다. 그 상황에서 가슴과 음모를 얘기하며 더한 추행을 당했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검찰조사를 받던 그 무렵은 반민정에게 무척 힘든 시기였다.

3년 전 자신에게 개인 연기지도를 받았던 제자였던 배우 ㄱ씨가 그 무렵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간간히 소식이 오고갔던, 밝고 열정적이었던 22살의 어린 후배였다. 견디지 못한 말 못할 사연이 있었을까. 제자를 지켜주지 못한 마음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반민정은 검찰 측에 호소했다.

“제발 이 사건을 외면하지 말아주세요. 이 사건은 한 여배우의 인생과 더불어, 대중문화가 성숙하게 발전하기 위해 ‘연기와 작품을 빙자한 성범죄’의 악순환이 되지 않도록 경종을 울려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 반민정. ⓒ노컷뉴스
▲ 반민정. ⓒ노컷뉴스
③ 1심 재판

2016년 2월29일. 1심 1차 공판일이 열렸다. 판사는 종종 조는 모습을 보였다. 조덕제 측은 자신이 팬티 속으로 손을 넣었다면서 반민정이 놀라거나 소리를 지르는 등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바지가 벗겨진 것을 본 사람은 없으며, 반민정이 이 장면 촬영 직후 ‘브래지어까지 찢어졌다’는 말 이외에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았으며 피해자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조덕제 측 변호인은 반민정에게 ‘기망의 습벽’이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일련의 일을 살펴보면 피해자는 일반인들과 달리 작은 일도 상당히 과장되게 표현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가 일명 식당사건과 병원사건이었다.

△식당사건=반민정이 2014년 12월13일 한 식당에서 국수를 먹고 배탈이 났다고 주장하며 식당에 배상을 요구했다. 위생검사 결과 아무 문제도 없고, 다른 고객도 아무 증상이 없었지만 반민정은 국수가 문제라고 우기면서 합의금으로 600만원을 요구했다. 식당은 반민정에게 218만원의 합의금을 줬다.

△병원사건=반민정이 2014년 12월16일 병원에서 수액을 맞던 중 간호사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피가 역류하자 119에 신고를 했고 합의금으로 300만원을 받았다.

이 같은 조덕제 측 일방의 주장은 1심이 진행 중이던 7월8일 인터넷신문 코리아데일리가 기사형태로 게시하며 본격화됐다. 4일 뒤인 7월12일 조덕제측은 재판부에 추가 변론을 요청했다. 그리고 5차 공판 뒤인 7월14일, 7월29일, 8월1일, 8월17일 코리아데일리는 연속해서 허위사실을 기사로 게시했다. 기사 제목은 다음과 같다.

△7월8일 “[단독] 백종원 상대로 돈 갈취한 미모의 여자 톱스타”

△7월29일 “[단독] 백종원 식당 여배우 ‘혼절했다’ 병원서도 돈 받아 경찰 수사 착수”

△8월1일 “백종원 식당 여배우, 근거자료(?) 내세워 이중으로 목돈 챙겨”

△8월17일 “TV소설 ‘저 하늘에 태양이’ 미모의 메인 여배우 만행사건”

조덕제측 변호인은 피해자가 ‘기망의 습벽’이 있다며 기사를 적극 활용했다. 반민정은 지속적으로 해당 기사에 대해 언론중재위원회 조정신청에 나섰고 그 때마다 반론보도로 조정신청이 이뤄졌으나 가짜뉴스는 일베, 오늘의유머, 디시인사이드, MLB파크 등 각종 인터넷커뮤니티에 공유되며 확산됐다.

코리아데일리 기사는 ‘피해자가 자신의 이해관계와 주변상황에 따라 사실을 왜곡하는 경향도 있다’는 인신공격의 근거로 사용됐다. 1심 재판 내내 식당사건과 병원사건이 지속적으로 언급됐다. 11월14일 변론이 종결됐고, 12월2일 재판부는 조덕제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 게티이미지.
▲ 게티이미지.
④ 2심 재판

2017년 3월29일. 2심 1차 공판이 시작됐다. 2심 재판부는 1심 재판부와 달리 사건 영상에 주목했다. 변곡점은 영상이었다. 1심에선 사건 영상 분석이 없었다. 실제 영상을 법정에서 상영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서울남부지검은 코리아데일리 편집국장 이재포와 기자 김○○을 허위사실유포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했다. 상황은 반전되고 있었다.

2017년 6월28일. 한 여배우가 이 사건 증인으로 나섰다.

문:증인은 노출씬이 있는 영화에 출연한 사실이 있습니까.

답:예. 있습니다.

문:증인은 이 사건 13번 장면 실제 영상을 보았는가요.

답:예. 보았습니다.

문:그와 같은 장면을 촬영하게 되는 경우 실제 촬영 전에 남녀 배우들 간에 구체적인 연기의 내용에 관하여 상호 협의하는가요.

답:예. 폭력이 들어가거나 이런 장면을 연기할 때는 신체를 만지거나 때리거나하기 때문에 서로 배우들 간에 조심스럽게 “내가 이렇게 하려고 하는데 괜찮겠냐”, “이렇게 할 거다. 그렇게 해도 괜찮겠냐” 이런 식으로 협의를 합니다, 구체적으로.

문:만약 애드립 연기가 당초 시나리오보다 더 폭력적이거나 더 선정적으로 되는 경우 상대배우에게 사전에 알리지 않고 일방적으로 애드립 연기라고 하기도 합니까.

답:보통 애드립은 상대 배우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합니다. 상대 배우 신체를 만지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에 상대에게 말하지 않고 애드립을 한다는 건 같은 배우로서 이해를 못하겠고, 그런 경우는 없는 것 같습니다.

문:이 사건 문제의 영상 중 콘티에 없는 내용들에 대해 피해자는 사전에 전혀 알지 못했는데, 그런 경우가 통상 영화 촬영에서 가능한 것입니까.

답: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⑤ 2심 판결

2017년 10월13일. 서울고등법원 제8형사부는 항소심에서 무죄였던 원심을 파기하고 조덕제에게 징역1년 집행유예2년을 선고하고 40시간 성폭력 치료강의 수강을 명령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은 연기행위를 벗어나 피해자와 아무런 합의도 없이 연기를 빌미로 피해자의 가슴과 음모를 만지는 강제추행 범행을 함으로써 상당한 정신적 충격과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했다. 나아가 피해자를 무고했고,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등 피해자의 정신적 고통이 가중되게 했다. 그럼에도 피고인은 범행을 부인하면서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 있다. 피고인에게는 이에 상응하는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판시했다.

조덕제측은 모든 게 녹화되는 영화촬영현장에서 추행하려는 의도를 갖는 건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다는 취지로 주장했으나 재판부는 이 사건의 경우 연기 과정에서 순간적·우발적으로 흥분해 추행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물론 우발적이라고 해서 추행의 고의가 부정된다고 볼 순 없었다. 조덕제가 반민정의 신체를 만지긴 했으나 업무(연기)에 해당해 처벌할 수 없다는 1심 판단은 뒤집혔다. 재판부는 “연기를 빌미로 저질러진 것일 뿐, 정당한 업무행위에 기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않은 정당행위에 해당한다고 볼 수도 없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설령 피고인(조덕제)이 감독의 일방적인 연기지시에 충실하게 따르려는 의도로 피해자(반민정)의 가슴을 만지고, 피해자의 바지 속으로 손을 넣은 것이라거나, 이 영화가 19세 미만 관람불가 등급을 전제로 촬영된 것이라고 가정하더라도, 이와 같은 감독의 일방적인 연기지시나 이에 따른 피고인의 연기내용에 관해 피해자와 사전에 공유하거나 피해자로부터 승낙을 받지 않은 이상, 그것을 단지 정당한 연기였다라고만 볼 수는 없고, 피고인의 행위로 인해 피해자는 상당한 성적 수치심을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무엇보다 “신체의 일부 노출과 성행위가 표현되는 영화촬영 과정이라 하더라도 연기를 하는 행위와 연기를 빌미로 강제추행 등의 위법행위를 하는 것은 엄격히 구별되어야 하고, 연기나 촬영 중에도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은 충분히 보호되어야 한다”고 판시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또한 “피해자가 입고 있던 바지는 고무줄밴드로 되어 있었고 피해자는 벨트를 매고 있지 않았음에도 피고인은 피해자의 바지를 내리려고 했으나 벨트로 인해 바지를 내릴 수 없었다고 납득하기 어려운 해명을 하고 있다”고도 밝힌 반면 “피해자의 진술은 주요 부분에서 일관되고 매우 구체적이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어 “(카메라스텝들이) 피해자와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각자의 임무에 집중하느라 화면에 잡히지 않는 피해자의 하체 부분에 대해서는 제대로 지켜볼 여유가 없었기에 하체부분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스텝들이 피해사실을 목격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피해자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 디자인=이우림 기자.
▲ 디자인=이우림 기자.
⑥ 가짜뉴스의 정체

2017년 9월13일. 이재포·김○○ 명예훼손 재판. 일명 식당사건 당사자 식당주인 증인신문.

문:피해자(반민정)가 이 사건으로 증인에게 금전 배상을 직접적으로 요구한 사실이 있나요.

답:아닙니다.

문:기사에 따르면 피해자가 증인에게 600만원 합의금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하니까 구청에 신고해서 식당이 조사를 받았다고 되어 있는데 맞나요.

답:아닙니다. 주말에 음식물 배탈사고가 났고 월요일 아침에 식약청 점검을 받았고, 저희는 위생점검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보험회사에 접수를 하고 반민정한테 전화해서 보험가입이 되어있으니 다 나을 때까지 편하게 치료 받으라고 했습니다.

문:(사건) 2년이 지난 다음에 기자한테 전화가 왔는데 이전에 이 사건이 언론에 나오거나 문제가 된 적이 있나요.

답:없습니다.

문:그 때 기자가 왜 이거를 문제 삼아야 된다고 얘기했나요.

답:제 추측으론 다른 재판하고 연관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어떤 근거로 그렇게 추측하는 것인가요.

답:조득제 배우가 기사가 나오기 약 한 달 전에 저를 찾아와서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2017년 9월13일. 일명 병원사건 당사자 원무과장 증인신문.

문:세명의 간호사가 근무를 하다가 두 명은 퇴근하고 한명은 수액을 맞고 있는 피해자를 그대로 둔 채 병원 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가버린 사실이 있지요.

답:예. 있습니다.

문:당시 많은 사람들이 응급실에 찾아가서 사과한 것은 피해자가 오라고 해서 간 게 아니고 병원측이 잘못을 인정했기 때문에 찾아가서 미리 사과한 것이죠.

답:저희가 잘못한 게 맞는데 당연합니다.

2018년 2월7일. 일명 병원사건 당사자 의사 증인신문.

문:기사내용이 뭐가 다르다고 증언하려고 했었나요.

답:저희한테 손해배상을 억지로 청구한 부분은 없습니다. 저희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미안했기 때문에 된 상황이라.

문:병원 측이 미안하고 책임을 느껴서 당연히 손해배상을 해줘야 되는 상황이었다는 것인가요.

답:예.

⑦ 뒤늦은 반성문

2018년 5월9일. 1심 선고공판. 재판부는 김○○에게 징역 1년6개월 집행유예 3년, 이아무개 코리아데일리 대표에게 징역1년 집행유예 2년, 이재포에게 징역 1년2개월을 선고했다.

앞서 코리아데일리는 병원사건을 보도하며 반민정이 “병원측에 자신은 피를 보면 혼절하는데 수액 주사바늘을 제때 뽑아주지 않아 많이 놀랐으며 그 동안 영화촬영과 광고 재계약을 하지 못했으니 손해를 보상하라며 돈을 요구했고 병원측은 소송이 두려워 300만원을 주고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으나 판결문에 따르면 간호사들이 피해자를 병원에 혼자 남겨두고 먹을 것을 사기 위해 병원 밖으로 나가 자리를 비웠고, 병원 문까지 잠겨 있었다. 그 사이 수액투여가 끝나 피가 역류하자 반민정은 자신이 직접 수액주사를 뽑은 뒤 112를 불러 다른 병원으로 호송됐다. 병원은 과실을 인정하고 배상금을 지급했다.

재판부는 해당 기사를 두고 “피해자가 문이 잠긴 병원에 홀로 갇혀 있었고 피를 흘리고 쓰러진 채 발견되었다는 중요한 내용을 누락하여 사실을 왜곡한 것”이라고 판시했다. 이어 “병원은 배상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자와 마찰 없이 합의한 바, 소송이 두려워 합의했다는 보도는 사실 과장을 넘어 허위사실 적시에 해당하며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다는 것은 명백한 허위”라고 판시했다.

식당사건에 대해선 “피해자는 음식을 먹고 배탈 등 식중독 증상이 발생하는 사고를 당해 식품의약품안전처에 신고했고, 식당 업주는 피해자에게 배상을 제안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목돈 챙겨’, ‘갈취 여배우’, ‘뜯어’, ‘만행’ 같이 피해자를 폄하하는 표현을 직접 사용했다”고 지적한 뒤 “배우이자 대학에 출강하는 피해자는 ‘백종원 갑질여배우’로 알려졌고, 피고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변명을 내세워 책임을 회피하는 등 반성의 빛을 찾아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김○○은 명예훼손 범행에 이어 수사기관에 거짓으로 범인 행세를 했고, 이재포는 피해자가 유력 대권 후보자의 조카를 사칭하여 이 사건 기사를 취재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피해자가 그와 같이 사칭했다고 볼 자료는 없다”고 판시했다. 실제로 이재포는 항소심 결심공판에서 “반기문 총장의 조카 되는 분이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말을 바꿨다.

2018년 4월25일. 선고공판 직전 법정에 제출된 이재포의 반성문은 이러했다.

“피해자에 대해 일방적인 선입관이 있는 상태에서 취재를 하여 과하게 표현을 하였으며 비슷한 사건에 대해 두 번, 세 번 보도하며 피해자가 받았을 상처에 대해서도 깊이 공감하고 있으며 사과하고 싶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언론보도를 하는 자리가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지 그 무게감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때론 언론을 권력인양 생각했던 제 모습에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2018년 4월30일. 선고공판 직전 법정에 제출된 김○○의 반성문은 이러했다.

“경찰조사를 대신 받으러 가는 것은 당연히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했음에도, 기자가 되고 싶은 마음에 잘못된 결정을 하였습니다. 기자가 되고 싶은 마음과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일방적인 취재로 피해자를 몰아갔으며, 부적절한 단어의 선택과 감정을 과하게 실어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제 잘못임에도 남의 탓을 하고 있었던 제 모습에 후회하고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뒤늦은 반성문이었다. 이재포는 현재 서울 남부구치소에 있다.

▲ 이재포씨. ⓒMBN보도화면 갈무리
▲ 이재포씨. ⓒMBN보도화면 갈무리
⑧ “두 번 다시 ‘기자’라는 이름으로…”

2018년 10월4일 서울남부지법 2심 선고공판. 김○○은 징역 1년, 이재포는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1심 판결보다 양형이 늘어난, 매우 이례적인 판결이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들은 성범죄 재판을 받고 있는 지인에게 도움을 주기 위하여, 오로지 피해자의 명예 등 인격을 훼손하기 위한 목적으로 피해자의 과거 행적을 조사한 후, 2년이나 지난 일들에 관하여 허위의 기사들을 반복해 작성했다”고 판시하며 죄질이 좋지 않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이재포의 매니저였던 김○○은 아무런 기자 경력이 없었지만 1심 재판 중이던 2016년 7월12일 코리아데일리에 출근해 반민정에게 불리한 기사만 작성했다.

피고인 김○○에 대해선 “이재포의 지시를 따르는 단순 역할에 머문 것이 아니라, 피해자에 관해 ‘경찰 수사 착수’라는 제목의 허위 기사를 쓴 이후 경찰서에 직접 진정서를 제출해 내사에 착수하도록 했으며, 관련 성범죄 사건의 피고인과 연락하고 자료를 공유하면서 그 사건에 사실 확인서를 제출하고 증인으로 증언하기까지 했으며 명예훼손의 범행에 이어 수사기관에서 거짓으로 범인 행세까지 했다”고 판시했다. 이재포에 대해선 “범행을 기획하고 주도하며 기자 경험이 전혀 없는 김아무개를 기자로 취직시키고 범행을 지시했다”고 판시했다.

무엇보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은 언론을 악의적으로 이용해 언론의 신뢰를 훼손했고, 수많은 언론인들의 자긍심을 훼손시켰다”고 판시했다.

코리아데일리는 이날 사과문을 내고 “피해자인 여배우에게 씻을 수 없는 마음의 큰 상처를 주었다”며 반민정과 관련된 기사를 모두 삭제했으며 영등포 세무서에 언론사 폐업 신고를 냈다고 밝혔다.

당시 반민정측은 2018년 9월6일부터 네 차례에 걸친 탄원서를 통해 “이 사건은 언론을 악용해 사법부 결과에 영향을 미치려는 악의적인 의도를 바탕으로 한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2차가해”라고 주장하며 엄벌을 요구했다.

반민정은 탄원서에서 이렇게 적었다.

“사람이 무섭고, 언론이 무섭고, 수사기관, 법정이 무섭고, 저도 무섭습니다. 그냥 제가 죽으면 끝날 것 같은 이 고통 속에서 겨우겨우 사법부에 대한 믿음 하나로 버텨왔습니다. … 이재포, 김○○을 엄벌에 처해주십시오. 그들이 빼앗아간 제 삶을 찾기 위해서라도 그들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치르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피고인들이 두 번 다시 ‘기자’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짓밟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저는 살고 싶습니다, 판사님. 제발 살려 주세요.”

⑨ 1246일

2017년 12월12일. 조덕제 측은 대법원 상고이유서에서 “자신의 가슴 노출이 담긴, 치욕적인 강간연기가 찍힌 13번 장면이 영화에 담겨 평생 남게 되는 것을 막고자 피고인(조덕제)이 하지도 않은 행동을 했다고 허위 및 과장 진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하며 항소심 유죄판결에 불복했다.

이런 가운데 디스패치는 항소심 판결 직후인 2017년 10월25일 “조덕제 사건, 메이킹 단독 입수…겁탈 장면 행동 분석”이란 기사를 내고 가해자를 옹호해 논란을 자초했다. 당시 디스패치는 “조덕제가 성추행 배우의 멍에를 짊어졌다. 겁탈 장면을 연기하다 실제 추행을 저지른 배우로 낙인찍혔다”고 적는가 하면 “둘만의 소송이 시작됐다. 증거 없는 진술 싸움이다”라고 보도했다. 이는 가해자에게 유리한 보도이자 항소심 판결을 무시하는 것이었으며, 피해자에 대한 2차 피해에 해당했다. 당시 기사에선 피해자가 마치 감독의 연기 지시를 조덕제와 함께 들은 것처럼 왜곡 보도하기도 했다. 그리고 수많은 매체가 “디스패치에 따르면”이라며 해당 보도를 확산시켰다.

그리고 2018년 9월13일. 대법원2부(주심 김소영 대법관)는 항소심 판결을 확정했다. ‘그날’ 이후 유죄 확정 판결까지 1246일이 걸렸다.

그때까지 ‘A양’으로 보도되었던 반민정은 이날 처음으로 자신을 드러냈다. 대법원 앞 기자회견자리에서 그가 말했다.

▲ 9월13일 대법원 판결 이후 기자회견에 나선 반민정씨. ⓒYTN보도화면
▲ 9월13일 대법원 판결 이후 기자회견에 나선 반민정씨. ⓒYTN보도화면
“…저는 이 판결이 영화계의 의미 있는 변화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연기와 연기를 빙자한 성폭력은 다릅니다. 폭력은 관행이 되어서는 안 되며, 잘못된 관행은 사라져야 합니다. …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의 룰을 파괴한다면 그런 예술은 존재가치가 없습니다. 이번 판결이 한 개인의 성폭력 사건에서 그치지 않고 한국 영화계의 관행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좋은 선례로 남기를 바랍니다. 조덕제의 행위, 그것은, 연기가 아니라 성폭력입니다.”

2018년 11월16일. 디스패치는 “조덕제 성추행 사건 보도와 관련해 성폭력 피해자의 얼굴과 이름이 노출된 점에 대해 피해자께 사과드린다”며 관련 기사를 모두 삭제했다. 당시 디스패치는 사건 영상 일부의 캡처본을 공개하며 ‘강제추행으로 보기 어렵다’는 윤용인 영상공학박사의 의견을 정정하기도 했다. 윤용인 박사는 이후 정식감정의뢰를 받고 강제추행에 해당한다는 감정 결과를 냈기 때문이다. 윤 박사는 당시 디스패치가 급박하게 의견을 구해 제대로 영상분석을 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디스패치의 사과를 보도한 매체는 소수였다.

윤 박사는 2017년 4월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 북한군개입설 가짜뉴스를 검증하는 과정에서 북한 특수부대 영상과 5·18 당시 영상에 등장하는 인물 간 동일여부를 분석한 전문가였다. 그가 2017년 12월13일부터 12월26일까지 13일간 사건 영상을 감정한 결과는 이러했다.

“반민정의 가슴을 만진 점, 반민정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가슴을 만지는 것으로 추정된 점, 반민정의 브래지어를 찢은 점, 반민정의 하체가 영상으로 판독되지 않으나 여섯 차례 반민정의 하체 부위를 닿게 한 행위로 연기가 아닌 실제로 성추행 및 성적수치심을 느낄 가능성 있는 추정 행위가 존재한 점, 반민정 상해 진단서 및 각종 피해 영상에서 반민정 하체를 추행한 치상의 증거가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조덕제가 반민정을 연기가 아닌 실제 강제 추행하고 폭행한 것으로 판단됨.”

⑩ “무엇을 더 해야 할까요”

신인 때였다. 친구처럼 지냈던 배우가 있었다. 나중에 다른 작품에서 주인공을 맡았는데 굉장히 힘들어했다. 노출이 있는 역이었는데, 자신은 영혼까지 살해당했다고 했다. 친구는 배우를 그만 뒀다. 수년 뒤 현장에 있던 촬영감독으로부터 그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공사’를 안 한 상태로 베드신을 찍었고, 친구는 ‘실제로’ 당했다.

그 후로도 촬영현장은 변하지 않았다.

대법원 판결 이후 언론은 반민정에게 주목했지만 영화계 내부는 대부분 조용했다. ‘이유 있는 침묵’이었다. 2018년 11월6일. ‘더 나은 영화 현장을 위해 영화계의 변화가 필요하다’란 주제로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날 배우 반민정이 참석했다.

“1심에서 무죄선고가 난 후, 항소심을 준비하며 받게 된 자료를 보며 저는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저는 제게 직접 섭외전화를 했던 영화 총괄PD로부터 노출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고, 당시 소속사 대표에게도 이 부분을 강조해 소속사 대표와 총괄PD의 계약 체결 후 ‘노출은 없다’라는 확인문자까지 받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 영화가 드라마 장르의 영화로 신체노출이 없다고 알고 계약을 했으며 촬영에 임했습니다. 그런데 법정에 제출된 영화제작사 대표의 녹취록에서 ‘현장에서 벗기면 된다’라는 식의 대화가 오갔다는 것을 듣고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 자리에는 당시 제 소속사 대표도 있었다고 합니다. 엄연히 계약서를 쓰고, 노출여부까지 검토했으며, 소속사까지 있었던 주연배우인, 연기경력이 오래된 저도, ‘현장’에서 제 의사나 계약내용과는 상관없이 노출을 강요받을 수 있던 겁니다.”

“저는 배우입니다. 물론 이제 이 말을 과거형으로 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피해자임에도 구설에 올랐다는 이유를 들며 제 캐스팅을 꺼린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연기를 더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배우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이며, 저는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현대사회 구성원입니다. 그래서 성폭력 피해를 입었을 때 사법시스템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했고, 그 결과를 끌어냈습니다. 그런데도 전 제 자리에서 밀려나고 있습니다. 개인이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요. 무엇을 더 해야 할까요.”

“이 자리에 나서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제 사건의 처리만으로도 힘든 상황에서 저를 외면하는 영화계를 위해 제가 어떤 말을 한들 변화로 이어질 수 있겠느냐는 회의감도 솔직히 있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절망보다는 미래의 희망을 보고 싶습니다.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있음을 알리고 싶습니다. 많이 지쳤고 정말 버겁습니다. 제가 왜 싸우는지, 왜 신상을 공개하며 발언하는지, 부디 영화계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가지고 책임을 져야 할 이들이 좀 알아줬으면 합니다. 영화계 내부에서 먼저 변해야 합니다. 그래야 대중들도 변합니다. 노동권·인권침해와 성폭력 피해를 외면할 경우 영화계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피해자의 외침에 이제 답변을 주십시오.”

▲ 배우 반민정. ⓒ반민정 제공
▲ 배우 반민정. ⓒ반민정 제공
⑪ 또 다른 가해자, 언론

다만 배우가 되고 싶었다.

배우였던 아버지의 공연을 보고 자랐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연기를 전공했다. 집에서는 딸이 배우가 되는 것에 반대했다. 늘 부모에게 순응하는 딸이었지만 그 때만큼은 부모의 바람을 어기고 몰래 대학 원서를 냈다.

2001년 영화 ‘수취인불명’으로 데뷔해 백상예술대상 신인 연기상 후보자에 이름을 올렸다. 2014년 2월 중앙대 예술대학원에서 ‘영상연기에 있어 배우 워밍업과 긴장 해소 방안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몇몇 대형 매니지먼트사에서 연락이 왔지만 거절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시간강사 급여는 얼마 안 됐지만, 가르치는 게 즐거웠다.

지금껏 뮤지컬 ‘죽은 시인의 사회’ 등 13편의 공연을 소화했고 18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2012년 KBS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에 출연했고 같은 해 KBS 드라마 ‘각시탈’로 20회 대한민국문화연예대상 드라마 부문 연기상을 받았다. 배역은 독립군이었다.

배우 반민정은 2015년 4월16일 이후 멈췄다. 강제추행의 피해자가 됐고, 가짜뉴스의 피해자가 됐다. 긴 시간 독립군처럼 싸워야 했다. 이 사건은 지난 11월27일자 MBC 시사교양프로그램 ‘당신이 믿었던 페이크’에 등장하며 그나마 널리 알려졌다. 이날 조덕제의 강제추행사건이 피해자를 겨냥한 가짜뉴스 사례로 다뤄졌다. 이를 취재한 황순규 MBC PD는 “사건을 알면 알수록 언론의 잘못을 분명히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대법 판결 이후에도 SNS를 통해 가짜뉴스가 확산되는 게 놀라웠다”고 말했다.

반민정은 MBC ‘당신이 믿었던 페이크’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다.

“저는 가짜뉴스의 피해자입니다. 이제 벗어나고 싶습니다.”

이 사건에서 드러난 언론의 문제는 코리아데일리의 폐업신고만으로 끝나지 않는 상황이다. 강제추행 유죄가 인정된 가해자의 일방 주장이 여전히 기사화되고 있다. 가짜뉴스는 반복되고 있다. 심지어 가해자의 유튜브 채널을 홍보하는 기사도 등장하고 있다.

예컨대 헤럴드경제는 12월13일자 “조덕제TV 승승장구:진정성+예능감+시사 식견 3박자 찰떡궁합…시청자들 중독”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절박감에서 나오는 진정성”이 인기 비결이라며 “최근 불어닥친 페미니즘 광풍에 답답함을 느낀 많은 시청자들이 조덕제TV를 보면서 공감하고 의견을 나누면서 방송에 중독되고 있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언론의 문제를 바로잡지 않으면 ‘조덕제 모델’이 계속 나올 수 있다. 대법원이 인정한 강제추행 사건을 마치 ‘성性대결’인양 몰고 가며 유튜브에서 수익을 올리는 모델이다. 피해자가 아무리 바로잡으려 노력해도 언론이 사실 확인 없이 선정적으로 가해자의 주장을 반복해서 보도하면 끝이 없다. 대법원 판결이 났지만 여전히 피해자가 고통 받는 비상식적 상황이 이어지는 건 언론의 탓이 크다. 배우 반민정의 삶을 무너뜨렸던 또 다른 가해자, 언론이 이 사건을 바로잡아야 한다. 반민정의 ‘용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보여야 한다.

(관련기사=배우 반민정 인터뷰 “대법원 판결났지만 오히려 언론으로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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