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황유미씨 아버지 황상기씨(63)는 1955년 속초 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가장 노릇을 했다. 딸린 동생 넷과 식구를 부양하느라 초등학교도 채 마치지 못하고 돈을 벌어야 했다. 어선을 타고 공사장에도 나가는 등 가리지 않고 생활비를 벌었다. 스물여섯부턴 택시를 타며 가정을 꾸렸고, 1985년 첫 딸 유미씨를 낳았다. 그리고 22년 후 딸을 잃었다.

그는 37년차 택시운전사지만 13년은 허수다. 유미씨가 백혈병 확진을 받은 2005년부턴 영업을 제대로 뛰지 못했다. 2005년부터 2년간은 유미씨 간병하랴, 2007년부터 최근까진 ‘산재 인정 운동’을 하랴 생업에 매진할 새가 없었다. 리영희재단은 11년 한 길을 걸은 황씨와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을 6회 리영희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반올림의 ‘진실을 위한 헌신과 용기를 기리기’ 위해서다. 황씨는 29일 대표로 상을 받는다. 미디어오늘은 지난 24일 속초에서 황씨를 만나 지난 날 소회를 들었다.

▲ 지난 11년간 삼성전자 백혈병 산재 인정 운동을 한 황상기씨. 사진=반올림 다음 카페 앨범
▲ 지난 11년간 삼성전자 백혈병 산재 인정 운동을 한 황상기씨. 사진=반올림 다음 카페 앨범
▲ 지난 11년간 삼성전자 백혈병 산재 인정 운동을 한 황상기씨. 사진=반올림 다음 카페 앨범
▲ 지난 11년간 삼성전자 백혈병 산재 인정 운동을 한 황상기씨. 사진=반올림 다음 카페 앨범


월간 ‘말’·수원시민신문만 유일 보도

황씨 주장은 11년 전엔 ‘괴담’이었다. 2007년 삼성전자는 물론 정부기관, 언론, 시민단체까지 황씨 주장을 외면했다.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직업병을 처음 세상에 알린 언론사는 ‘월간 말’(현재 정간)이다. 윤보중 기자가 취재하고 정웅재 기자가 작성한 “세계 일류 삼성반도체, 산업재해 은폐하려 했나?” 기사다.

황씨는 살면서 노조나 시민단체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상황을 알리고 싶은데 어딜 찾아갈지 몰라 ‘노조 번호 알려달라’ ‘정당 번호 알려달라’고 114에 물어봤다. 어디도 황씨 말을 주의깊게 듣지 않았다. 황씨는 텔레비전 자막을 보고 지역 방송사에도 전화했다. 방송사가 ‘직업병을 확인해주는 회사 공문을 가져오라’고 해 황씨는 냅다 전화를 끊었다.

▲ 월간 말 2007년 4월호
▲ 월간 말 2007년 4월호

이후 황씨가 찾은 곳이 ‘말’지다. 당시 삼성전자로부터 금전 회유를 받았던 황씨는 기업 광고를 받지 않는 군소 언론을 찾아야겠다 마음먹었다. 유미씨가 ‘컴맹’이던 황씨에게 컴퓨터를 가르쳐줬다. 이것저것 클릭하다 연락처를 본 황씨는 바로 전화를 걸었고 말지 기자는 곧바로 속초로 가 유미씨를 만났다. 2007년 2월이었다.

4월7일 점심, 황씨는 우체부가 준 ‘월간 말’을 받아들고 밥을 삼키지 못하고 엉엉 울었다. 유미씨 생전 모습과 증언이 추가취재 내용과 함께 6쪽에 걸쳐 실렸다. 유미씨는 이미 3월6일 숨졌다. 기사는 “1997년 이래 기흥공장에서 최소 6명이 백혈병에 걸렸다. 유미씨와 같은 라인에서 일한 이숙영씨도 비슷한 시기에 백혈병에 걸려 사망했다”고 밝혔다.

말지가 전한 이례적 백혈병 발병 수치에 관심가진 언론사는 지역지 ‘수원시민신문’밖에 없다. 경향·한겨레 등 9개 전국단위 종합일간지, 방송 3사 모두 1건도 보도하지 않았다. 당시 5년차 기자였던 김삼석 수원시민신문 기자는 “같은 라인에서 같은 시기 젊은 여성노동자 둘이 백혈병에 걸려 사망했다. 반도체공장이 화학물질을 많이 쓰는 걸 아는데 문제제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말지 윤보중 기자도 “IMB 반도체 공장의 암·백혈병 집단 발병 문제를 알고 있었다. 보도가치는 충분했다”고 밝혔다.

▲ 2007년 4월25일 수원시민신문. 사진=반올림 제공
▲ 2007년 4월25일 수원시민신문. 사진=반올림 제공

언론사 두 군데론 파급효과가 작았다. 김 기자는 직접 ‘신문 배급’도 했다. “당사자들이 더 많이 알았으면 하는 마음에” 삼성전자 직원 기숙사 옆 주차장에 있는 자동차 웨이퍼에 일일이 신문을 끼워넣었다. 아내가 도운 적도 있다. 돌아서고 나면 경비원이 신문을 금세 수거해갔다. 김 기자는 기흥공장 앞 회견장에서도 가끔 직원들에게 신문을 나눠주며 경비원 제지를 받았다. 종합일간지는 2009년 무렵 반도체 직업병 문제를 본격 보도했다.

“유미 분골 그 사람들 얼굴에 확 뿌렸어야 했는데”

황씨는 유미씨 분골을 속초 울산바위 아래 뿌렸다. 눈물이 앞을 가리면서도 화가 끝까지 났다. 산재 신청을 하지 말라 회유했던 삼성전자 과장 서너명이 현장에 있었다. “화가 나서 아주 죽기 직전이야. 그 사람들 얼굴에 확 뿌리고 싶었는데 자신이 없어 못했어. 그게 지금도 후회가 돼 죽겠어.”

황씨는 삼성전자 임직원을 언급할 때마다 “울화가 치민다” “욕을 퍼부어도 모자라다”고 말했다. 반올림 설립 전까지 자신을 끊임없이 겁박하고 회유한 기억 때문이다. 2006년 9월 사표를 수리하러 유미씨를 찾은 A과장은 산재보험 신청 요구에 “이 큰 회사 상대로 이길 수 있습니까. 다른 걸 요구하시라”고 말했다. 치료비 얘기가 나오니 과장은 “5천만원 드릴테니 당장 사표를 써달라”고 했다. 그런 A과장은 10월 유미씨 백혈병 재발 후 ‘이것밖에 없다’며 황씨에게 100만원짜리 수표 5장을 줬다. 황씨는 화가 끝까지 났지만 참았다.

황씨는 그날 1장을 쓰고 4장을 외투 안주머니에 넣었다. 자고 일어나니 외투는 세탁된 뒤였다. 수표는 물을 흠뻑 먹고 심하게 훼손됐다. 황씨는 이 얘기를 하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책을 펴놓곤 그 조각난 걸 하나씩 하나씩 붙였지 뭐야. 흐트러지지 않게 책을 꾹 덮어 누르고. 근데 마지막 한 장은 절반이 없어. 책을 들고 우리은행에 가서 사정사정했지.” 은행직원은 수표 번호를 한참 본 뒤 황씨 통장에 400만원을 입금시켰다.

그러나 통장을 쥔 황씨는 화가 차올랐다. “이게 산재가 아니면 대체 뭐가 산재냐!” 다짜고짜 과장에게 전화해 욕을 퍼부었다. 이후 황씨와 삼성 직원은 여러 번 만났다. 이들은 그때마다 “유미 병은 개인 질병이다” “그 공장은 화학약품은 아예 쓰지도 않아요” “없어요. 가서 보세요”라고 말했다. 산재 신청 후 기흥공장 역학조사가 있었던 2007년 9월엔 안전 담당 그룹장은 “10억원 드릴게. 기자도 사회단체 사람도 만나지 말라”고 했다. 입을 꾹 다물었던 황씨는 더 이상 장난질을 두고 볼 수 없다 여겼다. 황씨는 곧장 민주노총 경기본부의 이종란 노무사를 찾아갔다. 2개월 뒤 반올림이 설립됐다.

▲ 반올림 대표이자 고 황유미씨 아버지 황상기씨가 23일 삼성전자-반올림 중재판정 이행합의 협약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 반올림 대표이자 고 황유미씨 아버지 황상기씨가 23일 삼성전자-반올림 중재판정 이행합의 협약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 지난 11월24일 속초에서 만난 황상기씨. 황씨는 개인택시를 운영하고 있다. 사진=손가영 기자
▲ 지난 11월24일 속초에서 만난 황상기씨. 황씨는 개인택시를 운영하고 있다. 사진=손가영 기자

“이재용 선처? 십몇 년 발뺌한게 왜 잘한 일이냐”

황씨는 2007~2012년까진 산재 인정 싸움에 매진했다. 삼성과 공식 대화가 시작된 2013~2015년까진 협상에 집중했다. 삼성의 일방적 보상 추진으로 대화가 파행에 치달은 2015년 10월부턴 노숙농성과 길거리 투쟁을 했다. 2018년 7월25일까지 1023일간 농성했다. 11년간 요구는 같았다. 산재임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과하고, 진상을 규명하고 재발방지책을 세우고, 피해자들에게 충분히 보상하라고.

지난 23일 피해보상·사과를 두고 삼성과 반올림 간 조정이 타결됐다. 삼성의 전향적 태도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뇌물혐의 3심 선처를 노린 게 아니냐는 추측도 나온다. “나는 삼성이 욕먹을 짓 했다고 생각해. 이런 문제 발생하면 환자가 더 안 나오게 즉각 해결해야지, 자기들 관련 없다고 십몇 년씩 발뺌하고 거짓말하다 이제 와서 죽지 못해 했는데 이게 왜 칭찬받을 일이야. 병들게 만들고 가족들 삶도 망쳤는데, 정신 똑바른 법원이면 제대로 판단해야 해.” 황씨가 말했다.

반올림은 29일 저녁 6시30분 서울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열리는 리영희상 시상식에 참석한다. 리영희상은 “진실을 생명처럼 여기고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했던 리영희 선생을 기리기 위해” 주는 상이다. 황씨는 “유미 죽음에 대한 억울함의 원인을 밝히려고 싸우기만 했는데 너무 작은 사람에게 큰 상을 주는게 아니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황씨는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노동권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반도체공장이 있는 삼성, SK하이닉스, LG 등 대기업은 산재 의심자에 대한 치료비 보상에 나섰지만 그밖의 노동자들은 여전히 사각지대에 있단 것이다. 황씨는 “하청업체, 중소기업 노동자들도 일하다 병을 얻는데 산재보험이 아니면 구제방법이 없다. 산재보험이 근본적으로 개혁돼 이들을 보호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