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ICT(정보통신기술) 경쟁력은 세계 1위인데, 노사관계는 최하위권(124위)’

동아일보가 지난 10월18일자 2면에 쓴 기사 제목이다. 같은 날 중앙일보도 경제섹션 2면에 ‘한국 국가경쟁력 두 계단 올라 15위, 노동시장은 48위’란 제목으로 같은 내용을 보도했다. 세계일보도 2면에 ‘한국 국가경쟁력 올랐지만 노동·생산 부문은 후진국’이란 제목으로 보도했다. 여러 언론이 같은 날 이 소식을 같은 관점으로 보도했다. 어쩜 이토록 10년 넘게 한결같이 보도할 수 있을까 싶다.

▲ 동아일보 10월18일 2면
▲ 동아일보 10월18일 2면
해마다 가을이면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하는 국가경쟁력 평가를 인용한 이런 보도는 우리 언론의 단골손님이다. 해마다 스위스 다보스에서 전세계 정치가와 기업가를 한자리에 모으는 세계경제포럼이 이 통계의 주체다. 혹자들은 다보스 포럼을 부자들의 사교클럽이라고 비하하지만 나름대로 고민 있는 토론도 이뤄진다.

한국은 140개국을 대상으로 한 이번 조사에서 종합점수 15위를 차지했다. 결코 나쁘지 않은 순위다. 그래도 우리 언론은 십년 넘게 이 조사결과를 매번 부정적으로 가공해 보도한다. 가공의 방향도 한결같다. 정보통신기술 경쟁력은 1위인데 노사관계 같은 노동시장 지표가 바닥이라는 거다. 순위가 오른 해엔 한결같이 ‘국가경쟁력 15위로 올랐지만 기업하기엔 여전히 나쁜 나라’(매일경제 10월18일자 12면)라는 식으로 보도한다.

그런데 올해 발표에서 놀라운 사실이 하나 드러났다. ‘거시경제 안정성’ 부문에서 우리나라가 1위를 차지했다. 거시경제는 국민소득이나 물가 안정성, 실업률, 통화, 국제수지 등의 세부항목을 포함한다.

1년 내내 최저임금 때문에 나라 경제가 거덜 났다는 ‘기승전-최저임금’ 보도와 이것 안 하면 경제가 곧 무너질 것 같다는 재계의 ‘탄력 근로제’ 확대 요구를 연일 쏟아냈던 언론이라면 ‘거시경제 안정성’ 1위라는 수치 앞에 한 번쯤은 고개를 갸우뚱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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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 언론 중에 이 점에 주목한 곳은 한 곳도 없었다. 그나마 스치듯 기사 본문에 언급한 언론도 한결같이 ‘낮은 물가상승률’ 때문에 후한 점수를 받았다고 했을 뿐이다.

비교적 낮은 점수를 받은 노동시장 부문은 48위였다. 여기서 평균점수를 다 깎아 먹었다. 세부적으로 노사협력은 가장 낮은 124위를 기록했다. 딱 여기까지 인용해 대부분 언론이 강성노조의 파업 만능주의 때문에 국가경쟁력을 다 갉아먹는다는 식으로 보도한다. 노동시장이 엉망인 게 마치 노동자들 탓이라는 식이다.

노동시장의 낮은 점수는 노사 모두의 잘못이거나 사용자에게 책임이 더 크다. 실제 ‘근로자의 권리’도 108위로 하위권인데 이게 노동자의 책임일 순 없다.

독과점도 93위로 하위권이다. 이는 우리가 여전히 재벌 중심의 경제구조에 갇혀 있다는 뜻이다. 이 부분을 반영한 언론도 없었다.

▲ 삼성 깃발. 사진=민중의소리
▲ 삼성 깃발. 사진=민중의소리
노동 분야만 빼면 우리나라는 단숨에 10위권 안으로 도약할 수 있다. 국가경쟁력을 높이려면 기업이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하고 재벌 중심의 경제구조를 혁신하는 기업 문화를 만들어 가는 게 정답이다. 매일경제가 지난달 18일 사설로 보도한 ‘후진적 규제와 노동시장이 또 국가경쟁력 발목 잡았다’는 제목의 사설을 읽으면서 우리 경제 부흥의 길을 맨 앞에서 가로 막는 게 언론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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