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몸담은 초기에 ‘진지충’이란 말을 처음 듣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정치커뮤니케이션 강의실이었다. 발표한 학생에게 정말 그런 말이 있는지 확인했다.

“그럼요. 친구들 사이에서 정치 이야기를 하면 ‘너 진지충이니’라고 되물어요.”

그래서란다. 정치 이야기는 가능한 하지 않는단다. 박근혜 정권이 나라를 무장 망가트리던 시기였다. 진지한 대학생, 정치를 거론하는 젊은이가 대학에서 ‘벌레’로 전락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나는 다시 충격을 받았다. 집으로 배달된 신문에서 ‘대문짝’만한 표지기사를 보았다. ‘엄근진(엄격·근엄·진지)’ 말고 ‘꿀잼’이란다. 믿어지지 않았다. 그 신문은 민중이 쌈짓돈 모아 윤전기 사주고 건물까지 지어준 신문, 한겨레였다. 설마하면서도 비판적 접근이리라 믿고 정독했다.

“최근 몇 년 새 너나 할 것 없이 쓰는 단어가 있다면 그건 단연 ‘꿀잼’이다. 비슷한 말로는 ‘빅잼’, ‘유잼’, ‘꾸르잼(꿀잼을 늘인 말)’이 있으며, ‘노잼’과 ‘엄근진’은 반대말이다. ‘엄근진’은 ‘엄격·근엄·진지한 척 한다’는 뜻의 신조어로, 용례는 이런 식이다. “왜 혼자만 엄근진?”, “엄근진 사람 노잼!” 진지한 표현이나 사회적 담론보다는 농담과 유머를 추구하는 세태가 고스란히 반영된 말이다.”

▲ 사진=gettyimagesbank
▲ 사진=gettyimagesbank
나는 그 ‘세태’에 제대로 된 분석이 이어지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아니다. “사람들이 ‘잼’ 찾기에 몰두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등록금과 집값은 치솟고 고용불안은 끝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삶이 비극적일수록 농담에 대한 갈망은 커진다” 정도가 그나마 들어 있을 뿐이다. 기사는 “유머 감각이 있는 사람은 어디에서나 환영 받는다”고 주장한다.

너무 사소한 트집일까. 이 글을 쓰며 많이 망설였다. 하지만 내가 받은 충격 또한 사실이다. 만일 그 기사가 중앙일보 정도에만 실렸어도 이해할 수 있다. 기사 쓴 기자의 문제가 아니다. 기사를 대문짝만하게 내놓는 결정은 그의 몫이 아닐 터다. 그 기사 하나만 두고 ‘지면 낭비’를 들먹이는 것도 아니다. 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하게 작금의 한겨레가 오늘을 살고 있는 민중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지면에 얼마나 담아내고 있는지 자문해보길 권하고 싶다.

이번 학기 수업 끝나고 연구실에 돌아와 내 눈시울을 적시게 한 학생의 발표를 소개한다. 그 학생은 ‘알바’를 세 탕 뛴다. 등록금 마련하기 위해서다. 그 가운데 하나가 중상류층이 즐겨 찾는 유명 고기집이다. ‘고객’에게 불판을 갈아줄 때였다. 대화 내용으로 미뤄 법조계 인사가 분명한데 여학생을 빤히 바라보더니 언죽번죽 말했다. “불판보다 네 얼굴부터 갈아야겠다.”

살풍경이 그려진다. 그 말에 서로들 낄낄거렸을 터다. 바로 그런 갑질이나 기득권의 불판을 서둘러 바꿔야 옳다. 물론 운동은 가능한 즐겁게 해야 한다. 찬 바닥에서 농성하며 투쟁할 때도 유머가 있으면 나쁘지 않을 성싶다. 다만 다시 ‘진지충’스럽게 묻고 싶다. 자살률 세계 1위, 출산률 꼴찌, 노동시간 최장, 비정규직 비율 최고, 대학등록금 최고, 청년실업 따위로 이어지는 ‘헬 조선’은 누가 언제 바꾸는가. 꿀잼으로 바꿀 수 있는가. 유머로 가능한가.

한겨레만이 아니다. 촛불 이후 공영방송에서 변화가 실감나지 않는다. 시사프로그램마저 오락이나 즐기기 수준으로 제작하고 있다면 너무 혹평인가. 중간광고가 등장할 때 비로소 지상파 방송이 달라졌음을 절감해야 할까.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수준과 부익부빈익빈의 경제 현실, 남‧북‧미 관계는 한겨레마저 ‘꿀잼’을 권하고 언론운동 출신이 사장인 두 공영방송마저 ‘쇼’를 고심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 그렇지 않아도 인터넷은 온통 ‘죽도록 즐기기’로 넘쳐난다.

꿀잼 없는 엄근진,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엄근진 없는 꿀잼은 견줄 수 없을 만큼 심각한 문제다. 지금보다 훨씬 치열하게 엄근진의 지면과 화면을 늘려가길,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민중의 고통을 담아가길 한겨레와 두 공영방송에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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