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프로 바둑기사들이 한국기원 집행부(송필호 부총재·유창혁 사무총장) 총사퇴를 요구하고 나섰다.

10월29일 임시기사총회에서 투표권을 가진 기사 296명 중 204명이 투표해 송 부총재(찬성 141표, 반대 57표)와 유 사무총장(찬성 124표, 반대 76표)의 해임건의안을 통과시켰다. 기사회가 해임건의안을 홍석현 한국기원 총재에게 넘기는 절차가 남았다. 사무총장 해임은 총재가 결정할 수 있으며 부총재 해임은 이사회가 결정한다. 함께 상정됐던 손근기 기사회장의 불신임안은 찬성 77표, 반대 124표로 부결됐다. 투표에 참가한 한 기사는 “이렇게 될 때까지 수수방관한 홍 총재의 처신을 이해 못하겠다”고 말했다.

바둑역사상 집행부 총해임 찬반투표가 벌어진 건 처음이다. 이렇게 된 데는 한국 바둑을 대표하는 기관인 재단법인 한국기원(총재 홍석현) 상층부가 보인 난맥상이 있었다.

▲ 홍석현 한국기원 총재. 사진=이치열 기자
▲ 홍석현 한국기원 총재. 사진=이치열 기자
지난 4월 헝가리 출신 프로기사 코세기 디아나 초단이 ‘김성룡 전 9단로부터 성폭행 당했다’고 폭로한 ‘바둑계 미투’ 의혹을 조사하면서 한국기원은 피해자에게 2차 가해성 질문을 하고 가해자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보고서 결론을 작성했다. 한국기원 집행부가 꿈꾸는 이른바 ‘빅픽처’의 일환인 IT 관련 새 사업을, 정관에 정한 의결 절차를 무시하고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기원의 인터넷 중계를 위탁받아 시행하던 회사 사이버오로와 맺은 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지했다. 올 초 한국기원은 사이버오로 대표를 해임하고 바둑TV 인사를 단독대표로 앉히려 했는데 잘 안 되자 원천정보제공 계약을 끊어 중계를 하지 못하게 했다. 이 계약은 사이버오로 전신 세계사이버기원 주식 66.7%로 한국기원이 최대주주가 되고 사이버오로는 한국기원 인터넷 사업 대행권을 갖기로 한 쌍무계약인데 법을 무시하고 깬 것이다. 또 중계를 못하게 하는 행위는 최대 주주가 주식 가치를 떨어뜨리는 자해 행위나 다름없어서 다른 목적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9월14일 한국기원 소속 프로기사 223명이 김성룡 성폭력 의혹 사건을 다룬 윤리위원회 보고서에 왜곡이 많다며 재작성해달라고 서명했다. 전체 기사의 64%가 집단 행동에 나선 것은 바둑계에 처음 있는 일이다. 서명서를 한국기원에 전달한 사람은 기사회장이 아니었다. 프로기사들 입장을 대변해야 할 역할을 저버린 손근기 프로기사회장은 프로기사 다수로부터 지탄받았다.

상황이 이런데도 한국기원은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보다 못한 원로기사 노영하 9단이 10월1일, 홍석현 한국기원 총재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 총재를 대신해 한국기원 사무국 행정에 실질적으로 관여하는 중앙일보 출신 송필호 부총재와 프로기사 출신 유창혁 사무총장이 어떻게 바둑계 혼란을 가져왔는지를 밝히면서 조처해달라고 호소했다. 언론매체들도 한국기원 행태를 보도했다. 이에 한국기원은 10월2일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이사회를 소집해 ‘윤리위원회 보고서를 재작성을 할 것인가’를 놓고 표결에 부쳤는데 과반수에 미달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번엔 바둑팬들이 들끓었다. 바둑역사에서 처음으로 바둑팬들이 한국기원 정문 앞에서 집회를 열고 ‘한국기원 집행부 퇴진’을 외쳤다. 유 사무총장은 기자간담회를 열고 한국기원 입장 해명에 나섰다. ‘한국기원이 바둑TV의 JTBC 계열 사유화를 시도한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며 윤리위원회 보고서 재작성은 다시 검토해보라’고 한 홍 총재의 말을 전한 뒤 언론 보도를 포함해 그간 알려진 일들을 대부분 가짜뉴스로 치부했다.

▲ 김수광 바둑 전문사이트 ‘사이버오로’ 기자
▲ 김수광 바둑 전문사이트 ‘사이버오로’ 기자
한국기원 집행부의 사안 인식이 이 정도라는 데 심각성을 느낀 프로기사들은 10월18일 대의원회의를 소집하고 송 부총재와 유 사무총장 해임건의안과 손 기사회장에 대한 불신임안을 상정했고 송필호-유창혁 집행부 해임건의안을 가결하기에 이르렀다. 한국기원이 이번 해임건의안 가결로 미투로 촉발된 혼란 국면을 수습하고 AI바둑 시대에 대비할 심기일전 계기로 삼을 수 있을까. 홍석현 총재 판단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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